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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성제약 민주노조 쟁취투쟁
⦁ 시기 : 1975년 6월 13일 ~ 1979년 2월 15일
⦁ 요약 : 1975년 삼성제약 노동자들이 노조를 결성하자 회사는 1976년 유령노조를 만들고 노조 무력화를 꾀하며 탄압에 나섰다. 이에 노동자들은 더욱 단결해 농성과 연장근무 거부 등 끈질긴 투쟁을 전개해 1979년 주요 요구사항을 쟁취해냈다.
1975년 6월 13일, 조향자, 권오선, 김명숙, 정종애 등은 그동안 회사 모르게 받아놓은 노동조합 가입원서를 전국화학노동조합에 제출했다. 이어7월 20일 서울지역지부 삼성제약분회를 결성, 7월 23일 성동구청에 분회결성 신고서를 제출했다. 그러나 이 신고서는 한 달 만에 반려되고 말았다.
회사측은 노동조합 결성 사실을 알게 되자 즉각 김석자 분회장을 보문동 창고로 발령냈다. 그러자 분회장도 사직서를 내고 말았다. 7월 26일에는 권오선을 보문동 창고로 보내고, 정종애는 성남시 회사 땅으로 보내 잡초를 뽑게 했다. 다시 7월 29일에는 권오선를 부산으로, 김명숙을 광주로, 정종애를 대구로 전출했다. 이들이 7월 30일 회사측을 부당노동행위로 고발하자 다급해진 회사는 원직 복직을 약속한 뒤 이들을 다시 보문동 창고로 보내 청소를 시켰다. 그러나 이들은 꿋꿋하게 버텨내 1976년 3월에 원직으로 돌아오게 된다.
회사는 그사이 사장 비서를 분회장으로 내세워 유령노조를 만들었다. 반장과 부반장으로 조합원을 채워놓고 있던 회사는 사장 비서가 결혼하면서 사직하자 8월 7일 총회를 열었다. 그러나 회사 쪽 조합원이 30여 명인 데 반해 민주노조를 지지하는 사람들은 200여 명이 넘어 회사의 총회 시도는 결국 물거품이 됐다. 이어 작업이 끝난 뒤 120여 명이 회사 모르게 문화예식장에 모여 임원 보궐선거를 시행했다. 지부장에 권오선, 부지부장에 김영순, 부녀부장에 정종애 등을 선출함으로써 진정한 노동자의 노조가 탄생했다. 이후 회사가 학력을 속였다는 이유로 권오선 지부장을 해고해 김영순 부지부장이 직무대행을 맡게 됐다.
1976년 12월 30일, 다른 제약회사에서 지급하는 수준인 보너스 연 400%를 요구하며 조합원 180여 명이 농성에 돌입했다. 그러자 이튿날인 31일 새벽 4시, 동부경찰서 정보과장과 사복형사 5~6명이 나타나 5분 이내에 해산하지 않으면 전원 연행하겠다고 협박했지만 투쟁의 의지를 꺾을 수 없었다. 다음 날 오전 8시 노동청, 전국화학노조 대표, 노조 대표, 회사가 참석한 가운데 노사협의가 열렸다. △연말 상여금 30% △설에 올해분으로 30% 추가에 합의하고 오후 1시 조합원 농성을 해산했다.
1978년 7월 26일, 회사가 제시한 ‘여름휴가 상여금 50%’에 맞서 노조는 ‘100% 지급’을 요구했다. 점심식사와 연장근무를 거부하고 투쟁을 벌여 7월 29일에 마침내 상여금 100%를 쟁취해냈다.
1978년 12월 20일에는 수제실에서 난방시설을 요구하며 연장근무 거부 투쟁이 일어났다. 노조에서도 이 투쟁에 호응해 1979년 연중 상여금 300%를 요구하며 연장근무 거부 투쟁을 전개했다. 회사는 30여 명의 남자 사원을 투입해 라면으로 끼니를 잇던 노동자들에게 보란 듯이 음식을 사 먹이며 연장근무를 시키기 시작했다. 이어 반강제적으로 연장근무에 대한 찬반을 적게 했지만, 개표 결과 찬성자는 겨우 0.5%에 지나지 않았다. 회사는 2월 들어 식당 여성 직원들에게 연장근무를 강요하기도 하고, ‘새마을 분임토의’라는 것을 만들어 빵, 과자, 음료수를 제공하며 “생일파티도 해주겠다”고 구슬리기도 했다. 비교적 조직력이 약한 주사실에 연장근무를 종용하기도 했지만 이러한 위협은 오히려 조직력을 강화할 뿐이었다. 마침내 1979년 2월 15일, 노동자들의 끈질긴 투쟁에 회사도 항복해 추석 전까지 상여금 200% 지급에 합의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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