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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간준비4호] 이달의 노동역사
딸에게 전하고 싶은 아빠 이야기
글 : 김영수 (발기인) / 사진 : 글쓴이 제공
촛불시위가 한창이다. 많은 사람들은 시위축제, 아래로부터의 직접 민주주의 꽃, 제어할 수 없는 시민들의 끼라는 등 온갖 수사를 동원해도 모자랄 판이다. 명박이는 6월 10일, 청와대 뒷산에 올라가 이슬을 맞으면서 대체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시위에 참여하고 있는가를 확인하고 난 뒤, 정말 많은 사람들의 촛불 앞에서 인간적인 고통을 느꼈다고 하면서도 ‘협상무효, 고시철회, 명박퇴진’ 등의 요구 앞에서는 당당하게 버티고 있다.
아마도 이런 이야기는 누구나 쉽게 할 수 있는 말이다. 나는 요즘 촛불시위에 참여하거나 방송을 통해 촛불을 접하면서 적지 않은 회한에 빠져들고 있다. 지난 6월 10일 이전까지 중학교 3학년인 딸과 함께 촛불시위에 참여하면서, 나의 인생에 전환점이었던 1980년 5월의 나와 2008년 5월 딸의 경험을 동시에 반추해본다. 1980년 5월 총부리가 2008년의 명박산성으로 등장하고, 1980년 5월의 카빈총이 2008년 5월의 촛불로 되살아난 그 한복판에 아빠와 딸이 서 있는 모습을 말이다.

(사진 1. 요즘 한창 진행중인 서울의 촛불집회 모습)
1980년 5월 어느 날, 군산의 00고등학교 기숙사는 어처구니없는 한 장의 선전물 앞에서 난장판이 되었다. 1년 후배가 성당에서 받아 온 광주의 모습 앞에서 우리들은 입을 다물지 못하였다. 수년이 지나고 난 이후에 외신기자들이 찍었던 비디오를 통해 다 알려진 사실이지만, 우리들은 한 장의 선전물(삐뚤빼뚤하게 쓰여진 등사기 선전물) 속에서 계엄군의 폭력을 적나라하게 보았고, 그러한 폭력에 저항하는 시민군의 모습에 고개를 숙이지 않을 수 없었다.
당시 고등학교 3학년이었던 나는 같이 한 방을 쓰고 있는 친구 4명과 함께 4홉들이 소주를 마시면서 광주의 상황을 토론하기 시작하였다. 이미 우리학교 기숙사에서는 1979년 가을부터 다음 대통령이 전두환(당시 박정희의 양아들로 소개되었음)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던 터라(군산 미군기지에서 나오는 각종 잡지를 통해 쉽게 알 있었음), 전두환이 광주시민들을 총칼로 죽이고 있다는 사실에 분노하지 않을 수 없었다. 밤마다 기숙사 205호는 토론장이 되었다. 2008년 아고라와 같은 광장이었다. 핵심은 광주를 가느냐 마느냐의 문제였다. 나를 포함한 다섯 명의 대입 준비생들은 광주로 가는 기차가 개통되는 날에 광주를 방문하기로 결정하고 난 이후, 서로 돈을 빌려 여비를 마련하였다.

(사진 2. 80년 광주의 차량시위 모습 “죽이자 전두환”라는 핏빛글씨가 선명하다)
드디어 5월 27일 도청의 시민항쟁군들이 계엄군에 의해 진압되고 난 이후, 5월 29일 우리들은 군산에서 이리(현 익산)행 열차를 타고 이리에 도착하고 나서 목포행 열차가 도착하기 전까지 다시 토론을 하였다. 학교를 빠지는 것에 대한 문제였다. 한 친구는 이미 기숙사에서 다 했던 이야기니까, 며칠 놀러 간다 생각하자고 하였다. 다들 그 친구의 말에 결석에 대한 두려움을 뒤로 한 채, 우리들은 목포행 열차에 몸을 실었다. 괜히 죄를 지은 사람처럼 말없이 달리는 열차의 창밖만을 응시한 채 말이다. 아마도 친구들 모두 괜히 광주를 갔다가 문제가 생기는 것 아닌가라는 걱정을 했을 것이다. 나 역시 마찬가지였다. 우리들은 언제 군산으로 돌아오자는 결론을 내리지 않은 상태에서 광주를 방문하기로 했으니 말이다.
우리는 송정리에서 내려 광주로 가는 버스를 타려 하는데, 한 친구가 양동시장 근방에 친고모가 음식점을 하면서 살고 있으니 먼저 고모집으로 가자는 것이었다. 1987년 6월 항쟁 당시, 명동성당 안에서 5일 동안 집단농성투쟁을 전개하면서 6월 항쟁의 불꽃을 이었던 사람들 중에 한 사람이다. 이 친구가 나중에 한 이야기이지만, 광주를 가긴 가는데 너무나 두려웠다는 것이었다. 고모한테 먼저 광주의 상황을 듣고서 움직이는 것이 좋을 것 같아 고모집으로 가자고 했다는 것이다.
그 친구의 고모집에 도착한 우리는 그 친구와 우리를 반가워하지 않는 고모의 인상을 읽지 않을 수 없었다. 학교 결석하고 왜 광주에 떼거지로 몰려 왔느냐하고 힐난하는 고모의 모습이었다. 고모는 우리들에게 국밥 한 그릇씩 퍼 주시면서 하시는 말씀이 아직도 생생하다. ‘너희들! 광주 시내를 들어갈 때 몰려서 가지 말아라. 어제도 옆 학교 운동장에서 축구를 하던 사람들 모두 군인들에게 끌려갔으니까 말이야. 알았어?’ 정말 국밥을 어떻게 먹었는지 도무지 생각이 나질 않는다.
국밥을 먹고 난 후, 고모의 아들(당시 6-7세 정도)과 함께 고모집 옆 다리(양동시장에서 시내로 들어가려면 그 다리를 건너야 함) 위에서 그 어린 아이의 말이 우리들을 무서움에 휩싸이게 하였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다리 밑으로 피가 흐르는 것을 보았다. 우리들은 손 야구를 하면서 전두환 마져라 하면서 야구를 하였다.’ 눈으로 보았던 사실을 거짓 없이 전하는 어린 동생의 말은 광주항쟁의 처절한 모습을 상상하고도 남을 정도의 두려움이었다.
우리는 고모집을 뒤로 한 채 2명과 3명으로 나누어서 광주 시내를 걷기로 하였다. 잘 몰랐던 광주시내였지만, 표지판을 보면서 도청과 역전으로 향했다. 도청과 역전으로 가고 있는 우리들은 주변을 흘깃흘깃하면서 전장의 상흔을 확인하였다. 깨진 유리창, 벽에 남아 있는 총탄 자국, 여기저기 널부러져 있는 쓰레기들이 우리들의 마음을 참담하게 하였다. 도청과 역전에서도 그러한 현상은 마찬가지였다. 죽은 사람은 볼 수 없었지만, 사람들이 죽을 수밖에 없었던 상황만큼은 나와 친구들의 가슴에 각인되었다.
우리들은 그 날 저녁, 다시 소주와 밥을 먹으면서 토론이 붙었다. 다음 날 군산으로 가자고 하는 부류와 더 남아서 광주의 다른 곳도 보아야 한다는 부류로 나누어졌다. 적지 않은 시간의 토론 끝에 우리들은 광주에 머무는 것이 아니라 며칠 더 광주 인근 도시로 가서 광주의 상황을 알아보기로 하였다.

(사진 3. 시위에 참여하고 있는 고등학생들의 모습)
우리들은 저녁 시간에 전장터로 남아 있는 광주 역전에서 순천행 열차를 탔다. 순천에서 광주로 통학하는 학생들이 상당히 많았다. 학생들은 말 한 마디 없이 초점 없는 눈으로 그저 창밖만을 응시하고 있었다. 우리들은 각자 좌석을 따로 잡고 앉아서, 옆 학생들에게 뭔가를 물어 보려 했지만, 도무지 말을 걸을 수 없었다. 답답한 마음을 끌어안고 순천에 도착하여 하룻밤을 묵었다.
다음 날 아침, 우리들은 아침을 먹고 두 팀으로 나누어 도보행진을 하면서 만나는 시골 양반들한테 광주항쟁 당시 이 지역 상황을 알아보기로 하였다. 이러한 방식의 도보행진은 5월 30일부터 6월 1일까지 3일 동안 계속되었다. 친구들 각각 서로 다른 생각들을 하였지만, 여행으로 생각하자고 하면서 서로를 북돋우는 과정이기도 했다. 6월 2일 아침, 우리들은 마지막으로 송광사를 방문하여 지친 몸을 추수려 6월 3일에 군산으로 올라가자고 합의하였다.
도보행진의 과정은 이중적이었다. 한편으로는 여행의 일환이기도 했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시골의 노인 양반들을 통해 광주항쟁 당시의 상황을 생생하게 들을 수 있는 기회였다. 나는 이 도보행진 과정에서 나 자신과 약속을 하였다. 내 인생에서 전환이 되는 약속이었다. ‘내가 만약 공식적으로 첫 글을 쓴다면, 광주 문제를 쓰겠다.’ 이 약속은 1989년 석사논문으로 지켜졌다.
아빠가 약속을 지켰다는 것을 딸에게 말하려는 것이 아니다. 약속을 지키는데 필요한 일을 하지 않을 수 없었고, 지금도 광주에서 한 약속과 비슷한 미래의 약속들을 하면서 노력하고 있다는 것을 딸에게 들려주고 싶은 것이다. 아빤, 딸이 이런 점들을 이해하고 실천했으면 한다. 촛불시위 현장은 축제의 장이지만 실은 전장터란다. 언제 내가 죽을지도 모르는 전장터이기에 지금의 네 모습이 많은 사람들만이 아니라 너 자신에게도 마지막일 수 있다는 심정으로 던져야만 할 약속의 장이기도 하단다. 자신의 약속을 지키기 위해 자신을 던질 수 있다면, 이 세상에서 너는 정말로 자유롭고 행복하게 살 수 있단다.

(사진 4. 글쓴이 가족사진, 아빠를 많이 닮았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