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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서울지하철노동조합 총파업(1989년 3월)
첨부파일 -- 작성일 1989-03-16 조회 377

1989년 서울지하철노동조합 총파업

 

시기 : 1989316

 

 

서울지하철노동조합의 결성

 

서울지하철은 19741호선 개통 이래 1989년 당시 4호선까지 건설돼, 서울 전체 교통량의 30% 정도를 담당했다. 초기에는 지하철건설주식회사와 운영사업소로 분리돼 있던 체계가 1984년 서울지하철공사가 설립되면서 일원화됐다. 수도권 교통정책과 맞물려 대형공사를 급하게 진행한 결과 29백억 원이라는 엄청난 건설부채를 안고 있었고, 그나마 3·4호선의 경우 전동차량을 부산지하철보다 1량당 2억이나 비싼 가격으로 도입하는 등 비리도 드러났다. 또 군 출신자들의 낙하산식 인사로 운영상의 문제를 야기했고, 3·4호선 건설과 세림아파트 건설 등을 둘러싼 부실공사와 부패·비리가 서울지하철공사에 대한 신뢰를 떨어뜨리고 있었다.

 

한편 지하철공사는 서울시의 100% 투자기관으로 노동조합의 교섭상대가 공사 사장임에도 단체교섭 후 그 시행 여부를 서울시장으로부터 승인받아야 하는 제도적 모순을 안고 있었다. 서울시장은 지하철공사의 임금에 관한 사항, 승진·정원 등의 인사권을 승인할 수 있는 권한을 가지고 있어 사실상 지하철 공사의 사장과 같은 역할을 하고 있었다.

 

서울지하철 노동자들의 근무조건은 매우 열악해 24시간 2교대 근무로 1주당 54시간(한국 평균 46.5시간)의 장시간 노동에 시달리고 있었다. 대기오염도는 1호선의 경우 허용치의 900%, 2호선은 허용치의 300%가 넘었고, 한여름에는 40도까지 올라가는 열악한 노동조건에 처해 있었다. 게다가 1984년 지하철공사 통폐합 이후 평균 학력이 타 공사와 거의 비슷함에도 현장근무자를 본사 직원보다 낮게 취급하고 공무원, 한국전력공사, 통신공사보다 30%나 낮은 보수를 지급해 불만을 누적시켰다. 기능직을 일반직보다 1등급 하향편제하고 동일업무를 수행하고 학력과 능력에서 차이가 없는데도 일반직·고용직으로 직제를 구분한 것이다. 본사나 현업에서 사무업무를 보는 직원이 일반직·기능직·고용직으로 차별받는 경우는 서울지하철공사 외에는 드물었다. 특히 일반직은 대개 특채로 입사해 사실상 경험과 능력이 없음에도 기능·고용직 노동자들 위에 군림해 현장노동자들의 분노를 자아냈다.

 

임금에서도 공사출범 이후 직제 간 격차가 늘어났다. 공무원 신분이었을 때 하위직 임금은 중상위직의 48% 정도였으나 공사로 통폐합된 이후에는 그 절반인 26% 정도밖에 안 되었고, 1985년부터 공무원과 공사 노동자 사이의 임금격차를 줄인다는 정부 방침에 따라 지하철공사의 기능·고용직 노동자들의 임금수준을 70% 수준으로 떨어뜨렸다. 서울지하철공사의 기능직 노동자들에 대한 차별은 198863일 당시 사장이던 김재명의 아침조회 발언에서 그대로 드러난다. “내 주특기는 까부수는 것이다... (중략) 기능직이 어떻게 일반직과 같이 노느냐... (중략) 보리밥이 쌀밥 될 수 있느냐

 

이외에도 승진과 인사를 둘러싼 불공정과 비리는 지하철공사 노동자들의 분노를 더욱 부채질했다. 이같이 불만과 분노가 누적되어 가던 중 198778월 노동자대투쟁을 배경으로 지하철노동조합이 결성됐다. 서울지하철노동조합은 198781257명의 발기인으로 결성돼 초대 위원장에 배일도가 선출됐고, 설립 이후 몇 달 만에 조합원이 5,700여 명으로 늘어났다. 서울지하철노조의 특징은 위원장 이하 지부장, 지회장 등 모든 조합 간부 조합원 직선 3개 기지, 2개 공작창, 102개 역사, 100개의 현업분소로 사업장이 서울 전역에 분산. 7개 지부, 27개 지회, 124개 분회로 조직 2교대 근무기 때문에 전조합원이 한자리에 모이기가 매우 어렵다는 점을 꼽을 수 있다.

 

직제개편 투쟁

 

직제문제는 1984년 서울지하철공사의 설립 이후 지하철 노동자들의 핵심적인 불만사항이었다. 직제란 한 회사에 근무하는 노동자의 경력에 따라 직급을 분류, 급여를 차별 지급하는 제도다. 당시 지하철노조는 직제의 문제점으로 공사 통폐합 시 기능직·고용직의 차별화 직급체계 수직적 3계층화 보수체계의 3원화 보수·승진 소요년수 차별 직급별 정원분포의 차별 등을 꼽았다. 즉 공사 통폐합 시 기능직은 1등급씩 하향편제했으며, 일반직 임금은 70% 이상 인상한 데 반해 기능직은 14.4%만 인상해 차별했다. 특히 기능직의 40% 이상을 차지하는 6등급은 물가인상분도 안되는 4.3% 인상에 그쳤다. 통폐합 후 같거나 비슷한 업무를 수행하는 직원의 직급체계를 일반직·기능직·고용직으로 구분해 분열을 조장했고, 기능직의 최고 1등급이 일반직의 4급에 불과해 기능직과 일반직이 현저히 차별대우를 받게 했다. 임금 역시 일반직의 기본급은 공무원의 153%인데 반해 기능직의 임금은 공무원 임금에 미치지 못했다. 또 기능직의 승진 소요년수를 일반직과 차별해 승진을 어렵게 했고, 낙하산식 특별채용으로 기능직의 승진기회를 박탈했다. 직급별 정원분포에서도 일반직과는 달리 기능직은 가장 낮은 등급인 6등급이 전체의 40.4%이고 1등급은 1.5%에 불과했다.

 

노동조합은 집회, 공청회, 설문조사, 회의로 조합원의 의견을 집약해 불합리한 직제를 개편하는 내용과 골격을 마련했다. 노조측은 직제개편를 단체교섭과 함께 추진했으며 이 과정에서 파업을 선언하는 등 다양한 실력행사를 통해 198711월 단체교섭 체결과 함께 직제개편에 관한 양해각서를 체결하고 198861일부터 실시하기로 합의했다. 이때 조합측이 제시한 직제개편 방향은 일반직·기능직·고용직의 3개 계층으로 차별화된 직제의 통일 공사 통폐합 시 기능직 1등급 하향편제의 원상회복 보수 체계 일원화였다. 그리고 11월에 합의된 양해각서의 주요 내용은 기능직 승진 소요년수 경과자 전원 승진 3개 직급 단일화 기능직과 고용직에 대해 개편된 직제에 의한 3호봉분 가산이었다.

 

그러나 이러한 합의내용은 19886월까지 시행되지 않았고 결국 노조는 전 조합원의 93%가 참여한 투표에서 94.7%의 찬성으로 파업을 결정하기에 이르렀다. 노조는 61일 집행부·대의원 연석회의를 개최, 616일까지 노조의 요구가 관철되지 않으면 17일부터 파업에 돌입키로 하고 그 이전 15일간의 냉각기간 중에는 단계적으로 준법투쟁을 강화했다. 리본 달기, 머리띠 두르기, 역내 대자보 붙이기, 역내 방송 등의 준법투쟁은 대시민홍보에서 상당한 효과를 거두었고 지하철노조의 힘을 유감없이 발휘했다. 611일 용답구장에서 2,500여 명의 조합원 참가한 가운데 직제개편 대회를 열고 경찰과 충돌한 후 1,500여 명이 대한문앞에서 농성에 돌입하기도 했다. 613일 위원장이 경찰에 연행되자 즉각적인 행동을 개시해 당일로 위원장이 풀려나게 하는 등 전체 조합원들의 단결된 투쟁으로 파업돌입 몇 시간 전에 공사측의 항복을 받아냈다. 결국 공사측은 위의 합의사항을 820일까지 이행하겠다고 약속했다.

 

배일도 집행부 사퇴와 재출마를 둘러싼 조직 갈등

 

당시 서울시하철노조 집행부가 첫 번째로 안고 있었던 문제는 집행부 정통성에 관한 것이었다. 198781257명으로 노조를 설립한 뒤 불과 몇 개월 만에 조합원이 처음의 100배인 5,700여 명으로 증가했으나, 이때 재신임이나 재선거 절차를 거치지 않아 위원장과 집행부에 대한 정통성 시비가 제기됐다. 이 문제는 19882월의 정기대의원대회와 5월 중순의 대의원대회에서 신임 투표를 거쳐 재신임을 획득함으로써 일정 정도 해소됐다.

 

두 번째 문제는 배일도 집행부가 투쟁성이 부족하다는 제기에 있었다. 창립 이후 파업 등 강경투쟁보다는 협상과 투쟁노선을 결합하여 단체교섭을 진행했으나 실효를 거두지 못하자 조합원들이 집행부의 투쟁성 문제를 제기하기 시작했으며, 198710월에는 지회장들이 상임집행위원회를 비판하며 독자투쟁을 시도하기까지 했다.

 

세 번째 문제는 집행부의 사업방식이 비민주적이라는 데서 발생했다. 사업의 결정과 집행에서 대의원대회나 지부장 등 현장 단위의 결의보다는 위원장 단독결정에 의존하는 경우가 많아 위원장의 독선에 대한 문제제기가 나오기 시작했다. 이러한 제기에 대하여 198856월 투쟁 과정에서 월 12회 정도의 대의원대회를 개최하고, 지회장까지 포함하는 확대간부회의를 월 2회 이상 수시로 개최하여 상집과 지회장 간의 갈등을 해소하려 했으며, 상집도 정기적으로 개최해 현안문제를 위원장 단독이 아니라 토의를 거쳐 결정, 집행하는 관행을 확립하기 위해 노력했으나 8월 이후 선거전에 돌입함으로써 무위에 그치고 말았다.

 

이러한 지하철노조의 내부문제에 대해서는 당시 위원장이었던 배일도가 불출마 선언을 번복하고 재출마를 선언하면서 <지하철 1년의 평가와 과제>라는 소책자를 통해 그간 지하철노조 운영의 문제점으로 민주적 원칙이 조직의 모든 운영과 구성에서 확고히 정착되지 못했고 교섭력이 미숙하며 위원장이 독선적이었고 회계가 철저하지 못했음을 밝힌 바 있었다. 위원장 스스로도 밝힌 노동조합 내의 누적된 문제에 대해 수습대책위(이후 진상규명추진위로 전환)1988722<속보> 1호를 통해 단체교섭 과정에서의 위원장과 사장의 묵계 의혹과 주택조합 의혹 등을 주장했고, <속보> 2, 3, 4호를 통해 대의원대회 소집을 추진했다. 결국, 727일 대의원대회에서 배일도 집행부는 총사퇴하고 위원장은 불출마를 선언하게 된다.

 

한편 서울지하철노조 선거와 관련해 서노협에서는 지하철 현 상황에 대한 서노협의 제언이라는 제목으로 배일도 위원장은 자신의 불출마 선언을 철회해야 한다. 자신이 이끌어온 기존 노조활동의 공과를 정당하게 평가받아야 하며 제기되는 비판이 있다면 동지 전체의 뜻에 따라야 할 것이라는 내용의 성명을 발표했다. 성명서는 지하철노조 내 일부 조합원들에 의해 즉각 반발을 샀다. ‘서울지하철 완전직제 실현 및 노조탄압저지 대책위원회조합원에 기초한 진정한 연대를 위하여라는 성명을 내 노동조합의 민주화를 저해해 온 특정 인사를 비호하고, 특정 인사가 아니면 지하철노조는 안 된다는 독선에 사로잡힘으로써 지하철노조의 모든 조합원을 무시하고 있다고 비판했다.

 

김명희에 이어 정윤광 집행부의 출범

 

811일에 치러진 1차 투표에서 후보자 8명 중 배일도 1,971, 김명희 1,810표를 얻어 결선 투표 결과 김명희가 당선됐다. 김명희 집행부는 824일 임시대의원대회에서 만장일치로 파업을 결의하고 출범, 10일만인 92일 총회를 열어 87%의 지지로 파업을 결의했다.

 

노조측은 김명년 지하철공사 사장을 단체협약 불이행으로 노동부에 고발하는 한편, 61일 제출한 쟁의발생신고가 계속 유효하다고 판단, 전격 파업을 결정했다. 이에 정부측은 불법 파업이므로 강경대처하겠다며 전 공무원과 정보기관을 동원해 유언비어를 유포하는 등 와해 공작을 벌였다. 또 언론을 통해 지하철 파업의 부당성을 선전했고, 야당은 조사단을 파견해 중재에 나섰으며, 올림픽을 앞두고 있으니 파업을 자제하라고 촉구했다.

 

그러나 노조 집행부는 93일 하루 동안 확대간부회의에서 파업연기 무효선언, 비상조합원총회 개최 등 우여곡절 끝에 올림픽이 끝나는 105일 전후로 파업을 연기했다. 비상조합원총회에서 김명희 위원장은 완전직제 개편을 위해 올림픽 이후로 파업을 미루자고 설득했으나 일부 조합원들이 반발, 지부별 토론에 부쳐졌다. 지부별 토론에서 차량, 시설, 설비 지부는 즉각 파업돌입을 주장하였고, 승무, 역무1·2지부는 연기를 주장해 양쪽의 의견이 팽팽히 맞서자 김 위원장은 집행부 결정에 따라 파업을 올림픽 이후로 연기한다고 최종 선언했다.

 

연기된 일정에 따라 107일 파업 돌입을 앞두고 교섭이 105일 타결됐다. 6월 합의사항을 완전히 쟁취된 것은 아니지만 직제개편에 의한 3호봉 가산과 그에 따른 연·월차수당 인상을 6월로 소급 시행하기로 합의했다. 그러나 합의에 상여금이 제외됐고 노조 집행부에 대한 불만도 쏟아져 11월에는 차량 분회에서 독자적인 파업이 진행되기도 했다.

 

1989년 들어 2대 위원장 김명희가 사퇴하고 23일 선거에서 정윤광이 유효투표 5,245표 중 2,741표로 과반을 얻어 3대 위원장에 당선됐다.

 

316 총파업

 

서울지하철노조와 공사 측은 198810월에 3번째 각서를 교환했다. 근무형태를 8시간 노동제로 변경하고 임금체계를 개선해 19891월부터 실시하며, 이 중 근무수당을 19891월부터 기본급에 포함하는 내용이다. 그러나 합의는 이행되지 않았고 노동조합은 228일 노동부에 쟁의발생신고를 접수했다.

한편 서울시측의 요구로 진행된 35일 교섭이 완전히 결렬되자 서울지하철노조는 36일을 기해 무임승차 투쟁을 전개했다. 승객의 90%가 무임승차하는 등 대중적 호응이 높아지자 서울시가 6일 다시 교섭을 요청해 7일에는 타결되는 듯했다. 그러나 김명년 서울지하철공사 사장이 합의서 서명을 거부함으로써 김명년 퇴진, 배일도 석방 등의 요구가 추가됐다. 우여곡절 끝에 합의문이 만들어졌지만, 이번에는 고건 서울시장이 서명을 거부함으로써 교섭은 완전히 결렬됐다.

 

316일 오전 625분 서울지하철 군자차량기지를 7,000여 명의 전경들이 에워쌌다. 이어 경찰 지휘본부가 극동도시가스빌딩 옥상에 차려졌고, 김우현 서울시경 국장의 지휘로 최루탄을 쏘며 정문·후문 등 5개소를 통해 전경이 투입됐다. 조합원들은 후생관 옥상에서 화염병을 던지고, 정문에 만들어 놓은 바리케이드에 불을 지르며 저항했지만, 진압 개시 10분 만에 노조 사무실을 탈취당하고 후생관이 완전히 포위됐다. 이어 25분 만에 조합원 2,344명을 연행하고 진압이 완료됐다.

 

한편 제2지도부(임시위원장 서창호)를 중심으로 700여 명이 316일부터 민주당에서 철야농성에 돌입했다. 비록 현장은 진압됐지만 지하철은 제대로 운영되지 않았다. 파업 3일째인 18일에는 83%의 조합원들이 복귀했지만 그 중 2/3 이상이 작업을 거부하고 민주당과 평민당 농성에 합류했다. 1호선만 정상적으로 운행됐고 3호선 운행은 전면 중단됐다. 파업 6일째인 321일에도 76%가 직장에 복귀했지만 겨우 15% 정도만 작업에 임했고, 기관사들은 9.6%만이 운행에 참여했다.

 

이후 329일 중앙노동위원회에서 5월 말까지 근무형태와 임금체계 개선안을 노사협의를 통해 작성하고 61일부터 시행하며, 임금은 새로운 호봉체계로 11일로 소급해 지급하도록 하는 중재안을 냄으로써 투쟁이 종료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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