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경애 [인간문제]의 한 구절이다. 노동현장과 노동자들의 투쟁, 사랑과 배신 등이 잘 그려진 소설이다. 거기 등장하는 공장이 동양방적(일본 도오요방적) 인천공장이었다.
동양방적 인천공장은 만석동 매립지에 1933년 말 완공되어 이듬해부터 조업을 시작했다. 만주침략 이후 일본 독점자본이 식민지로 진출하면서 설립된 것이다. 주로 군복을 만들었다. 노동자들에 대한 착취가 심했던 곳이고, 노동운동가들이 많이 활동했던 곳이다.
대부분의 노동자는 굶주림에 못 이겨 도시 공장으로 온 이향민이었고, 그중에도 여성노동자가 많았다. 1936년 3월 19일 [동아일보] "눈물 실은 소녀열차"라는 기사를 보니, 문경을 중심으로 상주, 예천 등에서 인천동양방적회사 여공이 대규모로 모집되어 갔는데, 그 달 15일에도 78명이 고향을 떠나 인천으로 갔다. 동양방적 인천공장이 만들어진 이후 점촌역을 떠난 부녀자만 560명이란다.
일제시대 제사공장에서 일하는 노동자들
소설 [인간문제]의 내용을 빌자면, 이들은 수용소 같은 기숙사에서 쥐꼬리만한 월급에 장시간 노동에 시달렸다. 그나마 월급도 저축이라는 명목으로 빼앗겨 제대로 받지도 못했다. 감독의 희롱은 끊이지 않았고, 폐가 썩고 손가락이 문드러져도 노동을 그만둘 수 없었다. 노동자들은 이런 환경을 스스로 바꾸고자 저항했고 혁명적 노동운동가들이 함께했다. 소설의 배경은 1930년대지만 1980년대에 읽어도 그 정치성이 생생했던 내용이다.
해방 직후 노동절 행사 참여를 둘러싸고 이 동양방적 노동자들이 투쟁을 했다.
1946년 5월 1일 노동절은 해방 이후 처음으로 맞는 노동자의 날이자 대중적 첫 기념행사였다. 동양방적 노동자 900여 명도 메이데이행사에 참여하기로 결의했다. 그날 노동절 기념행사에는 20만 명의 노동자와 친노동 세력들이 모였다.
전평은 노동절 행사 준비를 철저히 했다. 전평의 지침내용을 보면, 대부분의 노동자들이 노동절이 무엇인지 잘 알지 못하는 상황이므로 각 분회는 미리 좌담회, 강좌를 열어 메이데이에 대한 해설사업을 하여 노동자 스스로 투쟁에 참여하도록 준비해야 한다. 둘째, 각 분회는 8시간 노동제 임금인상 해고반대 노조운동의 자유 등 그 사업장의 당면 요구조건을 잡아 노동절 이전에 미리 투쟁을 준비해야 한다고 했다. (전국노동자신문 4. 12. ; 안태정 조선노동조합전국평의회 234쪽)
이런 준비 속에 치러진 노동절 대회는 해방의 기쁨을 누리고 미래에 대한 희망을 노래하는 자리였다. 동양방적 노동자 900여 명도 여기서 노동자 단결의 기쁨을 맘껏 누리고 공장으로 돌아갔을 것이다.
그런데 회사측은 메이데이에 쉰 대신 5월 5일 일하라고 했다. 노동자들이 이를 거부하자 회사측은 노조위원장 외 3명을 경찰에 넘겼다. 태업을 주도했다는 게 이유였다. 노동자들은 즉시 석방을 요구했으나 공장장은 경찰을 불러 노동자를 추가 검거했다. 그리고 “대한노총에 가입하라”고 했다. 노동자들은 “악질모략을 타도하라”며 동무들의 석방을 강력히 요구했다. 결국 경찰측이 교섭에 나섰고 노동자들의 요구가 관철되어 문제가 일단락되었다.
일단 투쟁의 불씨를 막고 난 회사측은 5월 8일 노조위원장을 경성본사로 전근시켰다. 탄압은 노조 간부들에 그치지 않았다. 휴가 후 복귀 일자보다 2일 늦었다는 이유로 노동자를 해고했다.
이러한 상황에서 투쟁은 또다른 양상으로 확산되었다. 5월 25일 노조는 외출자유와 8시간 노동제의 실시, 노조승인, 후생시설의 정비확충 등 9개조의 요구를 제시하였다. 회사측이 거절하자, 노조는 군정청, 경찰서, 시청 등에 각각 진정서를 제출했다. 군정청이 해결에 나서는가 싶었으나 '전평의 지시를 받는데 대해 승인할 수 없으니 노조의 재조직과 간부명을 군정청에 제출하라'고 했다. 게다가 회사측도 '이 이상 모르겠다'는 태도였다. 노동자들은 농성을 시작했다. 무장경관이 출동하고 노동조정위원회가 열렸다. 공장장은 기계가동을 정지시켰고 주도적으로 활동한 노동자를 해고하겠다고 했다. 밤에는 기숙사 노동자들의 출입을 금지시키고 해고자를 강제로 트럭에 실어 가려고 하였다. 노동자들이 다 뛰어 나와 막아섰다. 결국 미군정 헌병대까지 출동했다. 이후 동방쟁의단이 상경투쟁을 전개하고 전평회관에서 농성투쟁을 벌였고 이를 발판으로 단위 사업장에서 발생한 투쟁은 지역 차원으로 그리고 전국 차원으로 확대 발전되었다.
이에 전평은 러치 군정장관 미군정 노동당국 주요 간부들과 장시간 회담을 하였다. 그 결과 쟁의단은 6월 13일부터 공장에 복귀하여 일하기로 합의했고 전평과 각 노조기관이 단체교섭권자로서 정식 인정되었다.
동방쟁의단은 복귀를 하면서 다음과 같은 성명서를 발표하였다.
우리는 자주 독립을 위해서는 자주경제를 확립하지 않으면 안된다는 견지에서 생산증강에 매진하여 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회사측은 우리를 일제시대와 같이 혹사하며 압박하였으므로 우리는 드디어 궐기하였던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동족상쟁의 불상사를 피하고 산업건설을 위하여 싸우겠다는 기본적인 태도와 다음과 같은 이유로 공장에 복귀한다.
1. 요구조건 전부에 대하여 원만 해결의 방식이 수립된 것
2. 전평의 단체교섭권이 군정당국에 의하여 확인된 것
3. 이와 같은 양해에 도달된 이상 하루라도 속히 생산을 계속하는 것이 건국에 기여하는 길이라고 생각한 것
4. 금번 쟁의를 통하여 여하한 장해라도 돌파할 수 있다는 신념을 얻은 것
그러나 회사측은 전평과 노동당국간의 논의를 무시하고 복귀한 쟁의단을 계속 탄압했다. 사측은 해고자 복직을 막으려고 관제집회를 했다. 노동자들에게 ‘민주주의가 좋으냐, 공산주의가 좋으냐’라는 질문을 하여 백지날인을 받았다. 그리고 이를 해고자 복직 반대 결의라고 이용하려 하였다. 또한 공장 간부들과 경비대원으로 조직을 만들어 노동자를 협박, 구타, 폭행하기도 했다.
노동자들의 분노와 저항은 끊이지 않았다. 전평은 미군정과의 관계를 재고하기 시작했다. 미군정 노동당국이 전평의 단체대표성을 인정했지만 현장에서 벌어지는 상황은 그것이 무용지물임을 드러낸 것이다. 미군정 노동정책의 허구성을 인식하며 ‘파트너’로서의 자리를 내놓고 총파업을 준비하게 되었다.
동양방적은 1955년 민영화되어 동일방직으로 이름을 바꿨다. 그리고 박정희정권 아래서도 자주민주 노조를 지키기 위한 노동자들의 투쟁은 계속 이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