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광주지역노동조합협의회 출범
⦁ 시기 : 1989년 3월 5일
광주지역의 노동운동은 1987년 노동자대투쟁 속에서 본격적으로 성장했다. 1987년 7월 하순부터 종업원 100여 명 내외의 중소사업장인 트라이썬, 대하섬유, 광주라디에이터, 그랜드호텔, 일성섬유에서 노동자들의 투쟁이 전개됐고, 8월 들어 금호타이어, 매일유업, 대우전자, 금성알프스 등 대규모 사업체에서 임금인상투쟁과 어용노조 퇴진투쟁을 전개했다. 특히 택시노동자들의 가두시위, 시내버스 노동자들의 파업 등 운수업체의 쟁의가 투쟁의 중심을 형성했다. 그러나 대규모 사업체의 노동쟁의가 다른 지역과는 달리 가두시위보다 회사 내 농성으로 그치거나 조업과 협상을 병행하는 등의 이유로 파급력 있는 투쟁으로 발전하지는 못했다. 또한 지역적 특성 탓에 노동자대중이 국가권력의 개입에 대해서는 민감한 반응을 보이면서도 기업 차원의 노동통제와 계급대립에 대한 계급의식은 확고하지 못한 경향이 있어서 공권력 투입의 자제, 현장에서의 타협과 합의로 쟁의가 결말지어지곤 했다. 결국 1987년 투쟁을 통해 광주지역 노동운동의 과제로 제시된 것은 대규모사업장을 중심으로 기존의 어용집행부를 민주적으로 개편하는 문제, 노동자대중의 정치의식을 노동자의식 및 계급의식과 결합시키는 문제, 그리고 이러한 문제의 해결을 담보할 수 있는 조직적인 틀을 마련하는 것이었다.
이러한 과제를 풀어나가기 위한 노력은 1987년 8월 이후 신규노조 중심으로 상호 경험의 교류와 연대활동을 시작해 금속산업 7개 노조가 참여한 ‘금속 민주노조협의회’가 구성되면서부터 본격화되었다. 1987년 10월부터는 매주 1회씩 위원장들을 중심으로 지역과 각 단위 노동조합의 문제를 교류하는 회의를 운영했으며, 12월 말부터는 7개의 부서모임이 정례화됐다. 1987년 11월 22일에는 광주지역 민주노조 간부들이 야유회를 하면서 친목과 연대 의지를 다졌고, 1988년 3월 10일에는 임투 결의대회, 5월에는 체육대회, 7월에는 임금인상 투쟁 관련 조합원 교육을 연이어 진행하면서 연대사업을 안정화시켰다.
1988년 임금인상투쟁은 대하전자의 최저임금쟁취 투쟁으로 시작해서 3~4월의 세화기계, 대원시드 등 1987년에 결성된 노조와 대우캐리어, 금성알프스 등 대기업 노동자들이 동시다발적으로 전개했다. 이러한 투쟁에 힘입어 광주지역에서도 본격적인 지역 연대조직 건설 움직임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8월 13일 우리데이타의 위장폐업 철회투쟁과 건축사 사무소 직원들의 파업투쟁, 레미콘업계 노동자의 ‘한국노총 광주시협의회’ 농성투쟁, 금호타이어노조 민주화 투쟁을 거치면서 광주지역 노동자들의 단결은 한층 강화됐다.
지역조직 건설의 직접적인 계기가 된 것은 1988년 2월 ‘한국노총 광주시협’이 의무금 체납을 이유로 대우캐리어, 소화기기, 광일기공, 미도전자, 대화 등 7개 노조를 제명하면서부터다. 한국노총 광주시협의회 소속 노조들의 행태에 조합원들의 불만이 쌓여가던 터라 이들은 제명되자 오히려 더욱 적극적으로 조합원들을 대상으로 한 연대사업을 전개할 수 있었다. 이 사건을 계기로 그간 선진노동자들 사이에서는 약 1년 가까이 끌어온 “한국노총 민주화냐, 지역노조협의회 건설이냐” 하는 논쟁도 결말이 나버렸다. ‘한국노총 광주시협’과 별도로 새로운 노동자대중조직을 건설해야 한다는 데 합의가 이루어진 것이다.
그리하여 우리데이터 투쟁에서 보여준 노조 간의 단결력을 기초로 1988년 11월 20일 20여 개 노조 대표자 및 간부, 노동운동단체 실무자, 미조직 사업장 활동가 등이 참여한 가운데 ‘광주지역 노동조합 운동의 발전을 위한 토론회’를 개최했다. 여기에서 그간의 분열과 불신을 털어버리고 지역조직의 중심을 확고히 건설할 것을 결의하는 한편, 12명을 선출하여 ‘광주지역노동조합협의회 추진위원회(광노협추진위)’를 구성했다.
광노협추진위는 광노협 건설의 골격을 짜는 작업과 함께 우리데이타, 설계사무소 등 투쟁 현장을 방문해 신규노조 결성을 지원했고 노조탄압에 대한 항의방문 활동을 활발히 전개했다. 이어 1988년 12월 3일 ‘노동악법개정투쟁 광주지역 보고대회’에 대우캐리어노조, 우리데이타노조, 건축사노조 등 1,300여 명이 대거 참여함으로써 광노협추진위는 광주지역 노동운동의 구심으로 확실하게 자리 잡아갔다. 1989년 1월 ‘노동악법개정을 위한 민주당 중앙당사 농성’에는 40여 명의 광주지역 노동자가 참여하는 등 전국적 규모의 사업에도 동참하기 시작했다. 광노협추진위는 효율적인 사업 수행과 지도집행력 확대를 위해 구체적 사업과 임금인상투쟁의 전략을 수립하는 한편, 조합원과 함께 하는 광주지역노동조합협의회를 건설하기 위해 노력했다.
이어 1월에 광노협추진위를 해체하고 각 부서조직 강화를 위한 실무자와 미조직분과를 설치하는 등 조직 정비와 대외사업을 거쳐 3월 5일 광주지역노동조합협의회(광노협)로 정식 발족했다.
광노협 초대 의장은 대우캐리어노조 위원장 박종현, 부의장에는 김동남(세화산업노조 위원장), 최영만(로케트전기노조 위원장)이, 사무처장에는 김철문(세화기계노조 위원장)이 각각 선임됐다. 그밖에 집행부서는 기획위원장과 조직국장은 공석으로 두고 조직차장 조현미(한국알프스노조 조직부장), 교육선전국장 기원필(광일기공노조 위원장), 교육선전차장 백형구(세화기계노조 교선부장), 조사통계국장 이광희(미도전자노조 위원장), 조사통계차장 박민훈(대우캐리어노조 조합원), 문화복지국장 이송해(태광산업노조 위원장), 여성국장 정금천(정신전자노조 위원장), 연대사업국장 김철문 겸임, 쟁의국장 윤영대(럭키호남판매노조 위원장), 편집위원장 김종석(삼광정밀노조 위원장), 감사위원장 김홍권(동아합성노조 위원장)을 선임해 본격적인 사업을 수행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