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수(白壽)를 살다간 그를 기리며
송시우(노동자역사 한내 제주위원회 부위원장)
내가 그를 만난 건은 1990년대 초입이었을 게다. 학교를 꾸역꾸역 늦게 졸업하고 사회 운동한답시고 사무실에서 라면 끓여 먹고 있었을 때 같다. 모 후배가 조심스레 건넨 말
‘4ㆍ3항쟁 때 주역이었던 사람이 있는데, 인사 헙서.’
난 그냥 그런 사람인가 보다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다.
많은 대화는 못 했는데, 기억이 남는 것이 있다면 ‘인민’이란 말이었다. ‘민중’이란 말을 아무렇지 않게 평상 용어로 쓰던 때 ‘인민’이란 단어의 의미를 되새겨 준 사람이었다.
올 6월은 너무나 아까운 사람을 보내는 세월이다. 광대에서 ‘심방’으로 자리 잡은 정공철 선배를 보내며 충격을 주었지만, 잊어 버렸던 사람 그를 인터넷 신문 부고란에서 글을 읽으며 가슴을 먹먹하게 했던 그 사람. 해 마다 4월이면 생각 나 찾아 뵈야지 했었지만, 끝내 발걸음을 내딛지 못했던 게으름을 탓하지 못하고 그래 난 그런 놈이야 술 한 잔 걸치게끔 했던 그 사람. 만나서 물어 볼 것이 많았는데...
제주의 현대사를 백수를 통해 몸에 담고 뿜었던, 1947년 3월 1일 ‘제주도3ㆍ1사건’ 이후 조위금 모금 운동과 3ㆍ10총파업을 건의했던 장본인, 남로당 제주도위원회 대정면책 이운방. 그가 지난 6월 17일 세상과 이별을 했다. 105세란다. 특히 1946년 1월 반탁에서 찬탁으로 가는 길에서의 대중 사업과 1948년 무장봉기의 갈림길에서 지도부와의 갈등 등으로 일본으로 건너갈 수밖에 없었던 이유 등 들어야 할 이야기가 너무나 많았었는데... 해방은 우리의 것이 아니었기에 인민공화를 외칠 수밖에 없었고, 그게 ‘민주주의’가 아니었을까 생각해 본다. 항쟁의 소용돌이 중심에 있었기에 ‘남로당 지령설’을 조목조목 비판했었으며, 일제 강점기에 일본에 유학갔다가 노동운동을 하면서 세상의 흐름을 파악하며 진퇴의 때를 도모하시던 그였다.
‘김달삼과 이덕구 그들은 경솔한 사람이었어’라고 이야기할 땐 그렇게 살았으니까 그렇게 말 할 수 있지 속으로 생각했었는데, 지금 곱씹어 보면, 1948년 2월 신촌회의에서 결정된 부분 즉 무장봉기에 대해 비판적인 생각을 가졌다고 볼 수 있는데, 그럼 지도부들은 앉아서 당할 순 없지 않았기에 그들에 대해서 좌익모험주의자라고 말할 수 있는가. 그냥 의문점으로 역사에 질문을 던질 수밖에 없다.
꼿꼿하셨던 선생님, 질곡의 현대사 내려 놓으시고, 하고픈 이야기 접으시고, 평안히 영면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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