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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화 속의 노동, <구로아리랑>
첨부파일 -- 작성일 2009-09-27 조회 2086
 

<구로아리랑> 

이성철(창원대학교 사회학과 교수) 


<송어>, <우리들의 일그러진 영웅> 등을 연출한 박종원 감독의 1989년 작입니다. 문학과 지성사에서 간행된 동명의 이문열 원작(1987년)을 기초로 한 것이나, 소설과 영화의 구성은 다릅니다. 원작이1987년에 간행된 점을 감안하면, 이 소설가도 1987년의 노동자 대투쟁과 6-10항쟁으로 대변되는 거대한 민주화운동을 외면하기 힘들었나 봅니다. 그리고 1985년에는 한국노동운동사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는 구로동맹파업이 있었던 해입니다. 한국의 산업화과정과 구로공단은 밀접한 상관이 있습니다. 이 과정에 빚어지는 노동자의 피폐된 삶을 배경으로 만들어진 영화는 이장호 감독(1981)의 <그들은 태양을 쏘았다> 등을 들 수 있습니다. 실제 있었던 1973년의 구로공단 갱사건을 소재로 풀어낸 수작이지요. 구로공단은 1964년에 조성되어 봉제, 합성수지, 가발, 가전 등을 가공-조립-생산하는  수출산업 공업단지 였습니다. 지금은  벤처기업이 몰려 있는 구로디지털단지로 바뀌었습니다. 구로동 인근의 가리봉동은 이주노동자들이 밀집해 있는 곳이기도 합니다. 신경숙의 <외딴 방>, 김홍준의 <장미빛 인생> 등의 작품에 가리봉동이 등장합니다.
 

 
영화 <구로아리랑>에서 여성노동자들이 살고 있는 지역이 구로동인지, 가리봉동인지는 분명치 않으나, 이 두 지역 모두 당시 노동자들의 거주형태는 비슷합니다. 흔히 말하는 '벌집'이 그것입니다. 좁은 공간에 마치 벌들이 집을 지어둔 것처럼 다닥 다닥하게 붙여 만든 방들을 말합니다. 이들의 고단한 삶터인 셈이죠. 김선민 감독(2005)의 단편 <가리베가스>를 보면 벌집의 의미가 무엇인지 충분히 짐작할 수 있습니다. 각설하고...
 
영화(또는 소설)의 제목이 왜 <구로아리랑>일까, 잠시 생각해보았습니다. 영화 속의 야학강습 중에 김소월의 시 <진달래꽃>을 두고, 이 시는 민중의 힘과 아리랑의 이상을 가장 잘 보여주는 것이라고 얘기하는 장면이 나옵니다. 아리랑에 우리 민중의 보편적 정서인 '한'이 배어 있고, 이를 극복하려는 의지가 내장되어 있기 때문에 이러한 제목을 이문열이 붙인 게 아닌가 생각해보았습니다. 그러나 구로의 아리랑은 좀 더 솔직하게 표현되어야하지 않았을까요?  즉 '한'이라는보편적인 정서로 두리뭉실하게 포장하기 보다는 80년대 아리랑의 특수성이 강조되어야 하지 않았을까요? 보편과 특수는 큰 개념과 작은 개념이 아니지 않습니까? 이문열의 현란함이 짐작되는 수사라 할 수 있겠습니다. 또 각설하고...
 
이 영화의 시공간적 배경은 88올림픽이 끝난 1988년 겨울, (주)아세아패션의 공장입니다. 봉제공장인 것이죠. 봉제공장의 노동과정은 재단사-미싱사-보조-시다 등으로 구성되는 일종의 일괄공정(batch-production system)입니다(장선우 감독의 <우묵배미의 사랑>에서도 볼 수 있죠). 그래서 한 사람이라도 낙오하거나 조퇴하거나, 결근을 하게되면 공정에 큰 지장을 주게되는 것이죠. 영화에서도 이러한 장면이 자주 보입니다. 화장실 통제, 잔업과 철야의 연속, 조퇴 금지 등이 그것이지요. 수출 일감이 밀려 1주 90시간의 노동에 시달리는 노동자들(특히 여성)은 '타이밍'이라는 카페인 성분의 각성제를 달고 삽니다. 이 당시 타이밍은 노동자 스스로 사먹는 경우가 많았으나, 영화에서는 반장이 지니고 다니면서 직접 주기도 합니다(참고로 타이밍은 김민기의 <공장의 불빛>중 "서방님의 손가락은 여섯개래요..."로 시작되는 '야근'이라는 노래에 나오기도 합니다). 봉제공장 노동자들의 소박한 꿈은, 현업 전공(?)을 살려 남성노동자들의 경우 디자이너로, 여성노동자의 경우는 양품점 경영 등이었습니다(하와이 대학 구해근 교수의 어느 논문에서도 이를 실증적으로 밝히고 있는 것을 본 적이 있습니다). 그러나 대부분 이러한 꿈은 물거품이 되고 말았지요. 영화에서 여성노동자들이 현실적으로 갈 수밖에 없는 길은 공장 인근 포장마차 경영, 이태원 여급으로의 전직, 부티나는 대학생 꼬시기 등으로 묘사되고 있습니다. 이중에서도 특히 여급으로의 전직과 대학생 꼬시기 등은 당시 여성노동자들의 전반적인 특성도 아니었고 일반화 할 수 있는 것도 아닙니다. 자칫 이들을 폄하할 수 있고, 당시 여성노동자들의 운동을 외면하게 만드는 묘사라 할 수 있습니다(참고로 70-80년대 노동자들의 생활상태를 이런 식으로 접근하는 글들도 더러 있습니다. 출처는 밝히지 않겠습니다).  


 
주요 등장인물은 김종미(옥소리)-이현식(이경영)- 강진석(최민식) 등입니다. 옥소리와 신은경은 영화 데뷔작품이라네요. 잠깐 사족입니다만 영화 내내 가장 자연스런 연기를 펼친 배우는 정작 주연들이 아니라(최민식 제외), 1반장으로 나오는 이기열, 종미의 친구 경미로 나오는 윤예령씨 였습니다. 이들의 이력은 인터넷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연기와 화장, 그리고 발성 등에서 가장 악질스러웠고 가장 노동자다웠습니다.  영화의 내용은 자세히 쓰지 않겠습니다. 현장의 여러 부당노동행위와 산재 은폐 등이 겹치면서 급기야 노조설립 움직임과 연좌농성이 펼쳐지게 됩니다. 종내는 경미의 죽음으로 잠깐의 우왕좌왕에서 벗어나 노동자들의 결연한 단결이 이루어집니다. 경미의 노제를 막으려는 사측과 경찰들, 이를 돌파하려는 노동자들의 울부짖음.  "노동자도 인간이다. 인간답게 대우해라".... 실제 1987년의 노동쟁의 유인물을 분석한 어느 논문에 따르면 이 당시 노동자들의 주된 요구는 경제적 조건의 개선 못지않게 인간적 대우를 가장 우선적으로 요구했던 것으로 나와있기도 합니다.
 

 
그러나 전경의 철통같은 방어 속에 경미의 노제는 무산되고, 시신만을 실은 영구차가 저 멀리 떠나고 맙니다. 이 라스트 씬은 안타깝기 그지 없습니다. 점묘화를 상상해봅시다. 낱낱의 점들이 훌륭한 한 폭의 그림을 만들지 않습니까? 영화 내내 점들만 찍고 있는 것을, "그래도 좋은 그림이 곧 되겠지" 하면서 보고 있다가 그만 맥이 빠지고 말았습니다. 영화를 선전하는 광고 문구에는 "이 영화의 결말은 결코 좌절도 영원한 슬픔도 아닙니다"라고 강조하고 있지만 말입니다. 그래도 이 시기 대단한 용기를 갖고 만든 영화임에는 틀림없겠죠? 검열로 20여군데나 잘려나갔다니 말이죠. 한편 잘려나가지 않았다하더라도 무슨 암호처럼 만들어둔 곳도 있습니다.
 
예컨대 현식(나중 밝혀지지만 현식은 가명이고 본명은 박지호인 학출 위장취업자임)의 방을 방문하게된 종미는 현식 방에서 박노해의 시집을 보게 되고, 이 중에서 <손무덤>이라는 시를 읽게됩니다. 그러나 시의 앞뒤 구절만 잠깐 언급되고 나머지는 배경음악이 덮어버리는 등.... 그러나 감독은 중요한 장치를 몇 군데 해두고 있습니다. 오윤의 판화 그림이 방 벽에 걸려 있는 등... 그리고 이 영화에는 노동가요가 두곡 정도 소개되는데, '솔아 솔아 푸르른 솔아'와, 햇불(!)농성 중 숙희(신은경)가 선창하는 '동지가'가 그것입니다. 그러나 숙희의 동지가는 어쩐지 절박하지도, 결연하지도 않고 겉도는 느낌만이 강합니다. <파업전야>의 라스트 씬과 비교하면 너무 큰 차이라 할 수 있습니다. 여성노동자들의 고단한 삶을 날줄로, 노동운동의 태동을 씨줄로 교직하여 의미심장한 길쌈을 하려고 하였으나....많은 것을 생각케 하네요... 오늘은 이만... 근데 위의 포스터는 왜 저 모양이지?
 
* 박노해의 <손무덤>을 소개합니다. 음악으로도 나와 있네요.
 
 
올 어린이날만은
 안 사람과 아들놈 손목 잡고
 어린이 대공원에라도 가야겠다며
 은하수를 빨며 웃던 정형의
 손목이 날아갔다
 
 작업복을 입었다고
 사장님 그라나다 승용차도
 공장장님 로얄살롱도
 부장님 스텔라도 태워 주지 않아
 한참 피를 흘린 후에
 타이탄 짐칸에 앉아 병원을 갔다
 
 기계사이에 끼어 아직 팔딱거리는 손을
 기름먹은 장갑속에서 꺼내어
 36년 한많은 노동자의 손을 보며 말을 잊는다
 
 비닐봉지에 싼 손을 품에 넣고
 봉천동 산동네 정형 집을 찾아
 서글한 눈매의 그의 아내와 초롱한 아들놈을 보며
 차마 손만은 꺼내 주질 못하였다
 훤한 대낮에 산동네 구멍가게 주저 앉아 쇠주병을 비우고
 정형이 부탁한 산재관계 책을 찾아
 종로의 크다는 책방을 둘러봐도
 엠병할, 산데미 같은 책들 중에
 노동자가 읽을 책은 두 눈 까뒤집어도 없고
 
 화창한 봄날 오후의 종로거리엔
 세련된 남녀들이 화사한 봄빛으로 흘러가고
 영화에서 본 미국상가처럼
 외국상표 찍힌 왼갖 좋은 것들이 휘황하여
 작업화 신은 내가
 마치 탈출한 죄수처럼 쫄드만
 고층 사우나빌딩 앞에 자가용이 즐비하고
 고급 요정 살롱 앞에도 승용차가 가득하고
 거대한 백화점이 넘쳐 흐르고
 프로야구장엔 함성이 일고
 노동자들이 칼처럼 곤두세워 좆빠져라 일할 시간에
 느긋하게 즐기는 년놈들이 왜 이리 많은지
 ㅡ 원하는 것은 무엇이든 얻을 수 있고
 바라는 것은 무엇이든 일루 수 있는 ㅡ
 선진조국의 종로거리를
 나는 ET가 되어
 얼마간 미친 놈처럼 헤매다가
 일당 4,800원짜리 노동자로 돌아와
 연장노동 도장을 찍는다
 
 내 품 속의 정형 손은
 싸늘히 식어 푸르뎅뎅하고
 우리는 손을 소주에 씻어 들고
 양지바른 공장 담벼락 밑에 묻는다
 노동자의 피땀 위에서
 번영의 조국을 향락하는 누런 착취의 손들을
 묻는다
 프레스로 싹둑싹둑 짓짤라
 원한의 눈물로 묻는다
 일하는 손들이
 기쁨의 손짓으로 살아날 때까지
 묻고 또 묻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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