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뉴스레터
..... 회원 마당
..... N라면 노동자의 기억 (12)
첨부파일 -- 작성일 2021-12-17 조회 256
 

N라면   노동자 의 기억 (12)

 

*

 

198910, 부산공장 유세에서 박봉산 후보는 5월 파업 당시 회사 측이 노조 간부 3인을 45천만 원에 매수하려 했던 사실을 폭로했다. 박봉산 후보는 전 위원장인 김준태의 측근으로 자신의 명예회복을 위해 출마시킨 사람이었다. 공금횡령으로 실형을 선고받아 내쫓기다시피 퇴사를 하다 보니 그동안 밀실야합을 일삼으며 서로 돕고 지낸 회사 측의 토사구팽에 분기탱천하는 위인이었다.

그 해 5월 파업이 시작된 지 10여일 후 김준태와 안성 부산지부장 등 노조 측 대표 3인이 회사 측의 인사부장과 노무담당이사를 만나 회사 측의 임금인상률을 1% 낮춰 주는 조건으로 8억을 요구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다음날 생산본부장과 인사부장이 있는 자리에서 45천만 원으로 조정되었다고 했다. 당시 위원장은 전액 현금으로 지급해줄 것을 요구했고 회사 측 역시 그렇게 약속했으나 뒤늦게 전액 현금이 불가능함을 통보했다고 했다. 그래 이상한 낌새를 눈치 챈 위원장이 돈을 받기로 한 안양시내 호텔에 나가지 않고 근처의 주마등다방으로 피해 45천 수수가 수포로 돌아간 사건이었다.

이 사건을 박봉산후보가 전 위원장의 고향이자 표밭인 부산공장에서 폭로를 한 것이다. 나와 민주진영에서는 유세와 징소리를 통해 회사와 전 위원장에게 공개사과와 관련자 처벌을 요구하는 한편 공개적 민주적 조합운영과 임금과 단체협약 최종안의 조합원 찬반투표만이 이러한 뒷거래를 없앨 수 있는 유일한 방법임을 신나게 강조하고 다녔다.

45천 미수사건은 19895월 파업 기간 중 파업지도부의 4인이 회사 측으로부터 120만원을 받아 나누어 가졌다는 얘기와 함께 파업 후 간간이 소문이 돌던 얘기였다. 그 소문이 공식적으로 확인된 셈이었다. 전 위원장의 분신인 박봉산후보 뿐 아니라 주 당사자인 전위원장의 입을 통해 확인된 셈이었다. 전 위원장인 김준태가 무슨 무용담이나 되는 듯이 떠벌이고 다녔기 때문이었다. 그 돈으로 자신은 제법 큰 슈퍼를, 안성지부장은 젖소농장을, 부산지부장은 사슴농장의 꿈에 부풀어 있었다는 얘기까지 생생하게 털어놨던 것이다.

아무튼 이 사건은 선거 막바지 쟁점으로 떠올랐고 남아있는 두 지부장과 회사 측을 곤경에 빠뜨렸다. 모두 한결같이 사실이 아니라고 발뺌을 하지만 내심 당황해하며 해명하기에 급급한 그들의 모습은 어쩐지 측은하기까지 했던 것이다. 당시 박봉산후보가 이 문제로 인해 회사 측으로부터 계속 회유와 압력을 받으며 그의 아내가 그의 소재를 몰라 여기저기로 전화를 걸며 불안해했던 것은 알만한 조합원들은 다 아는 일이었다.

부산공장의 유세가 있고 난 다음날부터 각 공장은 공장장이나 부장들의 조회가 일제히 시작되었다. 공장장이나 각부서의 부장들이 전 노동자들이나 자기 부서원들을 강당에 집합시켜 훈시를 하는 거였다. 지금까지는 보다 많은 생산을 위한 생산성향상이나 아니면 임금이나 상여금 협상시기 회사 측의 갑작스런 영업부진을 설명하는 자리였다. 노동조합과 회사 측의 무성의한 협상태도를 비난하는 민주파 조합원들을 비방 매도하는 것 역시 마찬가지였다.

그러나 이날의 조회는 다른 때와는 다른 내용이었다. 6명의 위원장 후보 중 민주후보인 나와 전 위원장인 김준태의 명예회복을 위해 출마한 박봉산 후보를 성토하는 게 주요 내용이었다. 박봉산후보가 위원장에 당선될 욕심으로 부산유세에서 허위사실을 왜곡 날조하였고, 한경택 후보 역시 이를 이용해 조합원들을 선동했다는 내용이었다. 노무담당이사인 이부식이사가 박봉산 후보에게 사과를 요구하며 명예훼손으로 고발하고 처벌하겠다는 협박 소문이 공공연하게 나돌기도 했다. 1차 투표일을 4일 앞둔 시점이었다.

 

*

5명이 나선 1차 투표에서 민주후보인 내가 812, 본사 감사실 부장의 손아래 동서이며 회사 측의 지원을 받는 유완영후보가 719표를 얻어 2명이 2차 결선투표에서 과반수 득표를 위해 대결하게 되었다. 고향이 경남인 점을 이용해 부산의 고정표를 보고 나온 전 위원장 측의 박봉산후보는 333, 반장으로서 선거 때마다 나오지만 기회주의적이고 권위적인 행태로 인해 큰 호응을 못 얻고 있는 홍선재후보도 321표에 불과했다. 의외의 결과였다.

샛길을 버리고 정도를 걷다보니 나온 당연한 귀결인지도 몰랐다. 조직도 자금도 절대적으로 취약하고 온갖 흑색선전과 선거운동 방해에도 불구하고 의외의 결과가 나오자 민주후보 측은 축제 분위기였다. 5명이 겨룬 1차 투표에서 1위를 했다면 2명이 겨루는 2차 투표에서도 유리할 터이기 때문이었다. 나머지 후보들의 표를 절반씩만 나누어가져도 승산이 있기 때문이었다. 모두들 주먹을 불끈 쥐며 자신감에 차 있었고 민주노조의 서막이 오른 듯 한 분위기였다.

특히 일반 조합원들은 민주노조의 선거운동원들을 껴안고 축하의 인사를 하는 사람들도 있을 정도였다. 관리자들의 노골적인 지지를 받고 있고 회사 측 간부와 인척 관계이며 평소 거만하기로 소문난 유완영후보가 2위로 밀린 것을 통쾌해하는 분위기이기 때문이었다. 아무튼 1987년 보궐선거 때의 동지가 이제는 적이 되어 싸우게 된 것이다. 1987년 보궐선거 때는 여장부인 성정숙을 민주후보로 네세웠다 막판에 반장출신 수구꼴통 후보가 당선될 가능성이 짙어 차선책으로 유완영후보와 단일화를 했던 터였다.

1차 투표 결과가 나오자 이완준 등 유완영후보 측 참모들은 그날 밤으로 사거리의 박봉산후보 집으로 쳐들어갔다. 새벽 2시였다. 2차 선거의 승리를 위해서는 타 후보의 지원이 절대적이기 때문이었다. 자다 놀랜 박후보의 부인이 사거리의 술집으로 찾아왔으나 박봉산후보는 대꾸도 없었다. 박봉산후보는 홍선재후보 측과 함께 패배의 쓰라린 술잔을 나누며 향후 대책을 세우고 있는 중이었다. 또 유완영후보 측으로 갈 기분도 아니었다.

위원장에 등을 돌린 소비조합장을 사주해 고발하고 전위원장을 물러나게 한 장본인이 유완영후보였기 때문에 그와는 전 위원장 못지않게 감정의 골이 깊은 상태였다. 또한 회사 측 관리자들의 유완영후보에 대한 노골적인 지원과 유완영후보 측의 비열한 수법에 환멸을 느껴 민주후보인 나와 박봉산, 홍선재 등 세 후보는 누가 2차 투표에 올라가든 연대해 유완영후보를 낙선시키기로 수차에 걸쳐 다짐하고 약속하였던 것이다.

박봉산후보는 요지부동이었다. 전 위원장인 김준태는 죽어도 유완영에게 붙지는 않을 것임을 공표하고 다녔다. 그런 만큼 유완영후보 측의 집념도 무서웠다. 수일간을 박후보의 집에서 진을 치며 살다시피 했다. 전위원장의 고향 선후배들이 상당수 있고 또 몇 개의 친목계도 있어 전위원장의 확실한 표밭인 부산의 표가 향방을 좌우할 것이기 때문이었다. 그러다보니 스스로 사표를 쓰고나간 전위원장을 원직복직 시킬 것이며, 만일 그게 안 된다면 4천만 원을 일시에 지급함과 동시에 복직 때까지 월 120만원씩 지급하겠다는 약속까지 했던 것이다. 그 근거로 유완영후보의 집문서를 저당 잡히겠다는 얘기였다. 그러나 박후보 측은 고개를 저었다. 그들과 손을 잡기에는 감정의 골이 너무나 깊었던 것이다.

그럼에도 유완영후보 측의 선거대책본부인 구사거리 남서울장 여관은 박후보와 홍선재 후보를 잡기위한 작업으로 연일 분주했다. 회사 측은 회사 측대로 45천만 원 폭로 건을 이유로 박후보에 대한 처벌과 해고를 암시하며 압박을 가했다. 그런 한편으론 민주후보가 위원장에 당선될 경우 해고자 복직과 조합원 찬반투표를 빌미로 연일 파업을 할 것이고, 결국 회사는 문을 닫게 될 것이라는 흑색선전을 관리자들과 반장 등을 통해 퍼뜨리기 바빴다.

유완영 후보 측이 1차 선거에서의 낙선 후보들을 잡기위해 혈안이 되어있는 사이 민주후보측은 조속한 2차 투표의 실시와 1차 선거 때의 3인의 연대약속을 실현시키는데 힘을 쏟았다. 이외에도 부산공장의 투표함을 비행기의 화물칸에 싣고 올게 아니라 공장별 개표나 승용차를 이용한 운송도 재차 요구했다.

그러나 선거관리위원회와 어용후보인 유완영은 결사반대였다. 선거관리위원회 역시 양측의 합의가 없는 한 어느 한쪽만의 의사를 들어줄 수 없다며 사실상 유완영후보 측의 의견에 동조를 하고 있었다. 10키로 이하는 비행기 화물칸에 싣지 않고 갖고 탈수 있고, 조금 넘는다 해도 승무원의 양해를 구해 들고 탈것도 제시했으나 그것도 안 된다는 거였다. 죽어도 비행기 화물칸에 싣고 와야 한다는 거였다.

민주노조를 방해하고 빨갱이 취급하는 세력이 기업주 외에도 사회의 도처에 있고 이들이 서로 은밀하게 협력해 수단방법을 가리지 않고 민주노조 파괴공작을 자행하고 있는 것은 민주세력들에겐 공공연한 비밀이었다. 버젓이 대공과 형사가 해고자를 비롯한 민주세력들을 미행하는 것만 봐도 명약관화한 일이었다. 이런 의구심은 유완영 후보 측의 몇몇 운동원들의 입을 통해서도 감지된 일이었다. 부산공장에서 100% 지지를 받아도 민주노조는 안되게 되어있다며, N라면은 회사에서 반대하는 노조 위원장이 당선될 수가 없다며, 그러면 손에 장을 지진다며 확신에 찬 표정으로 장담을 하고 다녔던 것이다.

그런 가운데 약속과는 달리 홍선재 후보와 박봉산 후보 측과의 3인 연대 약속은 지지부진했다. 유완영 후보 측에서 4천만 원을 준다느니, 복직 때까지 120만원씩 준다느니, 집문서까지 맡긴다고 했다느니 하며 중언부언 거렸다. 박봉산 후보는 가족들까지 행방을 알지 못해 아예 만날 수도 없었고, 홍선재 후보는 안정 속의 개혁을 추구하는 자신들과 급진세력인 민주파와는 노선이 다르다며 노골적으로 연합을 거부했다. 민주파의 지지 세력이 주로 여성 조합원과 젊은 남자들인 반면 홍선재는 주로 40대의 중년 남자들의 지지를 받고 있기 때문이었다.

특히 홍선재의 표밭인 안양공장 스낵1과의 2,3층 기계실은 극우적인 보수 집단으로 나와 단 10분이라도 대화를 해본 사람이 한명도 없는 불모지대였다. 민주세력을 과격 불순세력으로 확신하는 이들 보수층의 남자들과 연결 끈도 없고, 그러다보니 진지한 대화의 기회가 없었던 탓이었다. 그래 만나 이야기를 하면 민주노조에 대한 오해를 불식시킬 자신이 있음을 확언하며 그들과의 대화의 자리라도 주선해줄 것을 몇 차례 요청했던 터였다. 그러자 홍선재는 단 한차례 그것도 50대의 남자들만을 60여명 공청회장에 보내준 것으로 연대의 약속을 마무리 지었던 것이다. 이런 사람들에게 노조집행부 구성을 같이해 노동조합다운 노동조합을 만들어 보자는 얘기는 애당초 씨가 먹히지 않는 말이었다.

이런 가운데 회사 측과 노조집행부에 가까운 조합원들로 구성된 선거관리위원회에서는 회사 측 간부들의 교육과 선거관리 위원회 일부 위원들의 개인적인 집안일 등을 이유로 2차 결선 투표일을 차일피일 미루고 있었다. 유완영 후보 측의 조직 정비와 2차 선거의 전략 등을 마무리할 때까지 가급적 선거를 늦추려는 것이 분명했다.

한편 전 위원장인 김준태는 집으로 뻔질나게 전화를 했다. 12시고 새벽 5시를 가리지 않고 전화를 해 만나자는 거였다. 내가 의례적인 말투로 도와달라는 말만 할뿐 별로 적극성을 보이지 않고, 심지어는 친절하게 그의 집 전화번호까지 일러줘도 전화 한번 없자 집 근처에서 내가 퇴근할 때까지 기다려 전화를 했던 것이다. 위원장이 되기 전부터 회사에서 자타가 공인하는 노름꾼인데다 돈이 되는 일이면 물불을 가리지 않고 덤벼드는 수전노이기 때문에 만나는 것 자체가 득 될게 없는 인간이었다.

유완영 후보 측과 만나는 것이 수차 조합원들의 눈에 띄었고 유완영 후보 측으로부터 3천만 원을 받고 그를 밀기로 했다는 소문이 벌써부터 현장에 나도는 터였다. 그간의 그의 행실로 보아 충분히 그러고도 남을 위인이었다. 이래저래 그와의 만남을 기피하고 있었으나 내 집 앞까지 와 몇 시간이고 내가 오기를 기다리던 사람의 전화를 직접 받고 보니 만남을 거절할 수가 없었다.

김준태는 내가 방심하면 큰일 난다며 겁을 준 후 유완영 후보 측의 획기적인 제안을 재차 주지시켰고, 이어 유완영 후보를 침을 튀기며 매도했다. 절대 유완영 후보에겐 안가겠지만 만일 한형이 끝내 외면한다면 자신도 먹고 살아야겠기에 어쩔 수 없다는 얘기도 덧붙였다.

 

"한번 믿고 도와줘. 위원장 되고나면 꼭 보답할 테니까."

“......”

"무엇이건 결과 못지않게 방법과 과정이 올바른 방법이어야 해. 그렇지 못하면 꼭 뒤탈이 나게 돼있어. 특히 돈을 많이 쓰면 본전 생각이 나서 일을 제대로 할 수가 없어. 화사의 유혹에도 견디기가 어려울 테고, 또 노조비에서 어떻게 해서든지 보충을 하게 돼있어. 솔직히 내 월급에서 적금 들어 갚을 수는 없어. 회사에서도 그런 약점을 알면 어용파들을 동원해 그냥 두지 않아. 너도 잘 알잖아?"

“......”

"어떻게 해서든지 보답을 할 테니까 날 믿고 도와줘. 마지막으로 부탁 한다. ?"

 

내가 할 말은 이런 정도였다. 그 외에도 인간적으로 진지하게 많은 얘기를 했지만 그는 들리지가 않는 모양이었다. 민주노조니 인생이니 가치니 하는 말들은 한낱 사치에 불과했고, 그에겐 오로지 돈이 전부였고 최고의 가치였다. 답답했던지 김준태가 최소한 유완영후보 측의 조건을 들어준다면 적극 돕겠다는 말을 했다. 소문대로 3천만 원의 일시 지급과 월 120만원의 월급, 그리고 약속을 파기할 경우를 대비해 집문서를 저당 잡히라는 얘기였다. 그나마 스스로 사표를 쓰고 나갔는데 원직 복직이 어떻게 가능하냐는 내 얘기에 원직복직 문제는 양보를 한 터였다. 나는 앞의 말만을 되뇌며 차라리 그가 어서 자리를 뜨기를 바라고 있었다. 나의 반응이 시원치 않자 48시간 내에 연락이 없으면 유완영후보를 밀수 밖에 없다는 최후통첩을 남긴 채 김준태는 도망치듯 술집을 빠져나갔다.

조합원들에게 가끔 듣는 얘기지만 내가 생각해도 나는 너무 권력욕이 없었고, 정치적인 감각이 뒤떨어져 있었다. 나중에야 어떻게 되든 우선 선거에서 이겨야 민주노조도 할 수 있고, 선거에서 이기려면 그의 부산표가 절대 필요하고, 따라서 나중에야 어떻게 되든 우선 그를 잡고 봐야 한다는 얘기를 수도 없이 들어온 터였다. 우선 그의 요구조건을 들어주고 나중에 적당히 하는 방법도 있잖냐는 얘기였다. 그러나 나는 진실을 믿고 싶었고 고지식하지만 정도를 걷고 싶었다. 과거도 현재도 또 앞으로도 계속 그렇게 걷고 싶었다. 그게 어쩐지 제일 마음이 편하기 때문이었다.

계산을 치르고 술집을 나서며 나는 허공을 향해 연달아 헛웃음을 날렸다. 별들이 총총한 가을밤의 하늘을 향해 욕지거리를 퍼부어댔다. 그러면서도 그가 설정한 최후통첩 시간인 48시간이 언뜻언뜻 떠올랐다. 그의 호언대로 김준태는 2일 후 유완영 후보에게 8백만 원을 받고 부산공장에서 그의 선거운동을 도와주었고, 이 사실은 선거가 끝난 후 김준태가 내게 사과를 하며 고백한 일이었다.

 

*

 

2차 투표일을 6일 앞두고 있는 1989115일 이었다. 오전 11시경, 박봉산 후보가 다급한 목소리로 전화를 했다. 전 위원장의 측근으로 위원장 선거에 출마했다 2차 결선투표가 좌절된 후보였다. 자초지종도 없이 큰일 났다며 빨리 내려오라는 거였다. 몇 마디 거푸 물어보았지만 와서 얘기하자며 전화를 끊었다. 무슨 변고가 있는 모양이었다. 그와는 7-8일 연락이 두절된 상태였다.

허겁지겁 안양 호계동 그의 집으로 가보니 그는 잠옷차림으로 방바닥에 엎드려 편지지에 무언가를 쓰고 있었다.

"왜 그래요?"

"큰일 났어! 내가 큰 실수를 했어!"

박봉산이 볼펜을 놓고 앉으며 계면쩍어했다. 작고 야무진 체구인 그는 심한 자책감에 빠진듯했다. 50세로 나보다 13세 연상이었다.

"이거 어떡하지? 양주 몇 잔에 내가 돌았나봐!"

박봉산은 계속 혼자소리로 중얼거렸다. 박봉산이 편지지 앞뒤로 가득 쓴 것은 호소문이었다. 안양공장 공장장인 강희유부장이 자신을 불러내 차에 태운 후 과천의 동원가든으로 가 미리 기다리고 있던 본사 인사부장인 신재억 이사 등과 저녁식사를 했다는 거였다. 그리고는 전화국 옆 하이페츠 카페로 가 양주를 마신 후 그들의 협박에 의해 마지못해 사과문을 쓰게 됐다는 양심선언문이었다. 부산공장 유세에서 폭로했던 45천만 원 매수미수 얘기는 사실이 아니며 민주후보인 한경택의 사주로 왜곡 조작된 것이라는 내용이었다. 박봉산은 선거에 영향을 미칠 것을 우려해 선거이후 쓸 것을 고집했다고 했다. 그러나 인사부장인 신재억 이사는 45천 밀약설은 모두 사실이나 이 폭로 발언이 4번인 유완영 후보에게는 불리하고 5번인 한경택 후보에게는 유리하게 작용한다며 당장 쓸 것을 강요해 썼다는 거였다. 어이가 없는 일이었다.

"부장과 과장이 허구한 날 집으로 찾아오고 전화를 해도 안 갔어. 그랬더니 야간 일을 하고 집에 와 잠을 자고 있는데 생산부장이 무작정 들어와 잡아끌더라고. 몇 차례 거부했지만 어쩔 수 없더라고."

"...... "

"양주에 취했나봐. 카페에 들어가 양주를 마신 생각은 나는데 그 다음부터는 일체 생각이 안나는거야. 사과문을 쓴 생각만 어렴풋이 나는 거야."

통분해하며, 때로는 죄책감에 나의 시선을 애써 피하며 그는 자신의 어리석음을 자탄하고 있었다. 몇 마디 궁금한 점을 물어보았지만 그의 답변은 너무나 분명했고 확신에 차 있었다. 끝으로 날짜와 본인의 이름을 적은 후 그가 호소문을 내게 내밀었다.

 

"당장 조합원들에게 알립시다."

 

그도 쾌히 응낙했다. 회사 측에서 그의 사과문을 배포하기 전 조합원들에게 진실을 알려야 하기 때문이었다. 이 호소문은 8일 안양공장에 배포되었고, 부산공장은 박봉산이 그날 밤 내려가 연고를 이용해 배포하기로 했다.

그러나 박봉산은 장담했던 부산공장의 호소문 배포는커녕 그 후 행방이 묘연해 연락이 두절되었고, 부산공장은 뒤늦게 우리 측 참모들이 배포했던 것이다. 그리고 2차 투표일 2일전인 10일 안양과 부산, 안성 등 3개 공장에는 박봉산후보 명의의 또 다른 해명서가 거의 동시에 작업현장에 대량 배포되었다. 대부분이 유완영후보 측 운동원들이었으나 더러는 야근 때 야식시간을 이용해 텅 빈 현장에서 회사 측 관리자들이 도둑고양이처럼 다니며 배포하기도 했다. 야식을 포기하고 구석에 박스를 깔고 잠을 청하던 조합원들의 눈에 딱 걸렸던 것이다. 수년간 하루 두 세끼씩 먹어온 라면과 매주 바뀌는 근무시간과 식사시간으로 인한 소화불량증 환자들이었다.

박봉산 자신이 자필로 써 자신의 이름으로 배포했던 며칠 전의 호소문은 사실이 아니며 민주후보인 한경택후보가 자신의 동의도 없이 인쇄 배포했다는 내용이었다. 내게 1.000부의 마스터비용으로 25천원을 받아들고 자신이 직접 인쇄소에 맡기고 찾아다 줬으면서도 그게 아니라는 거였다. 회사 측의 어지간한 회유와 압력이 없고서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일이었다.

이후 박봉산은 선거가 끝나자 라면1과 포장실의 쓰레기를 처리하는 말단 잡부에서 일약 반장으로 승진했던 것이다. 내게 형님뻘임에도 나를 만나면 내가 무안할 정도로 깍듯이 인사를 하며 지나쳤다. 몇몇 조합원들이 양주와 반장이 그렇게 좋으냐며 힐난을 하면 한경택에게는 미안하다는 말 외엔 할 말이 없다며 못난 자신이 죄스러울 뿐이라는 한탄인지 변명인지 모를 말만 중언부언했다. 보기에도 딱하고 안쓰러운 반장님이었다

 
 
 
 
 
목록
 
이전글 한내를 기록하다(9) 자료 수집과 정리_정경원
다음글 양규헌의 ‘내가 살아온 길’ ⑬ 업무조사 빙자한 전노협 탄압
 
10254 경기도 고양시 일산동구 공릉천로493번길 61 가동(설문동 327-4번지)TEL.031-976-9744 / FAX.031-976-9743 hannae2007@hanmail.net
63206 제주특별자치도 제주시 중앙로 250 견우빌딩 6층 제주위원회TEL.064-803-0071 / FAX.064-803-0073 hannaecheju@hanmail.net
(이도2동 1187-1 견우빌딩 6층)   사업자번호 107-82-13286 대표자 양규헌 COPYRIGHT © 노동자역사 한내 2019. ALL RIGHTS RESERV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