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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남방적과 예덕실업고 임금인상 투쟁
⦁ 시기 : 1987년 8월 12일 ~ 1988년 3월 24일
1987년 8월 12일 오후 2시, 충남방적 대전공장 노동자 4,500여 명 전원은 작업교대 시간에 맞춘 호각소리를 신호로 일시에 사내 운동장에 모여 △어용노조 퇴진 △임금 40% 인상 △준사원제 폐지 △상여금 600% 지급 등 16개의 요구사항을 외치며 현수막을 앞세우고 농성에 돌입했다. 대전지역 최대공장이자 한국 제1의 방적업체인 충남방적 노동자들의 투쟁은 (주)한우 노동자들의 투쟁과 함께 대전지역 제조업 노동자들의 투쟁에 본격적으로 불을 댕겼다.
충남방적은 90% 이상이 여성노동자고, 산업체 부설학교를 설치해 나이 어린 여성까지도 1일 3교대, 30일 근무로 혹사시키면서 일당은 고작 2,300~2,400원을 지급하고 있었다. 게다가 이 회사는 악명 높은 ‘준사원제’를 두어 부설학교 학생은 물론 대부분의 노동자를 준사원으로 묶어놓고 이들에게 고정월급이 아닌 일당 계산, 상여금과 퇴직금 차등 지급을 실시하면서 7~8년이 지나도 전혀 임금인상을 하지 않고 있었다. 또한 산업체 부설학교 수업도 잔업을 이유로 빼먹기 일쑤며, 1일 8시간 외에 출퇴근을 전후해 1시간씩 1일 2시간의 시간외 노동을 강요했다.
회장 이종성은 나이 어린 여성노동자들의 노동력을 갈취해 모은 재산으로 11대 국회의원에 출마까지 한 철면피였다. 노동자들이 파업과 동시에 농성에 돌입하자 뒤늦게 현장에 나타난 회장 이종성은 변명만 늘어놓다가 이에 분노한 노동자들이 “이종성을 몰아내자”며 단상으로 몰려들자 뒷문으로 도망치기도 했다. 분노한 4,500여 명의 노동자들은 회사 정문과 기숙사 사이를 오가며 8월 18일까지 철야농성을 계속했다. 이러한 노동자들의 투쟁으로 △임금 15% 인상 △상여금 500% 지급 △준사원 호봉제 실시 등의 성과를 쟁취했고, 어용노조 민주화는 9월에 새 위원장을 직선으로 선출하기로 하며 잠정타결을 지었다.
한편 충남방적의 이러한 투쟁은 1988년 충남방적 부설 예덕실업고등학교 학생들의 투쟁으로 이어졌다. 예덕실업고는 낮에는 일하고 밤에는 공부하는 그야말로 ‘주경야독’의 산업체 부설학교였다. 어린 노동자들에게 학교에서 퇴학당하면 해당 기업에서 해고해 옴짝달싹할 수 없도록 무조건 복종을 강요하는 지옥과 같은 곳이기도 했다. 이러한 조건을 악용해 회사 관리자들은 어린 여학생들을 공공연하게 불러내 자신들의 성욕을 채우는 일이 비일비재했다.
1988년 2월 12일 오후 6시, 관리자 현창섭(코연조 계장), 이형호(로라실 계장), 정모(주전반 담임)등 3명이 여성노동자 4명을 불러내 봉고차에 태워 여관으로 납치해 성폭행했다. 이러한 사실은 납치당했던 노동자 중 한 명이 도망쳐 나와 회사측에 항의하면서 알려졌다. 그러나 회사측은 쉬쉬하며 현창섭을 해고하고, 이 사실을 알렸던 노동자도 해고하여 사건을 은폐했다. 이러한 천인공노할 만행은 회사 내에서도 일어나고 있었다. 양호시설이 없는 곳에서 여성노동자들이 쉴 곳이라고는 밀폐된 ‘소면부전실’밖에 없다는 점을 악용해 아파서 쉬고 있는 어린 노동자들을 관리자들이 수시로 성폭행해왔다.
어린 여성노동자들이 짐승같이 취급됐지만 학교 교사들을 비롯해 그 누구도 이들을 위해 용기 있게 싸우기는커녕, 선생들조차 관리자들과 다를 바 없는 짓을 서슴지 않았다. 예덕실업고 음악담당 남광균 교사는 어린 학생들의 열악한 노동조건을 보다 못해 자신이 직접 나서서 이 문제의 해결을 위해 노력하다 해고되기도 했다. 이러한 소식을 전해 들은 학생노동자들은 그간 열악한 작업환경이나 기숙사 시설 문제 등과 함께 임금인상 요구와 남광균 교사 복직을 요구하며 3월 21일 새벽 1,600여 명이 농성에 돌입했다. 맺혀 있던 한과 눈물이 한꺼번에 터져 나온 것이다.
1988년 3월 21일 새벽 4시 30분, 기숙사에서 1,600여 명의 학생노동자들이 파업농성에 돌입, 오전 7시 30분에는 학교로 전원 집결하여 다음과 같은 요구조건을 내걸었다. 요구 사항은 △1년에 구정·추석 포함한 휴가 3일을 5일로 연장 △졸업식 당일 전학년 휴일 △방 한칸에 8명 숙식은 습기로 피부병이 생기므로 개선 △인권존중(폭력·폭언 근절) △남광균 교사 복직 △현임금 초봉 7만 원, 3개월 후 9만 원, 10개월 후 10만 원은 최저임금도 안 되므로 섬유업체 임금인상액의 20%를 더 지급 △야근수당 지급 등으로, 이들의 그간 어린 노동자들이 얼마나 착취당하고 있었는지를 잘 알 수 있다.
오전 9시 40분, 회사측 대표 관리상무 이광호와 노동자 대표 60여 명(각 학급 반장과 부반장)이 협상을 진행했으나 점차 개선하겠다는 기만적인 태도에 분노해 협상 결렬을 선언했다. 12시 10분 재협상에 들어갔으나 또다시 결렬돼 기숙사로 옮겨 전원 농성을 계속했다. 오후 6시에는 충남방적노조 위원장과 학생대표, 관리상무가 참여한 가운데 협상이 진행돼 임금을 제외한 나머지가 타결되었으나 관리상무와 이사장 이준호(충남방적 회장 이종성의 장남)의 서명이 똑같아 믿을 수 없다며 철야농성에 돌입했다.
3월 22일, 이사장은 학생노동자들이 기숙사에서 농성중이던 낮 12시에 “오후 2시까지 출근하는 자에 한에서만 신분을 보장하며 나머지는 전원 자퇴시키겠다”는 공고문을 게재했다. 이에 흥분한 노동자들은 낮 1시부터 회사 앞 국도를 약 15분간 점거하는 시위를 전개한 뒤 다시 기숙사로 돌아와 관리자들의 봉쇄에도 철조망을 넘어 학교 운동장에 집결해서 농성을 계속했다. 회사측은 교사들을 전원 동원해 농성을 풀라고 회유하고, 예산 신례원 경찰서 정보과 형사를 현장에 투입해 농성 주동자를 색출하겠다는 등의 협박을 계속했지만 노동자들은 이에 굴하지 않았다.
3월 23일, 새벽 2시 30분 교감이 신분보장을 확실히 해주겠다며 오전 6시부터 근무에 들어가라고 회유했지만 농성노동자들은 문서화된 약속을 요구하며 농성을 풀지 않았다. 어린 여성노동자들이 동요 없이 투쟁을 계속해 나가자 회사측은 오전 9시 40분 무기한 휴업 및 휴교공고를 게시하고, 오후 1시부터 관리자들을 투입해 노동자들을 작업장으로 개 끌듯이 끌고 가 강제노동을 시켰다. 이어 주동자 60여 명을 색출해 기숙사 입소를 막고 관리자들이 짐을 꾸려 기숙사 밖으로 내팽개쳤다. 이렇게 일부 농성 주동자들이 기숙사로부터 쫓겨났지만 내부를 재정비해 농성을 이어 나갔다.
3월 24일, 농성자들은 다시 기숙사로 돌아가 경비와 사감을 몰아내고 기숙사를 완전히 점거한 후 요구조건이 완전히 관철될 때까지 농성을 계속할 것을 결의하고, 휴업공고 중임에도 1,500여 명이 밤새 농성을 전개했다. 이날 오전 9시경에는 회사 정문에서 100여 명, 기숙사 옥상에서 200여 명, 기숙사 안에서 800여 명이 “우리는 정당하다. 우리는 정의와 평화를 사랑한다”는 구호를 외치며 투쟁을 계속했다. 한편 회사측은 오전 11시경에 회사 관리자와 형사 60여 명을 투입해 출입을 완전히 차단했지만, 오후 1시경에는 정문 앞 노동자들이 200여 명으로 늘어나는 등 흔들림 없이 투쟁을 계속해 나갔다.
이날 오후 3시 30분에는 남광균 교사와 순천향대 총학생회 학생 20여 명이 진상조사차 작업장으로 향하던 중 형사와 전경 60여 명에게 무차별 구타를 당하고 남광균 교사와 총학생회장 등 학생 4명이 연행됐다. 그럼에도 농성자들이 동요 없이 계속 투쟁을 전개하자 오후 7시에 재협상을 요구한 회사측이 “임금인상을 제외한 모든 요구조건을 수락하겠으며, 임금은 노조를 통해 여건이 수렴되는 대로 받아들이겠다”고 약속함에 따라 농성을 해제하기에 이르렀다. 그러나 예덕실업고 남광균 교사는 회사측이 배후조종 혐의로 고발해 조사받고 구속돼 홍성교도소에 수감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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