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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념의 그늘에 묻힌 쓸쓸한 영혼의 노래_송시우 (42호)
첨부파일 -- 작성일 2012-06-10 조회 1063
 

이념의 그늘에 묻힌 쓸쓸한 영혼의 노래

  송시우 (노동자역사 한내 제주위원회 부위원장)


무자년 비극 현장에서 아직 
죽지 않고 살아 있는 이들 증언은 무섭다 허옇게 
4월 하늘은 아직도 푸르고나

- 퍼런 군복이영 군화영 총이영 
보통 무장대덜 아니었주
- 9
연대 군인덜이어싱가
-
토벌대 군인들과 싸우당 총 맞아 죽은 시신들
우리 밭녘에 땅 팡 묻었주
-
아명허여도 제주사람들은 아니었주
- 50
년이 넘도록 연고지가 어서.

폭도로 불리던 사람들 
오늘도
아무 말이 없다 
무덤 같지 않은 돌무더기 둔덕 
잡목들 
무성히 자라났다 무심히 
보랏빛 
제비꽃 한 송이 
아직 
시린 바람에 떨고 있다 파르르

<속냉이골 돌무더기 둔덕 - 고정기 할아버지는 말한다 (문충성 시집 허물어 버린 집에서)>


오규민이 번개같이 학교 울담을 뛰어넘어 바로 앞에 있는 큰 팽나무 밑둥에 엎드렸다
. 호위하는 분대원들이 그를 에워싸고 같이 울담 안으로 뛰어들었다. 다시 하늘에서 조명탄이 날았고, 이어 총소리가 요란하게 터졌다.
"지붕 위에 기관총이 설치되어 있습니다."
"기관총!"
예상하지 못한 일이었다.
어떻게 경사가 심한 기와 지붕 위에 기관총을 설치했단 말인가.
오규민은 팽나무 밑둥에 몸을 바짝 붙였다. 한여름에도 시원한 그늘을 만들어 줘 곧잘 야외 수업장으로 이용하던 곳이다. 학교가 여기 들어서기 전부터 있었던 나무였다.
다시 조명탄이 운동장을 밝혔다. 그와 동시에 교실 안과 지붕 위에서 사격이 시작되었다. 운동장으로 들어선 유격대원들은 전혀 움직이지 못했다. 그러다가 조명탄이 사라지고 운동장이 어두어지면, 유격대원들은 잽싸게 낮은 포복으로 학교를 향해 다가갔다. 조명탄이 터지면 엎드리고, 꺼지면 앞으로 돌진했다. 어느 정도 학교 건물에 접근하면 옥상에 설치된 기관총과는 사각이 되어서 피할 수 있다고 오규민은 생각해 보았다.
"철수를 해야지 않겠습니까."
그의 곁에 붙어 있던 지휘부 분대장이 더듬거렸다. 그는 본부에서 지원 나온 이덕구 사령관의 호위병으로 유격전에 도가 튼 대원이었다. 그러나 규민으로서는 후퇴를 명령할 수 없었다.
"무슨 소리야. 저들은 지금 우리에게 포위된 거야. 기관총 탄알만 떨어지면."
호통을 쳤으나, 그 전에 유격대원들이 기관총에 견뎌낼지 의문이었다. 그러나 변변히 싸워보지도 못하고 물러설 수는 없었다.
다시 조명탄이 하늘을 밝혔다. 학교 건물 전경이 눈앞으로 언뜻 몰려들었다. 규민의 목구멍에 컥 허니 울음 덩이가 막혔다. 의귀초등학교. 그에게는 잊을 수 없는 곳이었다. 일제 말년에 사범학교를 나와서 1년을 지내고 해방이 되었다. 해방된 나라의 교원이 되자 그는 감격에 벅찼다. 지금 그가 은신해 있는 팽나무 주변 화단도, 학교 앞 시내에서 아이들과 매끈한 돌들을 날라다 만든 것이다.

<현길언의 소설 깊은 적막의 끝중에서(제주작가회의 편 256)>

 

속냉이골 의귀사건 희생자 유골방치 터

모든 생명은 존엄한 것이다.
옛말에 '적의 무덤 앞을 지나더라도 먼저 큰절부터 올리고 가라'고 했다.
바로 이곳은 제주 현대사의 최대 비극인 '4?3사건'의 와중에 국방경비대에 의해 희생된 영령들의 유골이 방치된 곳이다.
당시 국방경비대 2연대 1대대 2중대는 남원읍 중산간 마을 일대의 수많은 주민들을 용공분자로 몰아 의귀초등하교에 수용하고 있었다. 1949112(음력 481214) 새벽 무장대들이 내습, 주민피해를 막아보려고 했지만 주둔군의 막강한 화력에 밀려 희생되고 말았다. 이 때 희생된 십 수 명의 무장대들은 근처 밭에 버려져 썩어가다가 몇 년이 지나서야 비로소 이곳에 묻혔지만, 내내 돌보는 사람 하나 없이 덤불 속에 방치돼왔다.
우리 생평평화 탁발순례단은 우익과 좌익 모두를 이념 대립의 희생자로 규정한다. 학살된 민간인뿐만 아니라 군인?경찰과 무장대 등 그 모두는 해방공간과 한국전쟁 때 희생된 내 형제 내 부모였다.

'평화의 섬'을 꿈꾸는 제주도. 바로 이곳에서부터 대립과 갈등의 고리를 끊어야 한다. 우리 순례단은 생명평화의 통일시대를 간절히 염원하며, 모성의 산인 지리산과 한라산의 이름으로 방치된 묘역을 다듬고 천도재를 올리며 이 푯말을 세운다.

2004513
생명평화 탁발순례단 일동

 

19481011일 제주도경비사령부(사령관 김상겸 대령)가 새로 설치되어 기존의 제9연대(연대장 송요찬 중령)에 부산의 제5연대 1개 대대, 대구의 제6연대 1개 대대가 증파 보강되었다. 여기에 다시 해군 함정(해군 소령 최용남 부대)과 제주경찰대(홍순봉 제주경찰청장)를 통합 지휘하는 권한까지 부여되면서 본격적인 초토화 작전이 시작된다.
게다가 1117일에는 대통령령 31호로 제주도에 한정된 계엄령이 선포되어, 이후 군경의 토벌은 점점 무차별 학살로 변해 갔다. 특히 9연대와 2연대의 교체 시기였던 194812월과 19491, 2월의 잔인한 토벌에 따른 도민들의 희생은 엄청났으며 제주도는 죽음의 섬으로 가엾게 존재할 뿐이었다.
이와 더불어 중산간 마을에 대한 소개령이 내려지면서 대규모 집단학살과 마을 방화가 자행되기 시작했다. 19481229, 9연대와 교체되어 들어온 제2연대의 강경 진압작전은 이전의 상황보다 더 고강도로 진행되고 있었다. 바로 이러한 상황에서 의귀초등학교에 군인들이 주둔하게 되는 것이다.
의귀리에 대한 초토화작전은 다른 지역보다 일찍 시작되었으며, 군인토벌대는 집집마다 불을 지르면서 학살도 서슴지 않았다. 순식간에 삶터를 잃은 주민들은 불타버린 집 주변과 돌담 밑에서 기거하거나 산으로 숨어들었다.
19481226, 국군 제2연대(연대장 함병선 대령) 1대대(대대장 허욱 대위) 2중대(대대장 설재련 중위)는 그동안 강경토벌을 주도하던 국군 제9연대(연대장 송요찬 중령)와 교체되어 당시 의귀초등학교에 주둔하게 된다. 그들은 곧 학교 지붕에 기관총을 설치하고, 토벌대는 수용된 주민들을 대상으로 무차별 고문을 가할 뿐만 아니라 학살도 일삼았다.
이에 무장대의 핵심 부대원 2백여 명은 이들 주민의 안위를 도모함과 동시에 토벌대를 무력화시키기 위해 1949112일 새벽, 2중대를 습격했다. 하지만 이 사실을 미리 간파한 토벌대의 화력에 밀린 무장대는 전멸에 가까운 타격을 입은 채 퇴각했다.
이 사건에 대해 주한미군 육군사령부 일일 정보보고서에서는 다음과 같이 보고하고 있다.

2백 명의 폭도가 112일 새벽 630분에 제주도 의귀리에 주둔하고 있는 2연대 2중대를 습격했다가 패배했다. 2시간의 접전 끝에 폭도는 51명의 사망자를 내고 퇴각했다. 반면 한국군은 2명 사망, 10명이 부상했다. 폭도들로부터 M-1 소총 4, 99식 총 10, 카빈 총 3정이 노획됐다.’

이날 희생된 군인은 일등상사 문석춘, 일등중사 이범팔, 이등중사 안성혁, 임찬수로 밝혀 졌으며, 이들의 위령비는 남원읍 충혼묘지에 있다. 당시 2중대 군인으로 이 전투에 참가했던 이윤(충남 출신) 중사는 자신이 쓴 수기 진중일기에서 이렇게 밝히고 있다.

중대 주둔지를 중심으로 직경 6지점까지 지형정찰을 실시하였고, 수색전에서 반도 앞잡이 두 놈을 생포하였다. 놈들을 문초한 결과 113일에 놈들이 우리 중대를 습격할 목적으로 매일 밤 중대 주둔지 근처에 잠입하여 병력상황을 조사하여 놈들 본부에 연락했다고 한다. 놈들의 정보를 바탕으로 우리가 놈들을 먼저 소탕하기 위하여 출동준비를 완료한 시간이 새벽 3시 반이었다. (중략) 출동시간이 임박한 5시 경에 전초진지에서 돌연 기습을 알리는 신호탄과 함께 사면에서 반도들의 고함소리와 총소리가 요란스럽게 들려오더니 내무반으로 총탄이 마구 쏟아졌다. (중략) 나는 지붕에 설치된 기관총 진지에 올라가 불을 뿜기 시작했다. 놈들 30여명이 순식간에 전멸했다. 놈들이 도망가기 시작했다.’

의귀초등학교에 주둔한 2연대 1대대 2중대 본부를 상대로 한 무장대의 기습은 3시간이 넘는 치열한 전투로 회자되고 있다. 이날 군인 4명이 전사했지만, 그보다 훨씬 많은 수의 무장대가 교전 중 사망했다. 당시 무장대는 2연대가 제주도 지리에 익숙하지 못한 틈을 타 선제공격을 감행했으나 패퇴함으로써, 이덕구가 지휘하는 무장대는 치명적인 타격을 받아 이후 분산, 은거 상태에 들어갔다. 1949112일 벌어진 의귀리 전투는 무장대의 세력이 급속히 약화되는 계기가 되었던 것이다.

이 사건이 빌미가 되어 학교에 수용 중이던 주민 80여 명은 110일과 12일 두 차례에 걸쳐 학교 동쪽 밭으로 끌려가 학살당하는 비극을 맞았다. 무장대와 내통했다는 구실로 군인들이 양민들을 보복 살해해버린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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