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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광산노동자들의 1987년 대투쟁
첨부파일 -- 작성일 1987-07-07 조회 353

1987년 광산노동자들의 투쟁

 

⦁ 시기 : 198777~ 820

 

 

1986년에서 1987년 대투쟁을 향하여

 

1987년으로 넘어가기 전 198611월에 자행된 국군보안대의 박인균 폭탄테러 조작음모는 광산노동자들 투쟁의 징검다리가 되었다. 테러를 당한 당사자인 박인균은 물론이고 10여 명의 노동자들, 전도사들까지 군보안대에서 1주일간 모진 고문을 당하는 고통을 겪었지만, 이는 도리어 광산노동자들이 자신의 처지를 다시 한 번 돌이켜보게 했고, 이를 계기로 1987년 봄철 노조민주화 투쟁, 민주개헌운동, 노동자대투쟁으로 한걸음 성큼 다가갈 수 있었다.

 

1986년 봄철 들어 종교계를 중심으로 광산노동자운동을 실질적으로 지원하는 단체들이 속속 들어서기 시작했다. 5월 사북성당에서 가톨릭 광산지역 노동문제 상담소가 문을 열었고, 도계성당에는 가톨릭 광산인권 문제 상담소’, 태백시에는 기독교청년협의회의 광부모임이 활성화됐다. 한편, 강원대 제적생으로 서울 동일제강에서 노조결성 투쟁을 하다 8개월간 복역하고 나온 박인균이 이 해 5월부터 광산에 정착해 젊은 노동자들과 서클활동을 시작했고, 연진탄광 파업에 선동 유인물을 제작·배포하는 등 적극적으로 광산운동에 뛰어들었다. 그러나 워낙 운동의 황무지였던 광산지역인지라 그의 활동은 바로 군보안대에 포착됐고, 군보안대는 박인균과 선진노동자 모두를 옭아 넣기 위한 프락치공작을 시작했다.

 

19866, 장익수라는 가명으로 박인균에게 접근한 국군보안대 정보원 장창국(장성출신, 당시 29)117일 오후 2시 동료노동자를 소개시켜주겠다며 박인균을 태백시 통리동 연화다방으로 불러냈다. 장창국은 친구들이 통리역 근처에서 개구리를 잡고 있다며 미인폭포로 유인한 뒤 너는 나를 의심하는 것 같다고 해 이야기를 하다 보니 오후 5시가 넘고 있었다. 이때 장창국은 깎아지른 절벽 부근으로 유인해 갑자기 나무 밑을 파보라고 해서 박인균이 이상하게 생각하며 파보자, 거기에서 가로 40cm, 세로 25cm 정도의 푸른 가방이 나왔다. 가방 안에서는 지름 10cm, 길이 30cm 정도의 깡통 안에 여러 개의 사제 다이너마이트가 도화선이 꽂혀 있는 채 나왔다. 장창규는 이것을 박인균에게 가져가라고 했지만 박인균이 화를 내며 빨리 폐기하라고 야단을 치자 숨길 장소를 찾는 척하다 갑자기 쇠깡통으로 박인균의 뒤통수를 힘껏 내리쳤다. 박인균은 그대로 20m 가량 되는 절벽에서 떨어졌지만 다행히 절벽 사이에는 좁은 길이 나있어 양손으로 바위를 짚으며 바로 선 채 떨어졌다. 그러나 손과 발, 정강이, 옆구리 등이 바위에 무수히 찢어지고, 엄지발가락은 살이 떨어져 속뼈가 보였으며, 엉덩이가 돌에 짓찧어져 꼬리뼈가 부서졌다. 박인균은 혹시 장창국이 위에서 사제폭탄을 던질지도 모른다고 생각해 폭포 아래의 작은 탄광촌으로 기어가 주민들의 도움으로 도계성당과 선린교회에 연락을 할 수 있었다. 도계성당 김창수 신부가 연락을 받고 630분경에 도착해 박인균을 성당으로 데려간 직후 경찰들은 이미 박인균을 찾고 있었다. 성당으로 옮겨진 박인균은 중상임에도 밖으로 나가면 연행된다며 병원 이송을 거부하고 있다가 밤 11시경 어머니와 이모, 광부 유태호와 함께 태백시 당직병원인 김정형외과로 출발했다.

 

그러나 이미 태백시 일원에는 밤 8시부터 비상경계령이 떨어져 있었다. 1130분경 택시가 통리검문소에 도착하자 총과 철모로 단독군장을 한 10여 명의 경찰이 이놈이다하며 소총을 그의 가슴에 들이대고 노리쇠를 후퇴시켰다. 어머니가 아들을 두 팔로 감싸안자 이 년 끌어내하며 강제로 어머니를 끌어낸 후 박인균의 팔을 등 뒤로 꺾어 수갑을 채우고 재갈을 물린 채 태백경찰서로 연행, 담요로 말아 책상 위에 아무렇게나 방치해 두었다.

 

같은 시간 연락을 받고 김정형외과에서 미리 기다리던 선린교회 신성식 목사, 황지교회 원기준 전도사가 연행되고, 태백시 기독교청년협의회 권오규 총무, 동해광업소 홍병윤, 장성교회 정연희, 석탄공사 최진석, 함태광업소 정문호 등 10여 명이 강제 연행돼 모진 고문을 받았다. 이들에게는 상동의 미군부대 폭파준비등의 내용이 적힌 태백 광산촌 테러분자라는 조작문서에 서명을 강요했다. 조작문서 속에는 화약은 누구, 화선은 누구, 뇌관은 누구 식으로 이미 모든 것이 적혀 있어 단지 그것을 인정하는 절차만 남아 있었다. 결국 박인균이 몇몇 탄광노동자로부터 사제폭탄을 넘겨받아 장창국에게 줘서 폭탄테러를 하려다 장창국이 거부하자 실랑이 끝에 미인폭포로 떨어지고, 장창국이 이 사실을 보안대에 신고했다는 것이 각본의 전모였다.

 

이후 3일 밤낮의 고문에도 이들이 이를 인정하지 않는 것은 물론이고, 인권위원회 목사 50여 명이 강릉 보안대에 찾아가 석방요구를 전개하는 등 투쟁이 확산되면서 이 사건은 오히려 탄광지역 노동자들의 분노를 폭발시켰다. 결국 1주일 만에 연행자 전원을 석방하고 장창국을 살인미수 혐의로 구속할 수밖에 없었지만 장창국은 4개월 뒤 사건이 잠잠해지자 석방돼 잠적했다.

 

이런 엄혹한 탄압 속에서도 광산노동자들의 대투쟁을 향한 발걸음은 한걸음씩 나아가고 있었다. 특히 1987년 봄철에 접어들면서 광산지역 노동자들의 노조민주화 투쟁이 서서히 불타오르기 시작했다. 함백석공에서는 민주노조 위원장을 당선시켰고, 고한의 월산탄광, 삼척탄좌, 성동탄광 등에서 그 이전에는 볼 수 없었던 어용집행부에 대한 비판서들이 나돌기 시작했다.

 

다시 일어서는 탄광노동자들

 

19876, 전두환 정권의 집권연장에 대한 분노가 폭발되던 바로 그 시점에서 막장의 오랜 굴종의 삶들이 일어서기 시작했다. 비록 그 규모와 횟수는 대도시의 투쟁과는 비교되지도 않았지만 갱도 위에서, 막장 안에서 탄가루를 뒤집어 쓴 노동자들이 보내는 희망은 확실히 다른 지역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것이었다.

 

전국적 개헌투쟁이 최고조에 달하고 있던 1987621, 태백시 변두리 소도동 함태국민학교에서 열린 태백 기독청년회 체육대회자리에서 1986박인균 폭탄테러 조작음모 사건에 연루되었던 오성탄광의 유태호, 함태광업소의 정문호 등이 중심이 되어 시내를 향해 시위를 시작했다. 주로 광산노동자들로 구성된 이들 시위대가 광부들의 집단 거주지인 소도동을 행진하여 태백시 중심인 황지동 근처로 들어섰을 때 형사들이 이를 제지하기 시작했지만, 분노한 주변 노동자들이 이들의 제지를 뚫어버리고 밤 9시까지 시가행진을 계속했다. 태백 광산지역에서 처음 일어난 정치적 가두시위이자, 노동자가 중심이 된 광산 최초의 정치투쟁이었다. 같은 날, 사북에서도 20여 명의 노동자들이 월산탄광 해고자 노민구 등 선진노동자들을 선두로 중산에서 사북까지 2시간 동안 가두시위를 벌였다. 20명 모두 광산노동자들이었고, 동원탄좌 노동자도 8명이나 참가하고 있었다. 이러한 열기를 모아 626일 오후 6시에도 60여 명의 노동자들이 황지교회에서 시청까지 500여 미터를 행진했고, 택시기사, 트럭기사들이 경적을 울리며 이들의 투쟁을 지원했다.

 

629, 오후 6시에 민주개헌 강원도민운동 정선지부결성식이 개최되어 1,000여 명의 노동자들이 시내로 몰려들고 있었다. 그러나 오전에 발표된 노태우의 기만적 629선언은 시위대 내부를 교란시켜 결국 시위는 성당입구를 봉쇄한 경찰을 뚫지 못하고 30분 만에 해산하게 되었다. 그러나 이제까지의 투쟁을 통해 태백지역 광산노동자들의 투쟁은 확실히 다시 일어서기 시작했다.

 

[1987년 노동자대투쟁 이전의 광산노동자 투쟁]

 

세방광업소(1/13) 해고자 구성모 등 7명과 동료·가족 등 노조사무실 점거농성 중 강제연행 

미성탄광(3/9~11) 100여명 체불임금 요구하며 파업 

오성탄광(4/10) 80여명 체불임금 요구하며 파업 

경일탄광(4/14) 프락치공작 항의로 4명 해고

 

1987년 광산노동자 총파업투쟁 개괄

 

강원산업, 대성탄좌, 동원탄좌, 삼척탄좌 등 4개 민영탄광과 석탄공사 산하 4개 광업소 등 총 361개 탄광에는 대략 6만여 명의 노동자들이 고용돼 있었다. 투쟁은 강원도 태백시에서 집중적으로 시작해 8월부터는 전국 탄광으로 이어졌고, 이들의 주요 요구는 임금과 상여금 인상에서 도급제 폐지, 어용노조 퇴진 등 근본적인 문제로 옮겨갔으며 투쟁양상도 국도, 철로, 철도역사 점거 등으로 매우 과격하게 전개됐다. 

 

1987년 당시 광산노동자들이 안고 있었던 문제는 크게 네 가지로 요약할 수 있다. 먼저 다른 지역에 비해 상대적으로 높은 물가와 저임금을 들 수 있다. 1986년 광산노동자들의 평균임금은 월 384,004원으로 타 업종에 비해 높은 편이라고는 하지만 제조업 노동자의 10여 배에 달하는 노동강도, 상존하는 재해위험, 다른 지역보다 10% 이상 비싼 물가 등으로 1987년 광산노련이 자체적으로 집계한 최저생계비 457,991원의 80%에 불과했다.

 

둘째로, 이들의 임금체제는 성과급의 일종인 도급제였는데, 일정한 시간 내에 달성한 작업량을 기준으로 임금이 지급되는 제도다. 매장량이 풍부한 광업소에서는 갱도급제가다도급제가 채택돼 작업량이 임금수준에 그다지 큰 영향을 미치지 않지만 영세탄광의 경우 막장도급제를 채택, 노동자들을 쥐어짜고 있었다. 즉 각 막장에 배치된 25인의 한 조가 캐낸 탄의 양에 따라 임금차이가 심하고, 양을 측정하는 계원과의 사이에 알력을 만들어 냈으며, 임금을 좀 더 받기 위해 하루 20분인 식사시간도 줄이고, 안전에도 소홀할 수밖에 없었으며, 심지어는 일요일조차 무급 처리되는 병폐를 안고 있었다.

 

셋째는 전국 광산노동자 6만여 명 중 70%에 해당하는 45,000여 명이 노조에 가입돼 매우 높은 조직률을 보여주지만, 노조의 부패가 심각했다. 노조간부들의 각종 비리는 너무도 심각해 노조 위원장이 사장보다 더 많은 돈을 착복한다는 소문이 공공연해 파업이라든가 노동자들의 투쟁이 일어나면 간부들이 먼저 도망가는 것이 관례처럼 되어 있었다.

 

넷째는 진폐증을 포함한 산업재해다. 1985년에만 탄광사고 사망자가 185명이었는데, 이 중 낙반과 붕괴로 115(62%), 출수와 운반사고로 16(8.6%), 화학폭발 사고로 15(8.1%), 가스누출로 14(7.6%) 등 제대로 갖추어지지 않은 시설에 의한 사고가 압도적 다수를 차지하고 있었다. 198610월까지만 재해건수 5,405건에 재해자가 5,516명에 달했고, 이 중 162명이 사망했다. 또한 공기 중에 떠도는 먼지가 폐 속에 쌓여 화학작용이 일어나면 규소섬유가 쌓이면서 발생하는 진폐증은 직업을 그만두고 휴양을 해도 증상이 계속 악화되는 치명적인 병이었다. 광산노동자들에게는 56년 내에 이 병에 안 걸리면 행운아로 취급될 정도여서 통계에 의하면 매년 3,000여 명 이상이 이 병에 걸리고 있었다.

 

이러한 열악한 조건 속에서 첫 투쟁은 19873월 대의원선거에 출마했다 해고된 월산광업소 노민구, 동하기업 해고자 김수현, 성동탄광의 구성모 등 8명이 716일 동원탄좌 노조사무실을 점거하고 무기한 단식농성에 돌입하면서 시작됐다. 이들의 투쟁은 185명이 복직되고, 2명은 복직협의를 하기로 하면서 수습됐지만 투쟁의 불씨는 확실하게 지펴지기 시작했다. 이들이 단식농성에 들어간 같은 날 동해탄광 노동자 400여 명이 태풍 셀마로 회사운행차가 정지돼 생긴 공휴일을 무급 처리한 것에 항의하며 노조사무실 점거투쟁에 돌입했고, 716일에는 한보탄광 통보광업소에서 투쟁의 불길을 이어받았고, 721일에는 동해탄광 조광업체인 태극광업에서 투쟁이 전개되는 등 걷잡을 수 없이 확산돼 갔다.

 

이러한 투쟁은 석탄광만이 아니라 활석광, 석회석광, 금광, 경북지역의 흑연선별공장 등으로 확산됐으며, 투쟁의 양상에서도 국도, 철도 점거투쟁과 경찰과의 투석전 등 적극적인 공세를 취했다이러한 광산 노동자들의 투쟁은 812~13일을 고비로 석탄공사 도계광업소 등 대규모 업체에서는 일단락돼가는 한편 소규모 탄광으로 옮겨가기 시작해 820일경에 이르러 투쟁이 마무리되고 있다.

  

[19877~9월 탄광노동자들의 투쟁]

  

회사명

투쟁시기

투쟁내용

어룡광업소

7. 7

24, 상여금 전액지불, 임금인상 등 6개항 요구하며 집행간부들 3일간 시한부 단식농성 승리

해고자들

7. 1618

20여 명, 해고자 복직 요구하며 농성돌입 승리

동해광업소

7. 1618

160여 명, 임금 8% 인상 등 요구하며 농성 승리

통보광업소

7. 1822

600여 명, 하계휴가비 지급 요구하며 농성, 국도점거, 철로에서 투석전 끝에 직선제 등 쟁취

한성광업소

7. 2327

700여 명, 가두점거 투석전 등 전개

황지광업소

8. 1

200여 명, 상여금인상, 퇴직금누진제 등 5개항을 요구하며 농성돌입

호남탄좌

8. 4

100여 명, 어용퇴진, 임금인상 등 4개항 요구하며 철야농성

대성탄좌 정선광업소

8. 6

130여 명, 상여금 인상 등 6개항 요구하며 가족들과 함께 농성돌입

함백광업소

8. 6

600여 명, 도급제폐지 등 6개항 요구 철야농성

도계석공

8. 7

도급제, 간선제 폐지 요구하며 농성돌입, 철도점거로 열차운행 전면중단

동해광업소

8. 8

지난 7. 18 합의사항에 불만을 품고 재파업 농성돌입

대성탄좌 문경광업소

8. 8

 

200여 명, 임금인상 등 15개항 요구, 국도점거

 

어룡광업소

8. 8

700여 명, 상여금 지급제도 개선요구 가두행진

장원광업소

8. 8

200여 명, 상여금 인상 등 6개항 요구하며 연좌

삼척탄좌 정암광업소

8. 9

 

 

- 2,500여 명(노동자 1,000, 가족 1,500) 농성돌입하여 농성장을 고한역으로 옮김으로써 국도마비

- 810일 경찰 진압하자 3,000명으로 급증해서 사북역 점거

강원탄광

8. 10

400여 명, 인권존중 등 요구하며 철암역 점거

동원탄좌 사북광업소

8. 10

1,000여 명, 보너스 인상 등 요구하며 농성돌입

경일광업소

8. 10

파업자제 연설에 격분, 자발적으로 조직을 만들어 농성돌입

두정광업소

8. 10

50여 명, 상여금 300% 등 요구하며 농성돌입

대정광업소

8. 11

100여 명, 농성돌입

봉명광업소

8. 11

200여 명, 농성돌입

오산광업소

8. 11

20여 명, 농성돌입

태산광업

8. 11

70여 명, 농성돌입

오정광업

8. 11

70여 명, 농성돌입

이양광업소

8. 11

70여 명, 상여금, 임금인상 요구하며 농성돌입

묵산광업소

8. 11

300여 명, 임금인상 등 요구하며 농성돌입

태영광업소

8. 11

150여 명, 임금인상 등 요구하며 농성돌입

장원광업소

8. 11

30여 명, 임금인상 등 요구하며 농성돌입

보성탄광

8. 11

농성돌입

나전광업소

8. 11

농성돌입

서진탄광

8. 11

농성돌입

효경탄광

8. 11

농성돌입

세원탄광

8. 11

농성돌입

산예미탄광

8. 11

농성돌입

청림실업

8. 13

농성돌입

서울광업진흥

8. 13

농성돌입

거진광업소

8. 13

농성돌입

흥일광업소

8. 14

100여 명, 퇴직금누진제 등 13개항 요구 농성돌입

삼왕광업소

8. 17

상여금 인상 등을 요구하며 좌철영행 국도 점거

조광업체

8. 18

사북광업소 조광업체 건양, 원일, 성진, 동화, 경안 등 농성

태극광업소

8. 18

200여 명, 합의사항 이행 요구하며 농성돌입

신성산업

8. 19

400여 명, 대천역 점거, 근로감독관 송전규 구타

조광업체

8. 19

동해조광, 장원조광 임금인상 요구 파업돌입

상동광업소

8. 20

800여 명, 국도점거 농성 중 강제해산됨

옥계광산

8. 24

파업농성 돌입

함동연탄

8. 24

파업농성 돌입

   

⦁ 참고자료 : 안재성, <타오르는 광산> (돌베개, 198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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