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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괴산 제월대 주차장에서 마주친 홍명희_김미화 (115호)
첨부파일 -- 작성일 2019-05-28 조회 798
 

괴산 제월대 주차장에서 마주친 홍명희

 

김미화(노동자역사 한내 회원)

 

벽초 홍명희(1888~1968)는 소설가, 언론인, 정치가로 활동한 인물로서 우리에게는 소설 임꺽정의 저자로 유명하다. 그는 충북 괴산읍 인산리에서 태어났다.

 

1919319일 충북지역 최초의 만세시위가 괴산 장터에서 벌어졌는데, 이 시위운동을 주도한 이가 홍명희다. 장에 온 사람들에게 미리 준비한 독립선언서를 나누어주고 그는 선두에 서서 직접 만세시위를 주동하였다. 장날 며칠 전부터 그의 사랑채는 만세시위를 준비하려는 사람들로 북적댔다. 그는 숙부 홍용식을 비롯하여 이재성, 윤명구 등의 동지들과 결의하여 319일 괴산장터를 떠들썩한 시위장으로 만들었다. 그 다음 장날인 324일은 그의 아우 홍성희가 만세시위를 주도하였고 그 다음 장날에도 만세시위는 계속되었다. 홍명희 등 시위 주동자가 일본 경찰에 잡혀가자 수많은 시위대는 경찰서로 몰려가 석방을 요구하며 투석전을 벌여 경찰서를 파괴하는 등 새벽까지 투쟁을 전개하였다. 홍명희는 치안유지법위반 혐의로 징역 16개월을 언도받고 청주형무소에서 복역하였다.

 

   

(좌) 홍범식 고택, (우) 사랑채-3.19 만세시위를 모의한 장소


 

홍명희 생가는 홍범식 고택

 

괴산에서 홍명희 생가를 직접 찾기는 쉽지 않다. 홍범식 고택을 찾아가야 예전 안내판에 홍명희 고택이기도 하다고 적혀있다. 고택의 주인인 일완 홍범식(1871~1910)이 그의 부친이다. 홍범식은 전북 태인 군수로 선정을 베풀다가 1909년 충남 금산 군수로 전임하였다. 1910822일 일본이 조선을 강제로 합병하고 829일에야 일본이 공식적으로 합병사실을 공표하자, 그는 이 소식을 접하고는 목을 매 자결하였다. 합병발생 후 최초의 순국이었다. 그는 순국하기 전 아들 홍명희, 손자 홍기문과 며느리들에게 유서를 남겼는데, “죽을지언정 친일을 하지 말고 먼 훗날에라도 나를 욕되게 하지 말라하였다. 홍명희는 죽을 때까지 그의 책상 앞에 부친의 유언을 붙여놓고 지냈다고 한다.

 

괴산군 마스코트는 임꺽정, 그런데 왜 홍명희 자취는 찾기 힘들까

 

괴산군청 홈페이지에는 마스코트가 꺽정이와 운총으로 이는 소설 임꺽정을 모티브로 제작하였고 홍명희 생가가 괴산에 위치한다고 나온다. 그러나 괴산에서 홍명희 생가를 비롯하여 그의 흔적이나 자취를 찾기는 쉽지 않다. 임꺽정을 앞세우고 관광홍보를 하지만 홍명희는 그림자처럼 뒤에 숨어 드러나지 않는 이유는 뭘까.


홍명희는 <동아일보><시대일보> 등에서 언론 활동에 종사하고 1928년에는 <조선일보>임꺽정을 연재하기 시작하였다. 1927년 신간회 창립에 주도적인 역할을 했으며 신간新幹이란 명칭도 홍명희가 제안하였다고 한다. 1929년에는 11월 발생한 광주학생운동을 신간회가 주도하여 민중대회로 확대시키려 계획하다 발각되어 투옥되기도 하였다. 1945년 해방이 되자 그는 민주독립당 당 대표가 되고 1948312일 김구, 김규식 등과 남한 단독선거 반대 ‘7거두성명을 발표하였다. 이 해 4월 평양에서 열리는 남북 제정당 사회단체 연석회의에 참석하고는 그대로 북에 남아 정치활동을 전개하였다. 또한 아들 홍기문을 비롯한 가족들을 북으로 불러 그곳에 정착하였다. 부수상직을 거쳐 과학원장 등 고위직을 두루 지냈다. 그가 월북하여 북에서 고위직으로 활동한 이력은 남에서는 받아들이기 힘들게 되었고, 이러한 이념과 사상의 갈등은 괴산에서는 현재 진행 중인 것이다.

 

제월대 주차장에 간신히 세워진 홍명희 문학비

 

  


(좌) 문학비 비문과 동판  (우) 벽초 홍명희 문학비

 

1998년 충북 민예총이 주동하여 시민들의 모금으로 홍명희문학비를 괴산 제월리에 건립하였다. 그러나 대한상이군경회, 전몰군경유족회 등 지역 보훈단체들이 월북해서 부수상까지 지낸 사람의 문학비를 세우고 생가보존운동을 벌이는 것은 용납할 수 없다하여 비문이 적힌 동판이 철거됐다가 보훈단체와 합의가 이루어지면서 다시 재부착하는 우여곡절을 겪었다. 비문철거와 재부착하는 과정에서 보여진 홍명희를 둘러싼 해석과 평가가 얼마나 극단적으로 엇갈리는지를 짐작할 수 있겠다. 그리하여 주차장 구석에서나마 우리는 홍명희를 만날 수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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