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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N라면 노동자의 기억_ 우리는 실험쥐가 아니다. 밥, 밥, 밥을 달라! (3편)
첨부파일 -- 작성일 2021-01-12 조회 451
 

N라면 노동자의 기억_  

        우리는 실험쥐가 아니다. 밥, 밥, 밥을 달라! (3편) 

 

조합원들은 일제히 환호성을 터트렸다. 장장 12년을 회사 측과 야합해 노동자들을 등쳐먹은 노조위원장이 물러난다는 사실과 우리의 대표자를 우리의 손으로 직접 뽑게 되었다는 사실이 무엇보다도 기뻤던 것이다. 불과 얼마 전 시민과 학생들의 압력에 굴복해 대통령 직선제를 수용하겠다는 노태우 민정당 대표의 풀죽은 모습을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는 조합원들로서는 감회가 남다른 것이다. 김준태 등 파업을 모의했다는 친구들이 나타난 것은 정오가 가까운 시간이었다. 모두들 술이 얼근하게 취한 채였다.

회사 창립 이래 최초인 하루만의 어설픈 파업이 조합원들의 가슴에 심어준 것은 의외로 컸다. 12년을 노동귀족으로 군림해온 현 노조집행부의 퇴진과 위원장직선제, 임금 10% 추가인상 등 요구조건이 대부분 충족된 것뿐이 아니었다. 평소 감히 얼굴도 제대로 바라볼 수 없었던 관리자들의 기죽은 모습도 통쾌했고 우리도 뭉치면 못할게 없다는 확신을 갖게 되었던 것이다.

그러나 나는 왠지 뒷맛이 씁쓸했다. 그렇게 항의를 하고 시정을 요구해도 소 닭 보듯 하던 회사가 작업을 거부하고 밖으로 뛰쳐나오자 그때서야 깜빡 잊은 듯 서둘러 들어주는 게 답답했던 것이다. 파업을 선동하고 협박하는 게 외부 불순단체가 아니라 사장님과 관리자들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던 것이다. 노동자들을 의식화시키는 것 역시 사장님과 관리자들이라는 생각이었다. ‘근로자를 가족처럼, 공장 일을 내일처럼’. 세종문화회관을 연상시키는 웅장한 철골 제품창고 위에 또 회사 정문에 대문짝만하게 내 걸린 플래카드 역시 눈 가리고 아옹이라는 생각이었다. 날밤을 샌 몸으로 하루 종일 땡볕에 앉아 악을 쓴 1,000여명의 노동자들 중 누구 하나 외부 불순단체나 불순분자의 선동이나 협박, 의식화 교육을 받고 참석하지 않았다니 그게 맞는 것 같았다.

근로자를 가족처럼, 공장 일을 내일처럼’. 오늘도 어김없이 거리의 육교와 건물들엔 대문짝만한 현수막이 내걸려 있었다. 그러나 차창을 통해 바라본 현수막들은 오늘도 어김없이 먼지를 뒤집어쓴 채 심한 바람에 나부끼고 있었다. 더러는 바람에 찢긴 채 추하게 나풀대기도 했다. 영락없이 버림받은 개였다. 집을 오는 버스 안에서도 나는 차창 밖의 그런 풍경을 넋을 잃은 채 바라보고 있었다.

 

*

 

19878월 파업이 끝난 지 한 달 만인 9월이었다. 노조 사무실을 들어서니 씨름선수로 보이는 30대 초반의 젊은이가 진을 치고 앉아 있었다. 머리는 박박 밀고, 앞 이빨은 한 개가 빠져 휑하니 비어 있고, 웬만한 초등학생 넓적다리만한 팔뚝은 빗살무늬 같은 칼자국 흉터가 섬뜩한 친구였다. 그가 구사대로 특채된 안양지역의 조직폭력배로 삼청교육대를 갓 출소한 한상복이란 걸 안건 며칠 후였다. 뿌리 깊은 어용노조의 민주화운동으로 몸살을 앓던 대기업들이 너도나도 조폭이나 삼청교육대 출소자, 백골단 등을 구사대로 특채할 때였다.

그 탓으로 한상복은 대부분의 시간을 노조사무실에 죽치고 앉아있거나 현장을 배회하며 민주노조 세력들이 누구와 무슨 얘기를 하나 염탐하는 게 일이었다. 소속이 튀김기름을 관리하는 스낵12층 후라이실이라지만 그 일은 다른 사람들이 했다. 현장을 배회하거나 노조사무실에 진을 치고 앉아 블랙리스트들의 동태와 대화내용 등을 염탐하는 게 그의 일이었다. 특히 야근 때면 술이 만취된 채 각목을 들고 들어와 빨갱이들 때려죽인다며 현장을 누비며 공포의 도가니로 만들었다. 기름 장갑을 끼고 기계를 고치다가도 그가 왔다는 전갈이 오면 피신하기 바빴다. 그렇게 어용노조의 민주화운동의 중심인물인 공무과 대의원 정동철을 찾아 현장을 한 바퀴 휘저은 후 들르는 곳이 우리 부서인 자동 정비반 사무실이었다. 먼저 출입문 유리를 주먹으로 깨 팔뚝에 피를 낭자하게 흘리며 유리조각을 고드름처럼 오드득오드득 씹으며 들어오는 게 그의 첫 인사였다. 그렇게 사무실 안을 배회하며, 여기저기 흩어져 앉아있는 부서원들을 하나하나 훑어보며 빨갱이새끼 어디 갔냐며, 빨갱이새끼들은 다 때려죽여야한다는 말을 중언부언 늘어놓는 게 다음 인사였다. 빨갱이 새끼를 대의원으로 뽑았으니 너희들 모두가 똑같은 빨갱이새끼들이라고도 했다. 입사동기에다 나이도 동갑인 관계로 정동철과 가깝게 지내는 죄로 내 머리 위에 담뱃재를 털거나 검지와 중지를 가위처럼 펴서 눈알을 후벼 파는 시늉을 하기도 했다. 빨갱이 새끼들은 눈깔을 파버려야 빨갱이 짓을 못한다는 얘기였다. 그럴 때마다 경비실과 숙직실로 전화를 하지만 경비들과 숙직자들은 그의 뒤를 졸개처럼 졸졸 따르며 이제 그만 가라는 말만 되뇌었다. 그의 직속상관인 스낵1과의 부장과 과장 역시 그를 달래느라 진땀을 빼기는 마찬가지였다. 그의 난동을 제어 할 수 있는 사람은 오직 한사람, 안양공장의 2인자인 이부식 노무담당 이사였다. 아무리 천방지축 날뛰다가도 이부식 이사에게 전화만 하면 빨갱이새끼들을...” 하며 종적을 감췄던 것이다.

그럼에도 구사대 한상복은 1987년 입사 때부터 1993년 해고당할 때까지 이와 관련해 단 한 차례도 징계를 받은 적이 없었다. 1993년 자신도 해고를 당했다며 나를 찾아와 회사 측의 토사구팽에 대해 구구절절이 털어놔 불법, 은폐 조작세력들에 이용만 당한 불쌍한 영혼임을 감안해달라는 것이었다. 특히 그는 N라면 노조민주화 파괴세력의 배후세력이 서슬 퍼런 공안기관의 대공수사과장 출신인 K와 그 출신자들의 친목모임인 Y회 회원들임을 강조했었다. 1993년 노조위원장 선거 때 노조위원장이 과반수 득표에 실패해 더 이상 어용후보로는 불가능함을 간파한 회사 측이 평소 징소리(N라면의 불순분자 빨갱이로 비밀조직인‘N 민주노조실천노동자회소식지인 지하신문 이름임)로 매도해온 안성지부장을 후보자로 내세우자 골수 어용파들이 자체후보자를 내세웠다. 그 괘씸죄로 한상복은 반장의 상징인 빨간 모자가 벗겨지고, 자의반타의반으로 회사를 그만뒀던 것이다.

그는 차량이 미행을 하는 것 같다며, 언제 개죽임을 당할지도 모른다며 불안해했었다. 그들이 제일 두려워하는 것이 진실이 밝혀지는 것이라며, 흔적도 없이 없애버리는 게 그들의 주특기라며 불안해했던 것이다. 그리고 두 번째 만난 며칠 후 친구의 차로 지방을 다녀오던 중 안양공장 인근 시흥 도로에서 반대차선에서 돌진해온 차량에 조수석에서 그만 즉사를 했던 것이다.

 

*

 

1987년 파업이후 달라진 건 그뿐만이 아니었다. 사무실에 앉아 작업현장을 한눈에 내려다 볼 수 있도록 현장 사무실 창문들이 일제히 대형 투명유리창으로 바뀌었다. 그리고는 파업에 적극적으로 참여한 사람들과 어용노조의 민주화 운동에 적극 동조하는 사람들을 대형 유리창문 앞으로 자리이동 시켰다. 사무실에 앉아 작업자들을 어항 속 금붕어 관찰하듯 보는 게 반장들의 일이었다. 강당에선 하루가 멀다 하고 특강이 열렸다. 무슨 외교안보연구원 교수니 사회문제연구소 소장이니 하는 사람들이 하는 강의였다. 주로 월남패망, 수출의 어려움, 영국의 고질병인 파업, 임금이 많이 인상되면 회사경영과 국가경제에 악영향을 미친다는 얘기였다. 이 강의를 위해 작업시간을 3시간 단축시키며 3시간의 연장근로수당을 주기도 했다. 그러니 반드시 들어야 했다. 자도 좋으니 참석만 하라고 관리자들이 애원을 할 지경이었다. 그래도 그냥 퇴근을 하는 사람들이 있었다. 그럼 경비실에서 명단을 적어 올렸고, 다음날이면 어김없이 사무실로 불려가 경위서를 썼다. 지금생각해도 숨 막히던 시절이었다. 거짓이 진실을 이기고, 이기는 게 정의이고, 반대자들을 불령선인, 반동으로 매도하고 숙청시킨 일제, 공산독재 시절이 아닌 가 착각이 될 지경이었다. ‘거짓말을 하려면 크게 자주 하라. 그럼 대중들이 믿는다고 선동했던 괴벨스의 나치세상 역시 마찬가지였다.

파업은 노동자의 학교라는 말은 역시 진리였다. 신문이나 방송을 통해 아니면 타사업장의 친구들을 통해 들어온 얘기들을 파업을 직접 체험한 조합원들의 노동조합에 대한 관심은 눈에 띄게 높아졌다. 노동조합은 어떻게 해야 하는 것이고 대의원의 역할이 얼마나 중요한 것이라는 것도 어렴풋이 느끼고 있었다. 그동안 조합원들의 가려움증과 궁금증을 풀어준 것도 몇몇 민주파를 중심으로 한 대의원들이었고, 회사 측의 입장만을 앵무새처럼 되뇌는 노조 집행부를 쳐들어가 거칠게 항의한 것도 그들이기 때문이었다. 뿐만 아니라 지난 파업 때 무성의한 회사와 무기력한 노조 집행부를 상대로 과감히 나서 싸운 것도 몇몇 민주파를 중심으로 한 대의원들이었기 때문이다.

1987년 파업을 통해 만난 10명도 배운 게 많기는 마찬가지였다. 올바른 노동조합을 만드는 일이 순수한 정의감이나 소신만으로 될 수 없는 일임을 절감했던 것이다. 우리의 주장을 지지해주고 다른 조합원들에게 전파시키기 위해서는 체계적인 이론도 필요했고 어느 정도의 조직도 필요했다. 뿐만 아니라 노동조합의 활성화를 위해선 활발한 대의원의 활동이 무엇보다 시급했던 것이다. 우선 1988년 대의원 선거에 전원이 출마하는 것은 물론 타부서에서도 평소 친분이 있는 사람을 최대한 동원해 출마시키기로 했다. 부산 안성공장의 경우 전혀 아는 사람이 없으니 대의원의 신분을 이용한 활발한 대의원 활동을 통해 지부의 대의원들과 접촉해 교두보를 확보해 보자는 생각이었다.

우선 안양공장에 한해 30개 선거구 중 14곳에 독자후보를 내세우기로 했다. 대부분이 아가씨들이 일하는 부서였다. 그리고 14명 모두 현장 내 휴게소 설치와 연월차 휴가와 생리휴가의 자유로운 사용과 연장근로의 자유 보장 등을 공약으로 내세우기로 했다. 오전오후 10분씩 화장실 교대시간이나 점심시간에 마땅히 쉴 곳이 없어 화장실 바닥이나 현장 바닥에 박스를 깔고 앉거나 눕는 게 아가씨들의 휴식이기 때문이었다. 생산성향상이란 이름하에 연월차나 생리휴가, 연장근로, 휴일근로 역시 작업에 지장이 많다는 사전허가제로 이용되는 것도 마찬가지였다. 그러니 아가씨들로선 월급 몇 푼 올려 받는 것 못지않은 중요한 일이었다. 1987년 위원장 보궐선거 때 제휴를 했던 윤언용과는 내부적으로 결별을 선언한 상태였다.

 

*

 

대의원선거 일정이 확정되자 공장안은 돌연 생기가 넘쳐흘렀다. 조합원은 조합원대로 조합사무실은 조합사무실 대로 바삐 움직였다. 그러나 바쁜 사람은 이 뿐만이 아니었다. 무엇이 뛰니까 무엇도 뛴다더니 관리자들이 덩달아 바빴다. 회사의 대의원을 뽑는 선거로 착각이 들 정도였다. 과장 부장들도 봉급에서 매달 조합비를 공제하는 조합원으로 착각이 될 정도였다. 하루 만에 끝나긴 했지만 회사 창립 이래 12년 만에 처음 겪은 파업 탓인지, 지난 1년 동안 민주파 대의원들의 적극적인 활동에 자극을 받은 탓인지 은밀하게 음모를 꾸미듯 하던 작년과는 달리 적극적이고 노골적이었다.

각과의 과장과 부장들은 출근하기가 무섭게 자기 부서의 출마 예상자와 성향분석, 부서원들의 여론동향 등을 수집하느라 연일 사무실로 부서원들을 불러들이기 바빴다. 과장 부장의 부름을 받고 근무지를 떠났으니 이를테면 근무지 유단 이탈인 셈이었다. 이러한 은밀한 면담은 사내 사무실은 물론 회사 밖에서도 분주하게 이뤄졌다. 회사와 노동조합 집행부의 입장을 지지하거나 아니면 자기주장이 별로 없어 회사 측에서 조종하기 쉬운 사람을 대의원에 심기 위해서였다. 아니, 조합원의 편에 서서 시시비비를 가리고, 민주적이고 자주적인 노동조합을 만들기 위해 노력하는 민주파들을 낙선시키기 위해서였다. 유명한 술꾼에다 노름꾼인 현 위원장은 꼴통이라는 별명답게 단순해 전 위원장 못지않게 회사 측과 원만한 협조 관계를 과시하는 중이었고, 회사 측 역시 이러한 안정적인 노사관계의 유지 발전을 위해 현 노조 집행부의 입지를 강화시켜주기 위해 노심초사하는 중이었다.

그러니 마땅한 사람이 없을 때는 반장이나 아니면 평소 말이 없고 조용한 사람들을 불러 출마를 강요했다. 절대 열세라 해도 못 먹는 감 찔러나 본다며 그렇게 했다. 절대로 민주파들이 쉽게 당선되게 하지는 않겠다는 안간힘일 터였다. 상대적으로 순수하고 깨끗한 사람들을 마구잡이로 끌어들여 오염시키는 우리의 정치판과 너무나 흡사했다. 과장이, 부장이 몇날 며칠을 출마하라고 강요해 할 수 없이 나왔다고 고백하는 사람들이 있을 정도였다.

바쁜 것은 자동정비반의 정과장 역시 마찬가지였다. 1년 전 노동조합 사무실 항의에 이어 파업에도 유독 자동정비반원들이 대거 참석해 연일 공무부장과 노무담당 이사에게 불려가 곤욕을 치러 노심초사하던 터였다. 그래 두 반장과 평소 자기와 가까운 이완준 등 몇몇 부서원들을 통해 정동철의 출마가 기정사실로 확인되자 더더욱 바빠진 것이다.

공무과에서는 기계정비반의 신성국과 자동정비반의 정동철이 출마를 공표한 상태였다. 기계정비반의 신성국 역시 작년에 떠밀려나온 이명수와 비슷한 성향으로 위원장 선거 때마다 나타나 이 후보 저 후보를 기웃거리는 선거꾼이었다. 지난 일 년 간 활발한 대의원 활동과 특히 파업 때의 당당한 모습으로 조합원들의 가슴에 깊이 각인된 정동철과는 여러모로 비교가 되는 친구였다.

박명호 등 정동철의 열렬한 지지자들을 몇 차례 불러 회사 측의 입장과 선거이후의 후유증 등을 걱정하며 조용히 있는 게 신상에 좋겠다는 반 설득 반 협박이 어느 정도 먹혀 들어가자 이번에는 나를 불렀다. 정동철을 몇 차례 불러 출마를 포기할 것을 회유해 보았으나 씨도 안 먹히자 적극 지지자들의 발을 묶어 당선을 막자는 작전일 터였다.

남들은 다 가만히 있는데 괜히 눈에 날 필요는 없잖아? 정동철이 하나 대의원 된다고 당장 무슨 이익이 돌아오는 것도 아닌데......”

제가 뭐 한 게 있습니까?”

사실이지 발 벗고 나서서 선거운동을 하는 것도 아니었다. 작년처럼 노동관계법에 대한 지식이나 열성으로 보아 정동철같은 사람이 대의원이 되어야 한다는 요지의 말을 공무과 동료들과 현장 아가씨들에게 하는 정도였다. 큰소리를 치다가도 관리자에게 불려갔다 오기만 하면 풀이 죽어 꼬리를 사리거나, 아예 말을 180도로 뒤집는 사람들이 대부분의 N라면 노조 대의원들이었다. 사사로운 정에 이끌려 아니면 관리자들의 회유와 협박에 못 이겨 평소 지탄의 대상인 인물들을 대표자로 뽑았으니 우리의 노동조합이 이 모양 이 꼴이라는 말을 할 때도 있었다. 그것도 내가 먼저 얘기를 꺼내는 게 아니라 동료들의 입에서 먼저 노동조합 얘기가 나오면 내 나름의 의견 개진을 하는 정도였다. 다분히 의도적이긴 하지만 꼬투리를 잡히지 않기 위해 각별히 신경을 쓰는 터였다.

도대체 제가 무슨 일을 했다는 겁니까? 그거나 속 시원히 말씀해 보세요. 그래야 하든가 말든가 할 거 아닙니까?”

누구보다 본인이 더 잘 알 텐데 뭘 그래. 왜 다른 사람들은 다 아는데 본인만 모르지?”

점점 물이 들어가니까 그게 문제야. 친한 거야 누가 말리나.”

물이요? 입사 동기이고 나이도 취미도 비슷하고, 또 같이 자동포장기를 정비하고 그래서 친하게 지내는 건데 그것도 안 되나요? 그럼 동료와 원수처럼 지내야 하나요?”

도대체가 가당치도 않은 얘기였다. 이러한 쓰잘데기 없는 얘기로 시간을 허비하며 응대하고 앉아있는 자신이 한심했다. 나는 자리를 박차고 사무실을 나왔다. 정말 오해를 살만한 뭔가가 있는 건지 아니면 나를 떠보기 위한 말장난인지 알 수가 없었다. 그러나 나는 그러한 일로 더 이상 골머리를 썩이지 않기로 했다. 내가 한일에 대해, 내가 하고 있는 일에 대해 한 점 부끄러움이 없는 한 괘념치 않기로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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