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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 더 하기 운동과 권미경 열사(1991년 12월)
“내 이름은 공순이가 아니라 미경이다”
1991년 12월 6일 오후 4시 10분경 신발 제조업체인 ㈜대봉 본사(부산시 사하구 신평동 497번지, 대표 조우준 45세) 생산직 노동자 권미경이 이 회사 3층 옥상 30m 높이에서 지하식당 앞 공터로 떨어져 숨진 채 발견됐다.
회사관리자들이 권미경을 고신의료원으로 옮겼으나 응급실에 도착한 오후 4시 24분경에는 이미 숨진 상태였다. 사체 검안 결과 “사체는 곤색의 대봉 작업복을 입고 있었고 우측 상완부 개방성 복잡골절, 우측 늑골 다발성 골절, 비출혈, 양축대퇴부 둔부 자상과 찰과상이 나타나고 있으며 직접적 사인으로는 우측 늑골 다발성 복합골절에 의한 흉부 장기 손상으로 인한 혈흉 및 뇌자상이다”라고 밝히면서 타살의 혐의가 없다고 결론지었다.
권미경 열사의 사체 왼쪽 팔에는 다음과 같은 글이 적혀 있었다.
“사랑하는 나의 형제들이여
나를 이 차가운 억압의 땅에 묻지 말고
그대들 가슴 깊은 곳에 묻어주오.
그때만이 우리는 비로소 완전히 하나가 될 수 있으리.
인간답게 살고 싶었다.
더 이상 우리를 억압하지 마라.
내 이름은 공순이가 아니라 미경이다.”
권미경 열사 약력
1969년 전북 장수에서 1남 3녀 중 장녀로 출생
1971년 부산으로 이사
1982년 부산 아미초등학교 졸업
1985년 동주여중(야간) 졸업
1985년 3월~1987년 10월 대일산업 미싱공
1987년 10월~1988년 12월 ㈜청산 (핸드백 제조업)
1989년 1월~1990년 3월 ㈜세원 미싱공
1990년 6월~1991년 12월 ㈜대봉 재봉과
1991년 12월 6일 ㈜대봉 3층 베란다에서 지하식당 앞 공터로 의문 추락사
기업들의 10% 더하기 운동
대한상공회의소, 전국경제인연합회, 한국무역협회, 중소기업협동중앙회, 한국경영자총협회 등 5개 경제단체는 1991년 11월 22일 ‘기업체 10% 더 하기 운동 추진요령’(5대 더 하기 운동)을 발표했다.
핵심 기조는 “급변하는 대내외 여건하에서 기업 경영상의 어려움이 가중됐고, 1991년의 경제상황 역시 개선될 조짐이 없는 상태에서 경제 분위기 재건운동을 적극적으로 전개해 경제위기를 발전적으로 극복한다”는 것이다. 목표는 “10% 절약 더 하기, 10% 저축 더 하기, 10% 생산성 더 제고하기, 10% 수출 더 증대하기, 자발적으로 일 더 하기”였다.
‘5대 더 하기 운동’은 사실 이전부터 준비된 것이다. 1991년 8월 말부터 정부와 관변단체들이 중심이 돼 ‘이제는 소비를 자제할 때’라는 과소비 추방운동을 벌이더니 1991년 10월 7일부터는 2단계로 ‘새생활 새질서운동’을 추진해왔고, 11월 22일에 5개 경제단체와 상공부가 ‘5대 더 하기 운동 전진대회’를 열었다. 서울시는 이에 조응해 “공무원이 앞장서서 30분 일 더 하기 운동을 벌임으로써 이 운동이 확산되는 계기를 마련하고자 한다”며 이날부터 퇴근시간을 30분 늦췄다.
12월 11일에는 서울 구로동 한국수출산업공단 연수원 강당에서 박용도 상공부 차관과 최종호 공단이사장이 참석한 가운데 ‘기업체 5대 더 하기 운동 전진대회’를 열었다. 같은 시각 공단본부 정문 앞에는 구로공단 노조협의회, 금속노련 서울본부, 서울지역노동조합협의회 구로지구 등의 대표자들이 모여 “경제난국 책임전가 전시행정 중단하라”는 현수막을 들고 항의, 침묵시위를 벌였다.
정부와 경제단체 그리고 관변단체인 바르게살기협의회, 새마을 운동본부 등이 주도하는 ‘5대 더 하기 운동’에 대해 노동자들은 “노동자의 생존권 투쟁 그 자체가 경제위기를 조성하는 것으로 몰아붙여 국민과 노동자의 투쟁을 이간질시키는 것”, “30분 일 더 하기 운동은 1987년 여름 노동자대투쟁 이전으로 노동조건을 되돌리려는 노동통제 정책이다”라고 비난하고 나섰다. 노동자들의 대응이 본격화되자 정부와 자본은 언론을 동원한 이데올로기 공세를 대대적으로 퍼부었다.
‘5대 더 하기 운동’은 노동자들에게 강제작업, 노동조건 약화, 노동조합 활동의 위축 등으로 작용했다. 서울시 공무원이나 대한항공처럼 작업시간을 30분 연장하거나 청소나 조회 등 실제 작업시간에 포함되어야 할 일들을 작업시간 전후로 배치하여 작업시간 외 노동을 강제했다. 매일 잔업하고 있는 제조업 노동자들에게는 노동강도 강화를 통한 생산량 증대를 요구했다.
㈜대봉의 작업조건과 권미경 열사의 죽음
노동자에 대한 강제노동과 감시가 가장 심한 곳은 부산지역의 신발업계 공장들이었다.
정권과 자본의 산업구조조정 정책이 실패하면서 1991년 하반기부터 부산지역의 많은 신발 제조업체가 도산하거나 도산 위기에 놓여 있었다. 신발업계의 경영위기는 저임금 장시간 노동으로 막대한 이윤을 챙긴 기업주들이 이윤을 기술이나 신제품 개발 등에 투입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사업주들은 자신들의 책임을 노동자에게 전가하기 위해 예외없이 이른바 ‘‘애사운동’을 전개했다. ㈜삼화의 ‘10분 일 더 하기 운동’, ㈜진양의 ‘불황극복 50일 작전’, 대신교역㈜의 ‘3무 운동(무불량, 무이탈, 무미달)’, ㈜세신의 ‘무임금 1시간 일 더 하기 운동’ 등 노동 착취가 극에 달하고 있었다.
㈜대봉 역시 마찬가지였다. ㈜대봉은 아디다스 등의 신발을 만들어 수출과 내수를 겸하고 있는, 전체 사원 3,500명 규모의 대규모 수출 업체였다. 이 회사는 작업강도를 강화하기 위해 ‘30분 일 더 하기 운동’을 모방한 관리방식을 취했다. 1991년 11월 1일부터 노동조합의 협조하에 전체 사원이 ‘원가절감, 결근방지’라는 깃을 달고 작업했고, 목표량 달성을 위해 노동자들의 작업강도를 강화해 왔다.
권미경 열사의 현장 동료들 증언에 따르면 12월 들어서 목표량 달성을 촉구하는 관리자들의 독촉이 더욱 심해졌다고 한다. 현장에서는 관리자들이 초시계를 들고 다니면서 목표량 달성을 요구했다. 이를 달성하지 못할 경우 훈시와 교육 등으로 통근버스를 타지 못하는 경우가 많았고 강제 연장근로도 다반사로 진행됐다.
권미경 열사가 죽기 이틀 전인 1991년 12월 4일에는 권미경 열사가 소속된 1계 3조의 노동자들이 목표량을 달성하지 못해 작업종료 후 20분간 계장의 훈시를 받는 바람에 저녁식사도 하지 못했다. 이에 한 동료가 가지고 있던 밀감과 빵을 먹으려다 전홍규 과장(40세)으로부터 “작업시간 중에 이렇게 하니 물량이 나오지 않는 것”이라는 질책을 당해 식사도 못한 채 작업하기도 했다. 사건 당일인 12월 6일 오전에도 외국 바이어가 권미경 열사가 일하던 라인을 방문해 “불량이 많다”고 조장을 질책했고, 이에 화가 난 조장이 산업체 야간 학교에 다니던 여성 노동자를 심하게 나무라는 일이 있었다. 이를 본 권미경 열사는 주위 동료들에게 “지옥이 따로 있느냐, 이곳이 바로 지옥이 아니냐”고 울먹였다.
이날 오후 4시, 10분의 휴식시간 중 권미경이 옥상 베란다에 있는 것을 발견한 회사 안전관리요원 이동근이 내려오라고 하며 위로 올라가려 하자 권미경은 곧바로 옥상에서 뛰어내렸다. 권미경 열사는 자본과 정권의 살인적인 노동통제 정책의 희생양이 된 것이다.
권미경 열사는 초등학교를 졸업하고 바로 공장에 취업해 10년간 노동자 생활을 하면서도 야간중학교에 다니며 공부를 계속했다. 가족은 완구공장에 다니시는 홀어머니 박영애(46세)와 노동일을 하는 오빠 권흥기(26세), 회사원인 동생 권미자(20세), 학생인 권혜경(17세)으로, 1남 3녀 중 장녀였다. 어머니는 절대로 자살할 아이가 아니라면서 경찰의 자살 추정에 대하여 강하게 반발했다. 죽은 당일 아침에도 평일과 다름없이 밝은 모습으로 출근했고, 죽기 직전에 썼던 12월 5일자 일기에도 “바로 내 직장 동료들과 함께 하고자 할 때만이 우리의 정당한 권리를 빼앗기지 않고 찾아 나갈 수 있을 것이다”라고 썼다고 한다.
사인규명 대책위원회 구성과 투쟁
권미경 열사가 투신 사망하자, 부산지역의 민주단체들은 즉각 ‘고무노동자 권미경 열사의 진상조사와 사인규명을 위한 대책위원회’(아래 ‘대책위’)를 구성했다. 대책위에 참여한 단체는 부산지역노동조합총연합, 부산노동운동단체협의회, 부산노동자연합(아래 ‘부노련’), 고무산업 노동조합민주화추진위원회(아래 ‘고무노민추’), 부산․양산 노동운동단체연합 준비위원회, 부산․울산지역 총학생회연합, 기독교 인권위원회, 민주화운동가족실천협의회, 부산민주청년회, 광장도서원, 민중당 부산시지부 등 총 11개다.
대책위는 권 열사의 죽음을 “회사측의 노동강도 강화정책에 맞서 죽음으로 저항한 사건”이라고 규정하고 투쟁을 전개했다. ㈜대봉의 원가절감 운동은 경제위기의 원인을 노동자에게 전가하기 위해 전국적으로 벌어지고 있는 ‘30분 일 더 하기 운동’과 맥을 같이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대책위는 12월 7일 낮 12시 ㈜대봉을 항의방문하고 오후 5시에는 고신의료원에서 1차 규탄집회를 했다. 12월 8일 오후 7시에도 2차 규탄집회를 개최했고 12월 9일에는 대시민 선전전을 전개했다.
대책위는 투쟁의 방향을 권미경의 죽음을 전국의 일천만 노동자와 전체 국민에게 알리고, 정권과 자본의 허구적인 일 더 하기 운동과 함께 이와 맥을 같이 하는 총액임금제·시간제근로 등의 노동법 개악 기도에 맞서 일천만 노동자와 함께 투쟁하는 것으로 삼았다. 대책위는 이와 함께 정부에 △30분 일 더 하기 운동 식의 노동강도 강화정책 철폐 △총액임금제·시간제근로 등 노동법 개악 음모 중단을 요구하고, ㈜대봉을 비롯한 신발사업장 자본가들에게는 여성노동자에 대한 무자비한 노동 착취 중단을 촉구했다. 노동부에도 일 더 하기 운동을 빙자해 근로기준법 등 노동관계법을 위반한 사업주 엄벌 등을 요구했다.
권미경 열사의 장례는 대책위원회 중심으로 구성된 장례위원회 주도하에 1991년 12월 22일 치러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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