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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크리스챤아카데미 사건 : 노동자의식화 교육의 요람
첨부파일 -- 작성일 2010-03-04 조회 1115
 

크리스챤아카데미 사건 : 노동자의식화 교육의 요람

김 원(노동자역사 한내 연구위원)

79년 3월 9일. 크리스챤아카데미 여성 간사 한명숙이 연행되었다. 연이어 13일에는 농촌사회 간사 이우재, 황한식, 장상환과 산업사회 간사 김세균, 신인령 등이 연행되었다. 뒤이어 청창렬, 김병태, 유병묵 등 교수들의 연행, 아카데미 교육을 받았던 30여명의 농민들, 대학 강사, 노동조합 간부 등이 연행되었다. 이들의 불법 연행에 대해 당국은 불온한 사상을 지닌 불법 지하 용공 써클 사건임을 강조하며, 이들의 혐의는 <현대사상연구>, <경제학교과서>, <공산당 선언문> 등 불온 서적을 복사, 배포하고 북한을 찬양하는 발언을 하며, 의식화 교육을 통해 사회주의 사상을 주입했다는 것이었다. 과연 당국의 주장은 어느 정도 일치하는 것 이었을까? 또한 크리스챤아카데미의 교육 활동이 노동자운동에 미친 영향은 무엇일까?

초 크리스챤아카데미는 현실개혁이란 목표를 가지고 1965년 ‘한국기독교학술원’이라는 이름으로 설립되었다. 크리스챤 아카데미를 주도했던 인물은 경동교회 강원룡이었다. 크리스챤아카데미가 만들어진 데에는 독일 에반젤리켈 아카데미 운동과의 연계가 결정적이었다. 2차 대전 이후 '대화운동'으로 독일 사회의 문제점을 해결하고자 했던 에반젤리켈 아카데미의 이념을 받아들여, 크리스챤아카데미도 사회문제에 대한 조사 연구, 대화운동, 교육과 훈련을 집중적으로 진행했다. 1964년에는 서울 수유리에 "대화운동의 기지, 연구와 훈련의 센터"인 아카데미 하우스가 만들어 졌고, 70년에 들어서는 '인간화'를 한국 사회가 추구해야 할 이념으로 내세운다. 한국 사회의 비인간화는 빈부, 치자와 피치자, 도시와 농촌, 노동자와 자본가 등으로 형성된 단절을 의미했고, 이런 양극화의 해결을 위해서는 중간집단이 필요하다는 것이 크리스챤아카데미의 기본적 생각이었다. 이들은 한국 사회를 비인간적으로 만드는 원인으로 ‘양극화 현상’을 지적하면서 대안으로서 양극화된 사회의 가교로서 ‘중간집단’의 육성을 주창했다.



바로 이전 시기 대화 모임의 어려움, 교육훈련의 경험, 새롭게 형성된 이념 틀이 결합되어 등장했던 것이 '중간집단 육성 강화를 위한 프로그램'이었다. 1973년부터 구체적인 중간집단 교육 준비를 시작한 크리스챤아카데미는 우선 연구위원회를 만들고 각 분야별로 교회교육, 여성교육, 산업교육, 학생교육 위원회를 구성했다. 당시 직접 교육을 맡았던 간사(또는 스탭)들은 농촌사회의 이우재, 산업사회 신인령, 여성사회 한명숙 등이었다. 구체적으로 산업사회 중간집단 교육을 살펴보면, 이 교육은 노동자 개개인의 성장이 아니라, 교육을 통해 노동운동을 활성화시킨다는 목적을 지니고 있었다. 이를 위해 간사들은 중간집단 교육의 이념과 일반적인 틀을 훼손하지는 않았지만, 그 지향은 강원룡 등과는 다소 달랐다. 즉
개신교 지식인들이 추구하던 ‘인간화된 사회’의 현실적인 모델은 국민의 참정권과 기본권이 보장되는 서구 자유민주주의 체제였다. 따라서 이들은 서구 합리주의적 가치관이 한국 사회에 도입되어 권위주의적인 사회가 자유민주주의로 변화되기를 희망했다. 하지만 크리스챤아카데미 내부의 간사들의 경우 강원룡 등 목사들의 지향과 다소 상이했었다.

노동자의식화 교육과 관련, 크리스챤아카데미는 산업사회 교육의 성격을 노조 교육으로 설정하고, 노조 간부들을 주된 교육 대상으로 선정했다. 이는 교육을 통해 새로운 노조를 만들기보다 기존 어용화된 노조 속에서 민주노조의 가능성을 형성하려는 의도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이 교육은 74년부터 79년까지 1차 과정 11회, 2차 과정 5회 실시되었고, 교육자는 각각 602명, 103명에 달했다. 또 74~75년 초기 지부장이나 분회장 중심의 교육은 76년부터 중간간부, 대의원, 일반 조합원까지 확대되었다. 이처럼 교육생의 범위가 확장된 것은 기존 교육이수자들이던 간부급의 요청에 따른 것이었다. 한편 당시 교육은 강의와 토론을 배치해서, 자신의 경험을 반성하고 노동운동에서 새로운 임무를 자각하는 데 중점을 맞추었다. 강사와 간사들은 노동자들이 자본주의 모순과 계급 문제의 본질을 인식해야만 노동문제의 해결이 가능하다고 생각했다. 당시 교육은 중간집단 교육이외에도 정치경제학 관련 내용과 노동조합 관련 내용들이 포함되어 있었다.

특히 당시 크리스챤 아카데미에서는 일부 선진적인 여성 노동자를 대상으로 사회과학 훈련이 진행되었다. 1970년대 노동자를 대상으로 한 의식화 교육에 대해서는 잘 알려져 있지 않지만, 크리스챤아카데미 간사를 맡았던 신인령은 민주노조 지도자인 여성 노동자들에게 사회과학 교육을 시켰던 주인공 가운데 하나였다. 강의와 토론 학습이 종료되면 '공동체 과제 작업'이 진행되었는데, 이는 다른 노동교육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크리스챤아카데미만의 독특한 교육방법으로 교육생이 스스로 문제점을 찾고, 이에 대한 해결방안을 공동으로 모색하도록 하는 방법이었다. 한편 후속 활동으로는 노동사례연구회가 75년부터 실시되었는데, 연구회는 정기적으로 모여 노동운동과 연관된 사례를 연구하고 회원 서로간의 친목을 도모했다. 연구회가 운영했던 목요토론회와 연구회지는 노동계 전체 여론을 형성하고 정보를 제공하기도 했으며, 노동자로서 연대의식을 형성하는 계기로 작용하기도 했다. 하지만 도시산업선교회와 같이 직접 개인과 조직을 만드는 방식도 하나의 방법이었지만, 문제가 적지 않았다. 이런 점에서 노동자들 스스로 노조 결성의 주체가 될 수 있도록 조건을 만들었던 아카데미의 의식화 교육은 중요한 의미를 지녔다고 할 수 있다

특히 70년대 크리스챤아카데미와 연계된 민주노조들은 조합원 수준과 지도부 수준에서 교류와 연대가 낮은 수준에서 이루어졌다. 단적인 예로 YH무역 노조 지부장이었던 최순영은 표응삼으로부터 크리스챤아카데미를 소개받았고, 회의진행법, 총회 진행, 교육방법 등을 교육받았으며, 그는 최순영과 원풍모방 박순희 및 당시 여성 지부장들과의 만남을 주선했다. 이를 통해 민주노조운동의 핵심간부들 간의 연계가 만들어졌다. 이들 여성노동자들은 "여성해방노동자기수회"를 조직해서 여성문제에까지 관심 영역을 확대했다. 물론 한계도 분명했다. 이들 간 연대는 각각 민주노조의 투쟁을 격려하고 지원하는 성명서 발표 등에 머물렀지, '공동 투쟁'을 계획하거나 실행하는 단계까지 이어지지는 못했다. 물론 이 점에서 크리스챤아카데미 교육이 참가자의 의식 변화를 이루었지만, 조직화까지 이어지지 못했다는 평가도 가능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크리스챤아카데미의 활동은 당대 유기적 지식인에 의한 '노동자의식화 교육'의 초기적 형태로 그 의미가 평가되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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