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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해투 한국노총 점거와 병특해고자 투쟁(1994년 5월)
첨부파일 -- 작성일 1994-05-14 조회 109

전해투 한국노총 점거와 병역특례해고자 투쟁(19945)

 

   

전해투의 해고자복직투쟁 배경

1994년 정부는 국제경쟁력 강화를 내세우며 무쟁의 원년으로 선언하고 노동 통제 정책을 강화했다. 이에 발맞춰 신임 노동부장관 남재희는 해고자 문제는 노사자율의 문제라고 선언하고 전국 구속·수배·해고노동자 원상회복 투쟁위원회(전해투)’가 그동안 투쟁으로 쟁취한 복직 약속을 원점으로 돌려버렸다.

전해투는 치밀한 기획으로 해고자복직 문제를 조합원의 투쟁과 결합해 진행하고 정권의 절대 안정 기조를 위협한다면 해결할 수 있다고 판단했다. 1993년 투쟁이 30~40명의 해고자가 선도적 투쟁으로 해고자 문제를 사회적으로 확산시키고 조합원과 결합할 기초를 만들었다면, 1994년 투쟁은 조합원 대중의 투쟁과 결합해 진행한다는 방향을 설정했다.

이에 따라 1~2월 임금인상투쟁 준비기부터 전국적으로 해고자 출근투쟁 등 조합원과 함께할 수 있는 투쟁을 벌이면서 임단협 요구안에 해고자복직 문제를 포함하도록 조직한다는 계획을 세웠다. 또 어용노조 사업장의 해고자도 임금인상 투쟁에 적극적으로 개입해 어용노조를 민주화할 수 있는 계기를 마련하는 투쟁을 벌이기로 했다. 백만인 서명운동, 전해투 후원회원 조직도 배치해 해고자 원상회복을 지지하는 세력을 모으는 사업을 계획했다. 그리고 취약해진 지역 해고자협의회(지해협)’의 조직력을 확보하고 활동력을 강화하기 위해 지역별 단위사업장대표자회의를 조직해 정례화하고, 해고자협의회 간부와 해고자와 해고 발생사업장 노조 집행부가 참여하는 간담회 등을 추진하기로 했다.

이러한 방침에 따라 전국 9개 지역 해고자 500여 명이 315일 노동청 항의방문을 전개했고, 한진그룹, 금성그룹, 금호 등 해고 발생사업장 앞에서 천막농성을 벌였다. 416구속·수배·해고노동자 원상회복을 위한 7차 해고노동자 결의대회에서 30여 명의 해고자가 삭발투쟁을 결의하고 중앙과 지역대표 10명이 단식농성에 들어갔다. 이러한 열기를 모아 514일에는 한국노총 점거투쟁을 벌여 한국노총의 어용성을 폭로했다.

 

전국 동시다발 노동청 항의방문

전해투는 315일 전국 동시다발로 지해협이 있는 모든 지역에서 노동청 항의방문을 배치했다. 해고자 원상회복에 대한 노동부의 확고한 입장을 받아내 실질적인 조치를 강제하며, 전해투의 조직력을 과시하고 위상을 높이는 것을 목표로 삼았다.(1994225일 대표자회의 결의)

항의방문에는 서울, 인천, 경기남부(안산), 대구, 경주포항, 울산, 부산, 광주, 마산창원(316) 9개 지역에서 총 500여 명이 결집했다. 해고자들은 해고 문제가 해결되지 않을 경우 1994년 임금인상 투쟁은 격렬해질 것이라는 것을 주지시키고 1993년에 노동부가 약속한 해고자 원상회복을 촉구했다. 또 해고자복직을 위해 노동청이 적극 노력해야 한다며 해고자-기업주-노동부가 참여하는 해고자복직을 위한 특별위원회구성을 요구했고, 노동부는 기업주에 해고자 원상회복을 위한 행정조치를 취하라고 촉구했다.

지해협은 항의방문 4~5일 전에 해당 노동청(사무소)에 공문을 전달해 방문 취지를 공지한 바 있다. 방문한 날에는 해고자대표, 지노협 의장단, 단사위원장으로 구성된 대표단을 구성해 노동청장(소장)과 면담하고 나머지 대오는 밖에서 현수막, 피켓 등을 들고 노동부에 대한 항의 및 해고자복직촉구 집회를 진행했다.

9개 지역에서 항의방문을 진행했음에도 노동청의 입장은 크게 다르지 않았다. 노동청은 해고 문제해결을 위해 기업주에 권고는 할 수 있지만 강제할 수는 없다다만, 해고자와 기업주간의 대화를 주선할 수는 있다고 밝혔다. 해고자-기업주-노동부가 참여하는 해고자복직을 위한 특별위원회구성 요구에 대해서는 중앙노동부로 책임을 미뤘다. 전국 동시다발 노동청 항의방문으로 실질적인 성과는 없었지만, 9개 지역에서 투쟁을 성사해냄으로써 전해투의 조직력을 확인할 수 있었고 1994년 해고자 투쟁의 포문을 열어젖혔다는 점에서 의미가 컸다.

 

해고자대회·삭발·단식·농성투쟁과 장기기증

199447일로 전국 해고노동자의 농성투쟁은 만 1년을 넘어섰다. 하지만 해고노동자들의 문제는 여전히 해결되지 않았다. 김영삼 정부는 처음 문제해결을 약속한 이후 전해투와 수차례에 걸쳐 진행된 협상 과정에서 이루어진 약속 어느 것도 지키지 않았다. 해고노동자 복직은 정부가 강제할 사항이 아니라며 결정적일 때마다 발뺌하면서 해고노동자들을 기만해 왔다. 전해투는 이러한 김영삼 정권의 기만적인 모습을 정면으로 돌파하고 노동자 대중들의 투쟁을 활성화하고자 3월부터 공동출근, 전국 동시다발 노동청 항의방문, 지역·사업장별 천막농성 등 다양한 투쟁을 전개해왔다.

1994416일 오후 2시에는 종묘공원에서는 전해투 주최로 7차 해고노동자 결의대회를 열었다. 전해투 지원대책위, 민주주의민족통일전국연합(전국연합), 전국노동조합대표자회(전노대)가 후원한 집회에서 1,500여 명의 노동자·시민이 모여 투쟁을 전개했다.

결의대회는 권영국의 사회로 식전 노래공연, 전해투 집행위원장의 1994년 투쟁 경과보고, 전해투 위원장의 대회사, 전노대 공동대표의 연대사, 전해투 지원대책위 공동대표와 전국연합 공동대표의 격려사, 결사투쟁 돌입 선포식, 해고노동자 결의문 낭독, 병역특례해고자 투쟁선포식, 해고발생사업장 대표자 결의 순으로 진행됐다. 대회 이후 전해투 중앙과 지역 대표자 32명은 삭발식을 하고 10여 명은 단식농성에 들어갔다.

이어 전해투 조준호 대표 등 수배·해고노동자 104명은 56일 오전 11, 여의도백화점 6층 전해투 농성장에서 ‘35년 만에 되찾은 세계노동절에 즈음하여 소외되고 고통받는 일하는 사람들을 위해 신체의 일부인 장기를 기증했다. 정든 일터, 그리운 가족의 품으로 돌아가기 위해 목숨을 건 단식농성을 전개하고 있지만, 정부와 기업주는 애초의 약속도 저버리고 전혀 성의를 보이지 않았다. 해고노동자들은 이러한 상황에도 사회와 땀 흘려 일하는 사람들을 위해 마지막 헌신과 희생을 다 하고자 했다.

 

한국노총 점거 투쟁

한편 1994330일에는 전국 노동자들의 거센 반대와 항의를 무시하고 경총과 한국노총이 임금 5~8.7% 인상에 합의한 바 있다. ·경총 밀실 합의에 대한 거부투쟁이 전국에서 들불처럼 일어났다. 514일 오전 1150분경, 전해투 소속 해고노동자와 학생 60여 명은 여의도에 있는 한국노총회관에 들어가 경총 임금합의 분쇄! 어용노총 해체!’를 주장하며 사무총장실과 건물 옥상을 점거하고 농성에 돌입했다.

농성단은 경총 임금합의는 노동자의 생존권을 박탈하는 행위이며 한국노총의 이러한 행위를 방관할 경우 천만 노동자의 권익이 심대히 훼손됨은 물론 노동자들이 임금인상 투쟁에 나서는 명분을 약화시켜 결국 자본가들로 하여금 노동자들을 탄압할 명분을 제공하는 것이라며 정부와 자본이 다시는 어용노총을 활용하여 노동자들의 권익을 침해하는 작태를 되풀이하지 못하도록 그 가능성을 앞으로 영원히 차단시키기 위해 어용노총 해체 투쟁에 총력을 기울일 것이라고 결의를 밝혔다.

 

[투쟁상황]

11:30 농성자 한국노총건물 진입 완료.

11:45 옥상으로 올라가 문 잠그고 옥상에서 임금억제 주도하는 노총은 해체하라!’ 현수막 내림, 위원장실에서 경총 임금합의 분쇄, 어용노총 해체!’ 현수막 내림

11:45 점거 완료, 한국노총 20명과 몸싸움, 위원장실 완전 접수

12:30 완전무장한 경찰 100여 명 복지관 쪽으로 투입

12:37 경찰 2개 중대 증파, 체포조 배치 중

12:50 한국노총 측에서 현수막 철거(현수막 찢어짐)

01:00 경찰 5개 중대 투입, 대치 중

13:05 한국노총 박종근 위원장, 이주완 사무총장, 원정연 홍보실장과 대화

13:08 농성단 상황실에서 한국노총 위원장, 사무총장, 직원 1명 풀어줄 것을 지시

13:16 동아일보 기자와 점거상황을 파악하러 가던 농성자를 한국노총 직원 7~8명이 사무실에 납치·감금하고 집단 폭행.

13:25 전해투 나현균 선전국장이 건물 안에서 연행돼 경찰차로 불법 연행되자 차 밑으로 들어가 완강하게 저항, 취재 중이던 학생이 경찰차로 올라가 잡아가지 말라며 격렬히 항의, 경찰이 한국노총 업무방해 혐의로 나현균 강제연행

13:30 밧줄을 이용해 외부로 유인물 전달, 언론사 기자들이 한국노총 간부들에게 폭행당함

14:00 사무총장실 창문에 어용노총 해체’ ‘·경총 합의 분쇄등의 구호 적으며 농성 계속

14:10 나현균이 병원치료 요청했으나, 경찰이 거부, 옥상에서 30여 명 비 맞으며 농성 계속, 영등포역으로 예정된 집회 장소는 한국노총 앞으로 변경.

14:32 경찰이 체포조 100명 한국노총 진입, 건물 주위 둘러싸고 완전 봉쇄, 건물 주위 시민과 지원 대오를 외곽으로 밀어내는 중

14:40 경찰 2개 중대 한국노총 혼수품센터 건물 진입. 경찰 8명이 건물 내 복도차단 직후 노동자·학생 30여 명이 혼수품센터 앞에 집결해 선전전 시작, 건물 안에 있던 점거농성자도 구호 외치며 선전전

14:54 지지 대오 100여 명 집회 준비, 선전전 시작

15:05 경찰버스 3대 증파(사복체포조), 농성 대오는 6층 위원장실, 옥상, 혼수품센터 옥상에서 구호 외치며 농성 계속

15:15 경찰버스 8대 중 사복조(백골단) 3대는 평상복에서 전투복으로 바꿔입고 무장

15:35 전경버스 12, 페퍼포그 1대 한국노총 주변에 배치. 6층 위원장실에서 밖으로 임금억제 주도하는 어용노총 해체!’ 내검

15:40 지지 대오 150여 명 한국노총 입구 앞으로 이동, 한국노총 입구 철문이 내려진 채 경찰 20여 명 배치됨, 이수홍 위원장(태평양 해고자)만약 한국노총이 전노대를 점거했다면 경찰이 이렇게 오지 않았을 것이다. 이것은 정부가 한국노총을 보호하고 있다는 것을 말해 준다매일 결집해여 한국노총이 해체될 때까지 투쟁하자고 촉구

15:55 지지 대오 200여 명이 한국노총 앞 인도와 1차선 도로를 메우고 집회. 사복체포조 50여 명 한국노총 건너편 인도에 배치됨. 지지 대오 다시 한국노총 건물 옆으로 이동. 혼수품센터 앞에도 전경 10여 명 배치됨

16:00 경찰병력 한국노총 앞에 진압대열 형성, 한국노총과 혼수센터 직원들 밖으로 내보내고, 차도를 점거하고 지지대열 에워싸며 건너편 인도에서 구경하는 시민에게 방패를 내밀며 방해. 전국연합 이창복 의장, “아직 5·6공 부당해고 동지들이 원직 복직되지 못한 것은 이 정부가 문민정부가 아님을 입증한다. 이 싸움은 결국 이 사회의 기본적 구조를 바꾸는 투쟁이다. 힘내서 끝까지 투쟁하자고 발언

16:40 밖에서 들어오던 지지자 2명을 한국노총 직원이 끌어냄. 6층에서 안경호(한국공항 해고자)현재 한국노총 직원들이 침탈을 시도하고 있고 경찰이 5층까지 올라와 침탈하려 한다며 지지대열과 함께 끝까지 투쟁할 것을 천명, 이에 지지 대오는 농성자들의 강제연행에 대비해 한국노총 입구로 대열 이동. 지지대오 200여 명 정도로 늘어나고 봉쇄하고 있던 경찰들도 이동

17:30 농성 중이던 학생 장석호가 한국노총 직원들에게 구타당하고 잡혀있다가 경찰에 인도돼 병원으로 후송. 한국노총 입구에서 계속 선전전, 일부는 한국노총 건물 주변 돌며 행진. 경찰이 음식물 반입을 가로막아 전해투 해고자들과 실랑이하다 옆 건물 통해 전달 시도

17:55 경찰 300명 재투입, 지지 대오를 이삼 중으로 에워싸고 백골단 2개 중대 배치, “자진해산하지 않으면 강제해산시키겠다엄포

18:25 한국노총 앞에서 빠져나오는 대오를 전경들이 밖으로 완전히 밀어내고 한국노총 주위 에워싸며 사람들이 접근 못 하도록 막음. 경찰이 한국노총 건물 주위를 에워싼 가운데 한국노총에서 깡패들을 동원해 쇠파이프 들고 침탈, 농성 중인 해고노동자들을 깡패와 백골단 등이 쇠파이프와 각목과 의자 등으로 마구 두들겨 패며 끌고 내려와 경찰들에게 인수, 경찰은 두들겨 맞아 녹초가 된 해고노동자들을 전경버스에 싣고 연행, 이를 보고 항의하며 건물에 접근하는 대오 200여 명을 백골단이 강제연행. 한국노총건물 밖으로 밀려난 대오와 경찰 간 투석전 전개, 이 과정에서 경찰들이 던진 돌과 쇠파이프에 맞아 수십 명이 다쳐 병원으로 후송됨.

19:25 연행되고 남은 대오 여의도 민주당사 전해투 농성장에 집결해 대책 논의. 전투경찰이 여의도 민주당사 앞을 막고 농성장으로 들어오는 사람 연행

19:30 농성장에서 전해투, 지원대책위, 전국연합, 학생 등이 연석회의 열어 대책 논의

19:40 럭키금성그룹 천막농성장도 경찰이 강제철거 중

 

전국 해고노동자 비상결의대회

514일 한국노총 점거투쟁에 대한 경찰의 폭력적 침탈에 전해투는 516일 오후 3시 영등포역 앞 광장에서 구속수배해고 노동자 원상회복을 위한 전국 해고노동자 비상결의대회를 열었다. 나현균 전해투 선전국장의 사회로 식전 풍물공연, 김은천 전해투 상황실장의 투쟁 경과보고, 강중철 전해투 집행위원장의 대회사, 권영길 전노대 공동의장과 박인도 원진레이온 비대위원장의 연대사, 전해투 지원대책위 공동대표 지선스님과 이천재 서울연합 의장의 격려사, 결의의식과 박정수 대우정밀 해고노동자의 결의문 낭독이 이어졌다. 참석자들은 집회를 마치고 전경련까지 거리행진을 벌였다.

전해투는 한국노총 점거투쟁을 한국노총 간부들과 경찰이 강제 진압한데 항의해 15일과 16일 해고자와 학생들이 잡혀간 영등포·양천·강서 3개 경찰서를 항의방문했다. 16일부터 날마다 오후 6시에는 한국노총회관 앞에서 규탄 집회를 열었다. 16일 집회 때 경찰 600여 명이 한국노총회관 주위를 에워싼 채 해산을 강요했으나 집회를 강행해 89명이 연행됐지만, 서울지역 노동자들과 학생들은 매일 70~150명씩 모여 집회를 이어갔다.

521일 오후 2시 종묘공원에서는 원진비대위가 원진레이온 노동자 재취업약속 이행을 촉구하는 집회를 계획하고 있었는데 원진노동자 재취업 해고자 원직 복직 한국노총경찰 폭력 만행 규탄 등을 내걸고 원진비대위와 전해투가 함께 집회를 열었다. 또 각계각층에서도 규탄성명을 발표했다. 업종회의 소속 건설노련을 비롯한 사무금융노련, 전문노련 등 연맹들은 한국노총의 반노동자적 작태를 규탄하는 성명을 발표해 모든 연행자를 즉시 석방하고 공개 사과하라고 요구했다. 조선노협도 16일 성명을 발표해 이미 노경총 밀실 합의로 전 노동자의 분노를 끓게 했던 한국노총 지도부는 이번 폭력사건을 계기로 스스로 해체를 선언해야만 할 것이라고 주장했다.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 인권위원회, 전국노동단체연합 등 인권단체와 노동단체도 성명을 발표했다.

 

병역특례해고노동자들의 투쟁

한편 병역특례 해고노동자들은 특례보충역제도의 불합리성을 제기하며 1993년에 38일 동안 단식농성 등 투쟁을 벌였는데도 문제가 해결되지 않자, 199441병역특례 해고노동자의 수배해제와 원상회복을 위한 병역특례 해고노동자 특별위원회’(병역특위, 위원장 박정수)를 구성했다.

병역특위는 4167차 전국해고노동자대회에서 결사 투쟁을 선포하고 여의도 민주당사에서 농성을 벌이며 청와대 등 정부기관과 소속 그룹사에 면담과 문제해결을 촉구했다. 4월부터 사회 각계각층 인사들을 조직해 병역특례 해고노동자들의 원상회복과 원직 복직을 촉구하는 서명운동을 펼쳐 11월까지 노동계, 정치계, 의료계, 종교계, 학계, 여성계 등 총 505명이 서명했다. 5~6월에는 집중적으로 청와대, 국방부, 병무청에 탄원서를 발송, 57일 민주화를위한교수협의회(민교협)를 시작으로 616일 국회의원 78명의 탄원서를 끝으로 마무리했다. 그러나 탄원서는 병무청으로 이첩됐고, 병무청은 행정조치 불가라고 회신했다.

전해투 지원대책위원회(공동대표 계훈제 외 14)5209시 마포 민주당사에서 기자회견을 열어 병역특례 해고노동자 원상회복을 촉구했다. 이날 기자회견에서 홍근수 집행위원장(향린교회 목사)43백여 명의 시국 관련 청년, 학생, 양심수들에 대해서는 과거청산과 사회활동 참여 보장이란 차원에서 군 문제가 소급적용된 상황이라며 이미 해당 사업장에서 5년 이상 근무한 병역특례 해고노동자들에게만 유독 원상회복이 요원한 상태라고 밝혔다. 이어 우리는 사회 각계 인사 476명이 서명운동에 참여해 이를 토대로 현 정권이 병역특례 해고노동자들의 원상회복에 관한 조치를 시급히 취할 것을 강력히 요구한다고 말했다.

이날 기자회견에 참석한 30여 명의 전해투 소속 해고노동자와 학생은 용산구 후암동에 있는 병무청을 방문해 항의서한을 전달했다. 이들은 박정수 병역특회 위원장(대우정밀 해고노동자)이 병무청장을 만나러 간 사이 강제징집 자행하는 병무청은 각성하라등의 구호를 쓴 몸벽보와 머리띠를 두르고 병무청 앞 정문에서 항의농성을 벌였다. 한편 박 위원장은 병무청장을 만나지 못했으며 대신 특례과장을 만나 청장과의 면담 날짜를 23일에 알려주겠다는 약속을 받아냈다. 그러나 특례과장은 법 테두리를 떠났고 해결할 수 없다는 견해를 밝혔다. 이날 이후 병역특위는 그동안 서명운동의 성과를 모아 병무청, 청와대에 대책위와 함께 항의 방문해 직접면담을 요구하는 등 원상회복을 위한 사업을 진행했다.

199338일간의 단식삭발 투쟁, 사회 각계각층의 탄원서 발송과 서명운동 등 병역특례 해고노동자 원상회복을 위해 지속적인 투쟁을 벌인 결과 525일 대우그룹과 해고자복직에 합의하기에 이르렀다. 1991년 봄 임금인상 투쟁과 관련해 해고됐던 대우정밀 노동자 35명이 61일 대우그룹 내 타 계열사 입사형태로 복직하게 된 것이다. 이날 대우정밀 해고자를 대표한 박종석(대우정밀 해고자 복직실천협의회 의장), 문영만, 윤명원 씨 등 3명과 대우정밀노동조합 윤승근 위원장이 대우그룹 기획조정실 박태웅 전무와 총 13개 항으로 된 병역특례해고자의 군 문제해결 및 복직을 위한 별도합의서에 서명함으로써 대우정밀 해고자복직 문제는 일단 해결의 실마리를 찾게 되었다. 10명의 병역특례해고자는 대우조선 특수선 사업부에 입사한 뒤 병역특례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199412월까지 7개월간 휴직 처리하고 생계비 지원을 위해 기본급 100%를 지급받기로 했다.

다만 병역특례해고자 문제는 별도합의서를 통해 그룹, 회사, 노동조합, 해고자협의회 등 8명으로 병역문제 해결을 위한 특별대책위원회를 구성하고 한 달에 한 번 이상 대책회의를 개최하기로 했으며, 노사공동 명의로 병무청, 국방부, 노동부 등 관련 단체에 탄원 및 단체장 면담을 통해 병역법 시행령 개정을 추진해서 병역특례해고자들의 병역문제를 해결하기로 했다. ‘복직은 됐지만 군 문제는 아직 남아 있는 셈이었다.

대우정밀 병역특례 해고노동자들이 19945월 복직에 합의함으로써 군 문제해결을 위한 활동에 탄력이 붙은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군 문제해결을 위해 청와대, 국방부 등에 탄원서를 내고 해결을 촉구했지만 이 문제는 또다시 병무청으로 이첩됐고, 병무청이 또다시 행정조치 불가라는 입장을 되풀이함에 따라 이후 투쟁의 불씨를 남기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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