용산을 돌아보다 - 철도용산병원 해설_나영선(노동자역사 한내 답사팀장) 용산 대로 빌딩 숲 사이에 눈길이 머무는 옛 건물 하나가 있다. 중앙대학교병원으로 쓰였던 곳이다. 중앙대학교병원이 2011년 흑석동 병원으로 통합 이전했다. 이곳은 2008년 근대문화재로 등록된 용산철도병원이었다. 용산철도병원은 1907년에 여기 철도 관사 단지 한복판에 세워졌던 건물이다. 화재가 두 번 발생했다. 현재 남아있는 철근콘크리트 건물은 1928년에 새로 지어 개원한 곳이다. 다시 서울에는 큰 병원 세 개가 있었는데 경성제국대학 부속병원, 일본적십자사 조선본부병원, 그리고 이곳 철도병원이었다. 왜 병원이 필요했을까? 왜 이곳 용산에 대규모 병원을 세웠을까. 노동자들이 많이 다치기 때문이었다. 기록에 의하면 1년에 150-200명이 순직했다. 러일전쟁을 치르고 일본제국주의가 대륙으로 뻗어나가는 데 철도가 그만큼 중요했기 때문이다. 한편으로는 병들고 죽어가는 노동자들의 불만을 잠재울 필요가 있었을 것이다. 철도가 운행되기 위해서는 기관수, 역 근무자, 보수하는 인력 등 보이지 않는 일을 하는 노동자들이 필요하다. 당시 보수와 정비를 담당하는 철도 기관인 서울용산공작소는 영등포와 용산에 있었다. 길건너에 용산 정비창이 위치해 있었다. 아파트 8천 세대를 짓기 시작한 바로 그곳이다.
용산은 거대한 일본군 기지를 바탕으로 만들어진 곳이다. “대한제국 황실의 안녕과 영토보전의 위험이 있을 경우........대한제국은 적극 편의를 제공 할 것” “대일본제국정부는 .......... 군략상 필요한 지점을 임기수용할 수 있을 것” 이라는 1904년 한일의정서 4조를 근거로 한 것이었다. 하지만 일제는 이 땅을 약탈한 것이다. 용산 300만평뿐 아니라 평양과 신의주를 합쳐 천만 평에 달하는 땅을 일제는 빼앗았다. 전체 보상 책정 가격은 20만 원이었다. 용산은 평당 30전. (당시 신문지 한 장 가격이 7전이었다.) 물론 대한제국도 적정 보상가를 조사한 바 있다. 용산만 89만원은 있어야 적절하다고 했다. 하지만 일제는 받아들이지 않았다. 이곳은 1200가구에 달하는 촌락이 있던 곳이다. 누가 대대로 살아온 땅에서 순순히 나가겠는가. 한성부를 찾아가 정당한 보상을 해 달라, 이사를 위한 말미를 달라고 청원했다. 우리를 살려달라고 애원했다. 조선정부의 답은 어쩔 수 없다는 것이었다. 100여 년이 지난 용산에서 똑같은 일이 벌어지지 않았는가. 재개발에 밀려난 용산 철거민들의 요구는 살게 해달라는 거였다. 2009년 이명박 정부는 새벽에 위험물질이 가득 찬 옥상에 경찰특공대를 투입해 강제 진압을 해 이 과정에 철거민들이 죽었다. 임무를 수행하던 힘없는 경찰도 죽었다. 이들의 죽음이 어쩔 수 없는 죽음인가. 11월 7일 토요일, 은평노동인권센터 주최 인문학 교실의 마지막 프로그램으로 5시간에 걸친 용산 답사를 했다. 우리는 어쩔 수 없다며 수탈한 이들과 어쩔 수 없다는 것에 맞선 사람들의 흔적을 찾아보았다. 나영선 노동자역사 한내 답사팀장의 안내로 17명이 함께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