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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동자역사 한내 뉴스레터 창간준비 제3호 (2008년 6월 2일)
노동자 자기역사 쓰기
나의 두 번째 인생 - 공무원에서 노동자로 다시 태어난 계기
글쓴이 - 원주시청 해고자 권승복 (전 전국공무원노조위원장)
나는 원주 토박이다. 1956년 강원도 중소도시인 원주에서 태어나 초중고 대학은 물론 직장, 결혼에 이르기까지 50여 년 동안 지역에서 단 한치도 벗어나보지 않았다. 내가 태어난 시기는 한국전쟁의 종료임을 알리는 휴전이 선포된 지 몇 년 되지 않은 어려운 시기였다. 여느 평범한 사람들처럼 지역 토착민으로서 자연인으로 살아왔다.
고등학교를 졸업한 직후인 1976년에 갓 스무 살의 나이로 원주시청에 지방공무원으로 임용되었다. 2004년도에 공무원노조 파업으로 인하여 해고되기까지 공무원 생활만 30년을 했다. 외형뿐 아니라 내부 의식까지도 전근대적이고 보수성이 강한 전형적 공무원상에서 조금도 비껴나지 않는 사람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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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 공무원 권승복)
이 나라의 대부분 공무원이 그렇듯이 나름대로의 애국관과 조국에 대한 충성심을 가지고 위에서 시키면 시키는 대로 열심히 일만 해야 했다. 관료조직의 조직원으로서의 위치를 한시라도 망각하면 안 되는 공무원의 전형적인 모델을 연상하면 틀림없이 나일 게다.
이렇게 관료적이기만 했던 내가 노동자의 입장으로 사물을 바라보고 평가 할 수 있는 사람으로 변했다. 원주시공무원직장협의회 초대 회장으로 선출된 것이 인식변화의 결정적 계기였다. 원주시공무원직장협의회는 김영삼 정권이 OECD가입 조건의 하나로 대한민국 공무원에게 노동조합을 허용한다는 전제 아래 2000년 11월 29일에 설립되었다.
초대 회장으로 선출 되고 조직 확대 사업을 벌이면서 무료한 공무원 생활이 끝났다. 강원도내 시군의 지부 조직 확대로 9,000여 조합원의 강원도공무원직장협의회총연합(강공련) 출범, 정부와 경찰의 탄압을 뚫고 고려대학교로 진입하여 성사시킨 2002년 3월 23일 전국공무원노동조합 창립, 노동조합 창립이후 계속되는 2002년 11월 4일 연가파업, 2004년 11월 15일 총파업, 2006년 4월 20일 민주노총 가입 등 일련의 활동 속에 노동자 계급의 관점에서 바라보는 시각과 안목이 점점 축적되었다. 나 스스로도 하루가 다르게 변화함을 직접 피부로 느낄 수 있었던 때였다.
원주시공무원직장협의회 창립시기였던 2000년 당시 원주시의 공무원들은 노동조합이란 단어조차 귀에 익숙지 않았다. 회장도 직장 내의 친목단체의 대표정도로만 생각하고 인기투표 하듯 선출 했다. 자격이 부족하다라며 고사하는 나의 등을 떠밀리며 맡겨진 회장의 임무이지만 기왕에 충실하려 노력했다, 이렇게 해서 시작된 공무원직장협의회 회장에서 현재의 노조활동가에 이르기까지, 노동조합의 설립과 각종 현안에 대한 투쟁, 민주노총의 가입 활동 등에 주도적 역할을 할 수 있는 내 자신과 주변 환경의 변화는 ‘사람이 어떠한 계기와 기회로 인하여 이렇게 사고와 인식이 획기적으로 바뀔 수 있구나’ 라고 스스로 생각해도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지난 과정에서 하위직 공무원의 목소리를 낼 수 있는 용기가 생겼다. 권력과 자본에 맞서 이 한 몸 희생할 수 있다는 마음의 각오도 생겼다. 소수의 목소리도 중요하다는 인식도 가졌고, 노동자 민중과 함께한다면 이 세상 어디에서도 승리 할 수있다는 자신감도 생겼다. 신자유주의를 철폐하고 인간이 평등하고 인간답게 살 수 있는 방법에 대해서도 인식을 새로 하는 계기가 되었던 것이다.
또한 ILO국제노동기구 가입 회원국 178개국 중 대한민국과 대만의 2개국만이 공무원노조를 인정하지 않은 국제적인 사실도 새삼 알게 되었으며, 노동자는 국경과 이념을 초월하여 전 세계 노동자는 하나가 되어야 한다는 절대 절명의 진리도 깨우치게 되었다.

(사진-투쟁하는 노동자로 다시 태어난 권승복)
이런 인식의 변화를 겪으면서 공무원직장협의회 활동으로는 어느 정권에서도 해결하지 못했던 공직사회 개혁과 부정부패를 척결하는 데는 한계가 있다고 판단, 2002년 3년 23일 역사적인 전국공무원노동조합을 출범시켰다. 그리고 전국의 14만 조합원으로 발돋움하는 조직으로 확대하는 대한민국의 대표적 공무원노조로 자리매김 하는데 한축을 담당하는 것을 마다하지 않았다.
2002년 대한민국 공무원의 최초 파업 때는 중앙의 임원으로서 총파업 기자회견직후 경찰의 원천봉쇄 속에서 연행되어 서울구치소에 처음으로 구속되었다. 2004년에는 공무원 연가파업에 참여하여 2차 구속 되어 실형을 선고 받고 원주교도소를 거쳐 춘천교도소에 수감되기도 했다. 그동안의 집시법 등 벌금형 까지 합하면, 이제는 주변에서 흔치않은 전과경력을 가진 공무원노동자로 규정되어 있음이 새삼스럽지도 않다. 공무원노동조합만이 국가의 부당한 공권력 남용에 대항하고 초법적인 월권행위에 적극대처 할 수 있는 유일한 대안이라는 데는 추호도 의심의 여지가 없다.
아무리 생각해 보아도 공무원노조 활동을 하게 된 2000년 11월 29일 이전인 45년의 기간과 그 이후 8년의 기간을 가치로 비교해 본다면 노동조합의 활동기간인 8년의 가치가 너무나 소중했다는 말로 대신 할 수 있겠다.
지금은 암투병으로 병상에 계시는 차봉천 초대 위원장을 만나게 된 것도 위 기간이었고 이 땅의 민중이 인간답게 살 수 있는 세상을 만들기 위하여 각 분야에서 활동하고 있는 진보적인 동지들과 공무원노조 조합원을 만날 수 있었던 좋은 기회도 주로 이때였던 것 같다.
공무원노조 1기 부위원장과 2기 부정부패추방운동 본부장을 거쳐 3기에는 위원장으로서의 역할로 공무원노조의 가장 중심에 서있었던 사실 만으로도 평범한 공무원사회에서의 상식으로는 상상조차 하기 힘든 변화의 길이었다고 감히 말하고 싶다.
한때는 국가의 지시에 맹종만 했던 극히 평범한 공무원이 의식을 가진 공무원노동자로 변하게 된 과정에는 이 나라의 정책결정에 참여하고 있는 고위 관료들과 정치치인들도 한 몫 했음이 분명하다. 시대는 변했는데 공무원을 하수인으로 알고만 있었던 기존의 틀을 깨지 못하고 있었기 때문에 더욱 그랬다.
이 땅의 노동자 역사가 선봉에 서 있던 노동자계급의 선배들과 노동열사들에 의해서 움직여졌듯이 나 자신 또한 후일 우리 후배공무원 노동자들에 의하여 평가를 받을 수 있을 만큼만 기억되면 좋겠다는 소망을 가지고 있다.

(사진 - 4대 요구 쟁취 단식 농성장에서 이주노동자들과 함께한 권승복)
지금도 옆에서 힘을 보태주며 의지하고 투쟁할 수 있도록 함께하는 전국공무원노조 조합원, 그리고 현장에서 함께하고 있는 연대단체의 동지들이 있기에 미래에 희망이 되고 등불이 되리라 믿는다.
이 땅의 공무원노동자와 힘없는 민중에게 빛과 소금이 될 수 있는 역할이 있다면 마다하지 않겠다는 결의를 다시 한번 다져 본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