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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 우리들의 햇불 이용석 열사여!
첨부파일 -- 작성일 2008-10-06 조회 1113
 

뉴스레터 [한내] 2008. 10월 (제2호)

글 : 이승원 (한내 사무처장) / 사진 : 근로복지공단비정규직노조

이달의 노동열사  아, 우리들의 햇불 이용석 열사여!

2003년 10월 26일 근로복지공단비정규직노동조합 광주본부장 이용석은 종묘공원에서 열린 ‘비정규직 차별철폐, 정규직화, 권리보장 입법 쟁취를 위한 전국비정규노동자대회’에서 상징의식을 마치고 ‘대회 결의문’을 낭독하는 순간 시너를 온 몸에 붓고 분신하였다.

다른 사람들은 그가 비정규직 중에서도 직접고용 비정규직인 계약직이었고, 정규직이 되는 사내시험 응시제도도 있는 그나마 안정적인 노동부 산하 공단 직원이라는 점에서 분신까지 할 이유가 있었을까 하는 의문들을 제기하기도 한다.

그가 살아온 삶을 돌아본다면 스스로 목숨을 끊을 이유는 없을 것이다. 그리고 그의 노동조합 활동경력은 6개월 가량의 지역본부장 생활이 다였다. 공부방까지 하며 열심히 살아가던 그가 노무현에게 보내는 편지를 완성하지 못하고 자신의 몸에 불을 질렀을까? 그것은 바로 희망이 없었다는 것이며, 단지 자신의 처지에 대한 문제가 아니라 자신이 횃불이 되어 이 사회에 지른 불이었던 것이다.

대학 졸업과 함께 맞은 IMF는 사회문제가 자신과 어떻게 연결되는지 분명하게 알게 하였고, 노동조합을 결성하며 겪어야 했던 좌절과 분노! 자신이 야학에서 가르쳤던 아이들에게 용기를 가지라고 이야기할 수 없었던 이 세상! 함께 했던 조합원들의 나약함과 배신! 모든 것을 용서하고 투쟁의 한길로 모이도록 자신을 도화선으로 바쳤던 것이다.

 

이용석 열사는 1972년 11월 2남 5녀 중 넷째로 전남 신안군 흑산도면 상태도에서 태어났다. 그 당시 60여 세대가 넘게 살던 섬이지만 지금은 주민 30여 분만 사는 작은 섬이다. 그곳 상태도에서 초등학교 1학년으로 섬 생활을 정리하고, 목포로 유학와 고등학교까지 목포에서 생활한다. 상태도 사람들은 그를 작고 깡마른 체구로 기억하지만 건강한 체질에, 얌전하고 말없는 성격, 그리고 책 읽기를 즐겨하는 이용석 열사는 목포 생활 초기에는 도시 아이들의 촌놈이라는 놀림과 왕따에 적응하지 못하기도 했다. 중고교 시절에는 상위권 성적의 모범생이었다. 어린 시절부터 책 읽기를 좋아하고 글쓰는 것이 희망이었지만, 집안 형편상 취업이 잘 된다는 금속공학과를 선택했다.

그러나 군대를 다녀오고 대학을 졸업하자 IMF로 취업이 어려운 상황이었다. 하는 수 없이 술도매상을 하던 친구 일을 돕기도 하고, 건축업을 하던 큰 매형을 쫓아다니며 건설 현장을 다니기도 했다. 그러던 중 2000년부터 근로복지공단 목포지사에서 일용직으로 근무하게 되었고, 2002년 1월엔 계약직이 되었다. 대학시절 동아리 회장도 하고, 계약직으로 일하는 중에도 공부방에서 학생들을 가르치며 열심히 살았다.

2003년초 근로복지공단에 비정규직 노동조합이 만들어지자 6월부터 광주본부장을 맡아 전주부터 바다 건너 제주까지 다니며 동료들을 만났다. 그에겐 대충이란 없었다. 깡마른 체구에 자주 사람들을 즐겁게 웃기기도 하지만 항상 진지했고 따듯한 마음을 지닌 청년이었다.

낮에는 공단에서 일하고 밤에는 공부방에서 성심을 다해 아이들과 함께 했다. 거기에 휴가와 휴일에는 노동조합 간부활동까지 1인 3역을 맡아 힘겨웠지만, 항상 웃는 얼굴로 최선을 다했다. 하지만 열사와 동지들의 노력에도 노동조합 활동은 도와주는 사람보다는 방해와 탄압하는 사람들이 더 많았다.

그 첫 번째 방해는 공단 정규직 노동자들의 노동조합이었다. 근로복지공단노동조합에 두 번에 걸쳐 내용증명으로 가입원서를 제출했으나 가입결정을 대의원대회로 유보하고 침묵과 무시로 일관하였다.

두번째는 이 땅의 노동행정을 담당한다는 노동부였다. 악법일 뿐 아니라 근로복지공단노동조합에 비정규직 조합원이 한명도 없었음에도 복수노조 조항을 들어 설립신고서를 반려하였다. 공단노동조합과 투쟁을 통해 조직대상 제외라는 규약 변경을 확보한 근로복지공단 비정규노동자들은 2003년 4월 21일 드디어 설립신고증을 따냈다.

세번째는 노동부 산하 공단의 사용자가 벌인 교섭회피였다. 이사장이 사용자가 아니라며 버티는 사측에 다시 한번 분노할 수밖에 없었으며, 이용석 열사는 교섭회피에 대항하여 8월부터 노동부 앞 1인 시위를 뙤약볕 아래서 쉬지도 않고 진행하여 몸에 수포가 생기고 일사병으로 쓰러지기도 하였다. 사측의 교섭회피와 어렵게 교섭에 임해서도 진전 없는 상황을 보며, 노동조합은 파업을 결정하게 되었고 파업 전날 비정규직노동자대회에서 열사는 분신하였다. 그리고 5일 만인 2003년 10월 31일 한강성심병원에서 운명하였다. 열사는 최초로 비정규노동자 당사자로서 자신의 생명을 내던져 불합리한 차별을 이 사회에 고발하고 동지들의 활화산 같은 단결투쟁을 촉구하였다.

근로복지공단비정규직노조는 41일간의 파업투쟁을 통해 단체협약을 체결하고, 정규직 전환의 단초를 열었으나, 파업 이후 내부시험을 통한 정규직 전환이라는 사슬을 끊지 못해 많은 동지들이 정규직이 되었지만 200여 동지들이 해고되는 아픔을 겪어야 했다.

2003년은 배달호 열사를 시작으로 김주익, 이용석, 이해남, 이현중, 곽재규 열사까지 소위 열사정국 이라 칭해졌으며, 11월 9일 노동자대회에 화염병과 쇠파이프가 등장하는 등 노동자의 분노가 폭발했던 시기였다. 이용석 열사의 분신으로 촉발되었던 비정규직 철폐투쟁은 전체 노동자들의 단결투쟁으로 확산되지 못하고 채, 열사와 희생자들만 늘어나고 있는 형편이다.

관련 자료

『누리하제 - 말고 깨끗하게 산 사람들』중「우리들의 횃불 이용석」, 누리하제, 2004.

『아름다운청년 이용석노동열사 정신계승 투쟁자료집』, 근로복지공단비정규직노조, 2004.

『날개달린 물고기』, 이인휘, 삶이보이는창, 20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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