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몽구 몽구 조몽구!
송시우 (노동자역사 한내 제주위원회 부위원장)
1945. 8. 17. 여운형 조선건국준비위원회(건준) 구성 발표
1945. 9. 6. 박헌영 건준 대신 조선인민공화국(인공) 설치 발표
1945. 9. 11. 박헌영 중심 조선공산당 재건
1945. 9. 22. 오대진을 위원장으로 하는 제주도인민위원회 결성
1945. 9. 28. 오끼나와 주둔 미군 1개 연대 병력 제주도 상륙, 일본군 사령관 가스끼 중장으로부터 항복 조인
1945. 9. 29. 군정청 설치, 제주도 군정장관 스타우드 소령 취임
1945. 11. 20. 전국인민위원회 대표자회의 개최, 제주도에서 오대진, 김정노, 이운방, 최남식 4명이 대표로 참석
1946. 2. 15. 여운형, 박헌영, 백남운, 허헌을 의장단으로 하는 조선민주주의민족전선(민민전) 결성, 중앙상임위원 391명 중 제주도 대표로 강문석, 오대진, 송성철 3명이 제주도 대표. 경제대책위 41명 중 제주대표 고준석, 부병준 2명. 사회대책위 5명 중 고경흠 1명. 노동문제연구위 14명 중 강문석 1명 등이 참여.
1946. 5. 4. 정판사 사건
1946. 9. 7. 미군정청 조선공산당 간부 체포령.
1946. 11. 23. 조선공산당(대표 박헌영), 인민당(대표 여운형), 신민당(대표 백남운)이 합당 남조선노동당(남로당) 결성
1947. 2. 12. 남조선노동당 제주도위원회 결성. 위원장 안세훈, 부위원장 이신호, 총무부장 김영홍, 조직부장 조몽구, 선전부장 김용해, 재정부장 이창옥, 부녀부장 좌창림, 청년부장 김은환, 농무부장 김용관 선출.
1947. 2. 23. 조선민주주의민족전선(민민전)제주도위원회 결성. 의장단 안세훈, 현호경, 집행위원 김정노 등 33명, 사무국장 김정노, 선전부장 좌창림, 문화부장 김봉현 선임.
1947. 3. 1. 3?1절 기념대회
1947. 3. 10. 민?관 총파업 이후 검거령으로 1948. 1월까지 핵심당원 221명이 검거됨
1948. 2. 20. 조천면 신촌리에서 도당 간부와 면당 책임자 19명이 모여 회의를 가짐. 조몽구, 이종우, 김달삼, 강대석, 이삼룡, 김두봉, 고칠종, 김양근 등이었는데 김달삼은 이대로 있다가 조직이 와해되어 5?10단선 저지투쟁이 어렵다고 하자 조몽구 등은 무력투쟁은 신중을 기해야 한다고 했으나, 12:7로 무력투쟁 봉기가 가결됨.
제주4?3항쟁의 전야다. 오늘 이야기하고 싶은 인물이 남조선노동당제주도당 조직부장 조몽구다. 조몽구는 경성공립제일고등보통학교 4학년 때 반일투쟁으로 동맹휴학을 선동하여 퇴교 처분을 받았다. 21세 때 1928년 8월 일본으로 건너가 와세다대학 전문부 정치과에 입학하여 수학하다가 학비를 마련하지 못해 중퇴하였다. 이후 오사카의 공장 노동자로 있으면서 오사카 조선노동조합에 가입하여 줄곧 항일 노동운동에 투신하였다.
1929년 12월 14일 재일본 조선노동총동맹 대표자회의가 오사카에서 개최될 때 김문준과 더불어 오사카 조선노동조합의 대표로 참석하여 재일본 노동총동맹을 해체하고 일본노동조합 전국협의회에 가맹하기로 결정하였다.
1931년부터 전협의 화학노동조합 오사카지부 책임자로 취임하였고, 같은 해 6월 하순부터 전국 산업별 노동조합 오사카지부 협의회의 책임자가 되었다. 이와 같은 활동으로 인해 1931년 7월 일본 경찰에 검거되어 오사카지방재판소에서 치안유지법 위반죄로 징역 6년형을 언도받았다. 이후 징역 5년형으로 감형되어 토쿠시마 형무소에서 1935년 12월까지 복역했다. 해방 직후 제주도에서 제주도인민위원회 표선면위원장, 남조선노동당 제주도당의 조직부장, 부위원장 등을 역임하였다. 신촌회의 때 무장항쟁에 반대했지만 한라산에 들어가 활동하다가 1948년 8월 북한으로 넘어갔다. 한국전쟁 때 남한 출신 의용대장으로 내려왔다가 부산에서 1951년 9월 경찰관에 의해 체포되었고, 1953년 3월 5일 대구지방법원에서 징역 10년형을 선고받아 옥고를 치르고 출옥한 뒤 고향 성읍리에서 기거하다 1973년 12월 15일 사망하였다. 영주산 중턱 성읍리 공동묘지가 조성되고 1호로 묻혔다가 2006년 9월에 성산읍 수산리 지경 가족묘지로 이장되었다. 4?3 학살의 광풍속에서 주모자의 가족이라는 이유 하나로 그의 가족들 아내와 4남매는 처참하게 학살당했고 후손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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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해 타계한 소설가 오성찬씨의 역작 ‘한 공산주의를 위하여’는 그를 모델로 한 소설이다. ‘몽구 몽구 조몽구’하면서 동네에서 놀림받았던 ‘주명구’ 그의 위패를 초창기 4?3위령제에 올렸다는 이유로 소동이 있었던 시절도 있었고, 4?3평화 공원내에도 마찬가지다.
오사카 노동운동의 대부 김문준과 더불어 오사카 지역의 사화운동을 기리기 위해 만든 대판사회운동현창탑에 이름을 올린 조몽구, 둘 다 제주도 출신이면서 한국인은 이들 밖에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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