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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7년 코리아타코마노조 설립 투쟁
⦁ 시기 : 1987년 8월 9일
코리아타코마는 마산 수출자유지역 내에 몇 안 되는 남성 사업장으로 방위산업체였다. 1986년부터 이흥석을 중심으로 노조를 결성하기 위한 모임을 1년 정도 진행했으며, 이들을 중심으로 1987년 8월 9일 밤 11시 국술원 마산본관에서 42명이 참석한 가운데 노동조합 창립총회를 갖고, 위원장에 이흥석, 부위원장에 이민철, 사무장에 임재형을 선출했다. 이들은 그날 밤을 여인숙에서 보내고 다음 날 아침 오전 6시 시청에 도착하여 오전 9시까지 시청 사회과 옆 화장실에 숨어있다 9시 정각에 서류를 접수시켰다. 이어 중식시간을 이용, 생산직 노동자들 600여 명이 참여한 가운데 제1차 보고대회를 개최했다.
코리아타코마는 다양한 직종과 부서로 편제되어 있었다. 철판을 잘라 각종 골재와 빔을 소조립하는 가공공장, 선박 내 주방기구 등을 생산하는 의장공장, 전기시설을 설치하는 전장공장, 배관파이프를 설치하는 배관공장, 엔진을 설치하는 기관공장, 선반과 밀링으로 각종 부품을 깎는 기계공장, 도장공장, 탑재부, 알루미늄공장 등 생산직 외에도 배를 설계하는 설계부 등 기술사무직들도 있었다. 그럼에도 코리아타코마노동조합 결성 과정에서 가장 특징적인 것은 생산직은 물론이고, 기술 사무직의 대리급까지 노동조합을 함께 했다는 점이다. 이는 노동조합 결성 준비 과정에서부터 사무기술직과 함께 한 결과였다.
한편, 8월 10일 오후 5시30분에는 ‘노동조합 결성 제2차 보고대회’를 개최했다. 2차 보고대회에 참여한 생산직 노동자들은 기술·사무직 노동자들의 참여를 외친 반면, 설계부장을 필두로 한 관리자들은 동참을 가로막고 있었다. 이때 노조설립 준비를 함께 했던 나현균 대리를 중심으로 이러한 봉쇄를 뚫고 두 줄로 보고대회에 참여함으로써 사무기술직과 생산직 노동자들 사이에는 확실한 믿음이 싹트게 되었다.
그 뒤 방위산업체임에도 8월 13일 노조 현판식을 마쳤고, 8월 17일부터 단체협약 교섭에 들어가 노동자들의 확고한 단결로 3일 만에 교섭을 타결시킨다. 이들의 단체협약 타결사항 중 제12조 ‘조합간부의 활동시간’을 보면 코리아타코마노동조합이 이후 어떻게 마창지역의 핵심사업장이자 마창노련의 중심 사업장으로 투쟁을 이끌어갈 수 있었는지를 알 수 있다. 제12조에는 “회사는 비전임 조합간부(임원 전원, 운영위원 6명, 상집위원 2명)에 대해 조합의 요청에 따라 정상과업 근무 중 업무와 관계없이 자유로이 조합활동 시간을 부여한다.”고 돼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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