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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세아스와니노조의 일본출정 투쟁
시기 : 1989년 12월 22일 ~ 1990년 3월 4일
아세아스와니의 폐업
스키용 장갑을 주로 생산한 아세아스와니는 이리(현재 익산시)에 위치하고 있었다. 이 회사는 1970년대 한국에 진출한 외자기업으로 면세와 노조 금지라는 특전이 보장된 수출자유지역에 설립됐다. 1972년에는 마산에 한국스와니, 1976년에는 이리에 동양스와니, 1978년에는 이리에 아세아스와니 등 3개사를 설립해 생산을 집중했다. 아세아스와니에는 최저임금법에도 미치지 못하는 살인적인 저임금과 강제 잔업이 횡행했다. 1984년 김덕순이 가톨릭노동청년회(JOC) 회원이라는 이유로 해고되는 등 노동운동에 대한 탄압도 노골적이었다. 이후 국내 수출자유지역의 특혜기간이 지나고 노동조합이 결성되어 임금이 상승하기 시작하자, 1988년 동양스와니를 폐쇄하고 임금이 낮고 노동쟁의가 없는 중국 상해로 진출해 4개사를 설립했다.
아세아스와니노동조합은 1987년 4월에 설립됐다. 설립 당시 조합원 중 여성은 176명, 남성은 36명이었다. 노동조합을 결성해 최저임금을 쟁취했고, 인원감축이나 폐업에 대해서는 노사합의가 있어야 한다는 단체협약도 체결했다. 1989년 9월 상순에는 일본 사장이 내한해 전체 노동자 앞에서 “경영사정이 어렵지만 지금부터 잘 될 것”이라며 격려하기도 했다. 그러나 바로 뒤인 9월 20일, 회사는 자재와 기계를 몰래 빼돌리다 노조에 발각돼 저지당했다. 이어 10월 1일 돌연 “적자경영으로 공장을 폐쇄한다”는 해고통지 팩시밀리가 날아왔다. 폐업․인원감축 등 ‘조합원의 생계에 절대적 영향을 미치는 사항’에 대해 노조와 합의하기로 했던 단체협약을 무시하고 하루아침에 230명의 노동자를 해고한 것이다. 회사는 폐업의 이유를 경영적자라고 했지만, 이는 이윤을 스와니 본사가 가져간 후 장부상으로 조작한 것이었다. 갑작스러운 폐업통지에 맞서 노동자들은 공장에서 농성에 들어갔다. 10월 4일, 전 조합원들이 이리수출자유지역에서 가두 시위를 전개하고, 10월 5일에는 노동부에서 전북노련과 함께 전원이 항의농성에 돌입했다. 10월 21일에는 주거래은행인 전북은행에서도 농성에 돌입했고, 10월 24일에는 외자기업 철수문제로 투쟁하고 있던 9개 노조와 함께 공동투쟁을 전개하기 시작했다. 노동부 농성 2일째인 10월 25일, 경찰은 노동부와 회사 양쪽에서 농성 중이던 노동자들의 강제 해산을 시도해 15명이 다치기도 했다. 이후에도 대치가 계속됐지만 해결책이 보이지 않는 가운데, 일본으로 도주한 본사 미요시(三好銳郞) 사장은 노조와의 단체교섭을 회피했다. 마침내 노조는 일본 출정투쟁을 결정하고 5명을 일본에 파견하기에 이르렀다.
일본출정 투쟁
일본에 파견한 대표단은 위원장 양희숙(23세), 부위원장 우연희(24세), 조직차장 서소화(22세), 대의원 심미순(20세), 체육부장 김성덕(남자, 20세) 등 5명으로 구성됐다. 대표단이 12월 22일 오사카 공항에 도착하자 ‘오사카 일본·조선 공동투쟁회의’ 노동자들이 기다리고 있었다. 이들의 안내로 곧장 스와니 본사로 찾아가 미요시 사장 등 본사와 1차 단체교섭을 시작했다. 노조는 △해고 철회 △회사 정상가동 △미요시 사장의 공개사과 △미지불 임금 지급 등 네 가지를 요구했다.
1989년 12월 24일 3차 교섭에서 사장이 협약을 위반했고 공장폐쇄 절차가 완료되지 않았음을 인정했지만 교섭은 해를 넘기게 되었다. 1990년 1월 8일 교섭부터 노조측 통역 참여가 허용됐고, 1월 15일에는 미요시 사장으로부터 “노동법과 단체협약을 위반하고 폐업을 통고한 점”에 대한 사과를 받아냈다. 또한 노동자들에게 절실했던 입학동의서, 재직증명서, 구속 중인 문화부장의 석방동의서도 받아내, 봄철 입학 예정자 10명의 입학이 이루어지는 등 교섭은 순조롭게 진행됐다. 대표단의 불굴의 투쟁, 언론과 국회 등에서 정치쟁점화, 지역과 시민·노동자들의 지원이 예상보다 훨씬 광범하게 확산된 데 따른 것이다. 1월 20일에 400여 명의 항의집회 뒤 가진 교섭에서도 회사는 해고 철회, 미지급 임금 완전 지불, 한국에서 노사협의회 개최 등 노조의 요구를 모두 수용하기로 했다. 그러나 다음 교섭에서 회사측은 태도가 돌변해 전날 합의를 깨버린 채 회사 문 앞에 바리케이드를 치고 교섭을 거부했다. 이후 노조와 지원단은 회사 앞에서 교섭 재개를 요구하며 투쟁을 계속하는 동시에 사장 가족들이 간부로 있는 大本敎, 주거래은행에 대한 항의투쟁을 이어갔다. 이렇게 계속된 투쟁으로 회사측이 2월 19일부터 교섭을 재개했지만 조업 재개를 주장하는 노조측과 철수를 주장하는 회사측 사이에 이견은 좁혀지지 않았다.
계속되는 교섭으로 대표단은 물론이고 통역, 지원자들의 피로도 누적됐다. 그러던 중 2월 21일 단체교섭을 마치고 돌아오던 대표단과 통역을 맡았던 고려노동자연합 김희완 위원장이 탄 차가 전봇대를 들이받는 사고가 나서 김 위원장은 중태에 빠졌고, 양희숙 위원장을 비롯한 교섭 대표 3명도 중경상을 당했다. 안타까운 상황 속에서 2월 19일부터 21일까지 교토, 오사카 등에서 대규모 지원·연대집회는 연일 계속됐으며, 오사카 집회에는 1천여 명이 참여해 어려움에 빠진 대표단을 격려했다. 국내에서도 이리와 전주에서 아세아스와니노조와 연대하는 집회를 열어 대표단을 격려했다.
그런데도 미요시 사장은 교섭을 거부하더니, 3월 2일 ‘최종 회답’이라는 제목의 팩스를 통해 “폐업은 합법이며, 철회할 수 없다”는 답변을 해왔다. 3월 3일 다시 교섭에 나섰지만 아세아스와니 노동자들은 회사측으로부터 폭행을 당해 통역자들까지 다쳤다.
그러나 회사측의 강경한 태도에도 한계가 있었다. 연일 계속되는 본사 항의투쟁, 국회의원들의 간담회가 진행되고, 노조가 ‘공장 재가동’에서 ‘생계대책자금 확보’로 요구조건을 후퇴하자 교섭은 하룻밤 만에 타결됐다. 처음부터 요구한 ‘공장 재가동’이 이루어지지는 않았지만 △회사측의 사과 △퇴직금과 미지불 임금 지급 △학비 보장 등이 관철됐다.
투쟁이 끝난 후 양희숙 위원장은 지원해준 동지들에게 다음과 같이 말했다. “이번 투쟁을 통해 우리가 확인한 것은 노동자에게는 국경이 없으며 노동자의 단결이야말로 무엇보다 큰 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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