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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어제는 산업역군 오늘은 산업폐기물-원진레이온 백서_이영기(113호)
첨부파일 -- 작성일 2018-10-19 조회 1250
 

어제는 산업역군 오늘은 산업폐기물

원진레이온 백서

(19938. 원진문제의 올바른 해결을 위한 대책위원회) -

 

이영기(노동자역사 한내 자료국장)

        

 

 

1988년 문송면군의 죽음과 장례위원회의 투쟁은 한국사회에 산재와 직업병문제에 대해 여론을 환기시키는 중요한 계기였다. 1988~1999년까지 10년 이상 이어진 원진레이온 투쟁 또한 산재투쟁의 역사에 빠질 수 없는 중요한 투쟁이다.

 

<어제는 산업역군, 오늘은 산업폐기물> 원진레이온 투쟁백서는 19938월에 나왔다. 김영삼 정권에 의해 원진레이온의 폐업 결정이 7월에 있은 후 원진레이온 투쟁은 파산철회 및 노동자 재취업 대책마련, 원진직업병 종합대책 마련, 원진직업병 전문병원 설립 등을 주요 요구로 폐업투쟁이 한창이었다. 이 때에 투쟁백서를 만들게 된 이유가 무엇일까? 백서 머리말에서는 그 이유를 이렇게 설명하고 있다.

 

대책 없는 폐쇄조치로 1천명의 원진노동자들이 다 죽어가고 있는데도 불구하고 노동자의 육체는 한우 고기보다 못하게 취급받고 있는 실상을 사회에 올바로 알()기 위해 책을 발행하게 된 것이다.”

 

백서에 따르면 1988년 원진레이온 직업병문제(이황화탄소 중독)가 사회화된 이후 1993년까지 알려진 사망자만 15, 이황화탄소 중독자로 확인된 원진레이온 전현직 노동자가 300여 명에 달했다. 19937월 밀실, 일방적인 원진레이온의 폐업결정으로 일자리를 잃고 직업병으로 죽어가게 된 원진노동자들은 다시 사회여론으로부터 은폐되고 있었다. 산재로부터의 보호가 아닌 산재의 존재를 은폐하려는 자본과 권력의 행태를 고발하기 위해 백서를 발간하게 된 것이다. 백서에는 원진레이온 직업병의 원인인 이황화탄소중독의 치명성, 자본과 권력의 결탁관계와 산재 은폐행태, 그 동안의 투쟁 경과, 원진레이온 폐업 배경의 의혹과 이후 대책이 글과 사진 등으로 기록되어 있다.

 

히틀러의 유태인학살에 사용되었다는 얘기가 있을 정도로 치명적이라는 이황화탄소중독은 한번 발병하면 호전 없이 계속 악화된다는 점에서도 무섭다. 더욱이 상당기간이 지나서야 중독사실을 알 수 있는 경우가 대부분이어서 더욱 무섭다. 원진직업병이 현직자 뿐 아니라 퇴직자들에게서 더 많이 발생하고 퇴직 후 십 수년 후 발생하는 환자들도 많았다. 1988~1991년 보다 1992년의 직업병 발생률이 2배가 높았다. 원진노동자들이 전현직 노동자 전체를 대상으로 한 정기검진과 전문병원 설립을 통한 장기대책을 요구하는 이유였다.

 

백서에서 확인되는 자본과 권력의 행태는 앞서 문송면군 투쟁에서 보았던 것과 전혀 다르지 않다. 자본은 위험물질에 그대로 노출된 작업환경 속에 노동자들을 방치했고, 예방과 사후대책에 대한 자기 책임을 부정하기에 급급했다. 노동부는 노동자들을 보호하는 권력이 아닌 자본의 책임을 은폐하기 위한 형식적인 근로감독, 형식적인 작업환경 조사에 그쳤다. 아니 무재해 250만시간 달성 표창이라는 가면을 씌워주었고 특별점검 때에는 미리 사측에 연락을 주어 사전에 대비할 수 있게 했다. 사회여론화 후 쏟아낸 산재대책들 또한 시간이 흐르며 현장에서 제대로 기능하지 못하고 유명무실화되도록 방치했다.

 

자신의 병이 운도 없이 젊은 나이에 걸린 중풍인줄 알고, 또는 무슨 병인지도 모르고 고통에 몸부림치던 원진레이온 노동자들은 19888월 연대단체들과 함께 스스로를 조직화하고 사측과 정부를 상태로 투쟁을 벌이며 직업병문제를 한국사회에 다시 환기시켜갔다. 백서에서는 1988년부터 당시 1993년까지 원진레이온의 산재투쟁을 크게 4개의 시기로 나누어 정리하고 있다.

 

1시기. 1988. 은폐되었던 직업병 문제 사회여론화 시기.

2시기. 환자와 가족들의 광범위한 조직과 작업환경 개선을 위한 투쟁 준비기(1989~1990)

3시기. 1991김봉환 동지 137일 장례 투쟁(1991)

4시기. 1993년 현재 직업병문제의 근본적인 대책을 위한 투쟁기(1992~19938)

 

6년의 투쟁속에서 원진레이온 노동자들은 연대노동자들과 함께 직업병판정, 작업환경개선에 노동자 참여(6인 위원회, 4인위원회 설치), 직업병인정기준 완화, 직업병사망자에 대한 직업병 개연성 인정과 실질 보상, 보상 기준 마련, 사업장내 작업환경관리 및 보건관리업무 강화, 요양신청서 발급을 위한 확인서 발급 거부 시 사업주 처벌 조치 등 적지 않은 현장, 제도측면의 성과를 가져왔다. 무엇보다 산재문제, 직업병문제에 대한 사회여론을 지속적으로 환기시켜왔다는 점과 원가협(원진레이온피해자및가족협의회. 1988. 8), 원노협(원진직업병피해노동자협의회. 1990. 5)과 같이 스스로 투쟁의 주체가 되고 원대협(원진직업병대책협의회. 1991. 5) 같은 산재추방을 위한 지속적인 투쟁체를 만들었다는 것이 투쟁의 중요한 성과라 할 수 있다.

 

원진레이온은 결국 19937월의 폐업결정이 확정되었다. 그리고 백서가 나온 이후인 11, 원진레이온 노사는 정부의 폐업조치에 따른 제반대책에 합의했다. 합의 내용에는 직업병환자들을 위한 공익법인 설립, 실직자들을 위한 생계지원과 재취업지원, 해고노동자들의 전원복직과 고소고발 취하, 노동부의 직업병 전문 산재종합병원 설립 등이 담겨 있다.

 

그러나 이 합의도 원만하게 이행되지 못하고 노동자들은 다시 투쟁에 나서야만 했다. 199311월 비영리 공익법인 <원진재단>을 설립했지만 재단 출연기금 확보, 전문병원 건립을 위한 투쟁에 나서야 했다.(1997. 원진 공대위 43일 농성 투쟁 등) 19996월 구리시에 원진재단 산하 원진직업병 환자를 전문적으로 관리하고 치료하기 위한 원진노동자건강센터 설립으로 10여 년 동안의 원진레이온 투쟁 마무리 되었다.

 

언론보도에 따르면 원진레이온 폐업 이후에도 199444, 95178, 9697명이 산재판정을 받았다. 폐업이후 직업병 판정을 받은 환자들이 319명이 확인된 것이다. 2001년에도 27명의 원진노동자들이 추가로 산재판정을 받았다. 산재직업병의 무서움과 산재예방의 중요성, 장기적인 산재대책 마련의 필요성을 반증한다.

 

오늘 산재투쟁의 결실을 누리고 있는 노동자들과 여전히 산재예방, 산재대책이 절실한 노동자들이 함께 기억해야할 또 하나의 노동자 투쟁의 역사가 이 백서에 담겨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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