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뉴스레터
..... 회원 마당
.....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주기 전에는
첨부파일 -- 작성일 2009-12-04 조회 1094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주기 전에는

정석균 (한내 자원활동가)

제가 ‘노동자역사 한내’에서 일한 지도 벌써 1년 반 정도 되었습니다. 성실하지 못한 탓에 실제 시간은 더 적겠지만 한내에 일하면서 참으로 많은 것을 듣고 배웠습니다. 처음 들어와서는 공공연맹 자료들을 엑셀파일로 정리하는 일을 했었고, 그 후로 1년간은 마창노련 자료들을 정리했습니다. 사측의 2차, 3차 면담연기 문서에서는 저도 같이 치를 떨고, 선전물을 만들고 수련회를 준비하는 노조의 문서에서는 신이 나기도 했습니다.

제가 오늘 할 이야기는 두 달 전 했었던 도서정리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한내가 책도 소장하고 있었어?”라는 분들도 계실 텐데요. 2000여 권 정도의 책을 소장하고 있습니다. 주로 노동운동 관련 서적이 절반이 넘고, 그 외에 맑스주의 철학, 한국 근현대사, 그리고 노래패에서 출간한 투쟁가 모음집 등등 들여다보면 희귀한 아이템들이 많이 있습니다. 두고 볼 때는 그저 ‘이런 책도 있어?’ 하며 신기하던 책들을 직접 분류정리하고 라벨링을 하는 일은 그리 만만하지 않았습니다.

제가 문헌정보학과를 나온 탓에 이 일이 맡겨졌지만, 사실 참 막막했습니다. 문헌정보학과의 커리큘럼이라는 것이 실습은 어쩌다 견학을 가는 것이 전부이고, 직접 책과 맞닥뜨리는 일이 없었기 때문이죠. 무능력하지만 일단 부딪쳐보자는 심정으로 시작하였습니다. 가장 먼저 할 일은 기존의 도서목록파일을 가지고 책들을 분류하는 것이었습니다. 이를 위해서 분류법이 필요한데, 저는 한국도서관협회에서 2009년 발행한 한국십진분류법 제5판을 사용하였습니다.
 

<사진 1 분류기호가 붙어있는 도서>

 

도서관에 가시면 책에 <사진 1>과 같이 알 수 없는 라벨이 붙어 있죠. 이중에서 앞의 숫자 5자리가 한국십진분류법 상에서 책의 주제를 말합니다. 이 경우는 ‘맑스주의 경제학’이죠. 그리고 그 뒤의 자음과 숫자의 조합은 저자기호라고 하고, 저자의 이름을 나타내구요. 그리고 v.1의 경우는 부가기호라고 하는데 이 경우는 책의 시리즈에서 1권을 말합니다. 그리고 가령 c.2라는 기호는 복본들 중 두 번째 책을 말하죠. 이런 사항들을 간단하게 알고 계시면 도서관에 가셨을 때 해당 주제를 찾기 쉽고, 이 도서관에 이 책과 똑같은 책은 몇 권, 시리즈는 총 몇 권이 있는지 알기 쉽겠죠!

어쨌든 이 기호들을 2000여 권의 책에 일일이 붙여주는 과정은 많은 난관이 있었습니다. 주제 분야가 딱 떨어지지 않는 책들이 있었고, 제목으로는 내용을 알기 힘든 책이 많았기 때문입니다. 전자의 경우는 예를 들어 책 내용이 전반부가 맑스주의 철학에 관한 이야기이고, 후반부가 노동조합에서의 교육관련 내용인 책이 있습니다. 난감합니다. 어떤 부분을 기준으로 할 것인가? 맑스주의 철학에 넣을 것인가? 노동조합 분류에 넣을 것인가? 이런 경우 책을 살펴본 다음 더 많은 비중을 차지하는 부분에 넣었습니다. 후자의 경우는 예전 출판 검열이 심하던 시절의 탓이 큽니다. 가령, 책 제목은 철학개론입니다만 내용은 거의 맑스주의 철학에 관한 내용을 담고 있는 경우죠. 제목만 보고 이 책을 철학개론 분류에 넣으면 그것은 잘못된 분류가 되겠습니다. 도서를 정리하는 저의 입장에서는 곤란하게 만드는 경우이지만, 이 내용을 제목으로 표현할 수 없던 시절의 저자를 생각하며 꼼꼼하게 분류기호를 붙여주었습니다.

그 다음은 분류기호들을 라벨로 출력하고, 이를 책에 붙인 후 훼손되지 않도록 라벨키퍼를 붙여주는 작업입니다. 단순하고 반복되는 작업이지만 무엇보다 책 수량이 많아서 무거운 책들을 옮기면서 했기 때문에 가장 힘들었던 작업이었습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책들을 분류별로 서가에 배치하고, 서가를 꾸몄습니다. 특히 백기완 선생님의 책들은 따로 다른 서가에 배치하여 <백기완문고>라는 팻말을 설치하였고, 다른 책들도 사회과학, 철학, 역사 등등 주제를 표시하여 이용하시는 분들이 쉽게 책을 찾을 수 있도록 하였습니다.
 

<사진 2> 정리된 서가

모든 일을 마무리하고 나니 그렇게 뿌듯할 수가 없었습니다. 책에 대한 애정과 한내에서 하는 일에 대한 애정도 더욱 커지게 되었죠. 그리고 이 모든 작업들은 저를 비롯한 한내 자원활동가들과 함께했습니다. 지금 이 시간에도 한내 사무실에서 노동자역사를 쓰는 작업에 힘을 보태고 있는 분들이죠.

저와 자원활동가들이 한 일은 어느 시의 구절처럼 이름을 부르고 의미가 되도록 하는 작업이었다고 생각합니다. 2000여 권의 책들이 먼지가 쌓이고, 정리되지 않은 채로 있었다면 책은 자기 이름을 갖지 못했을 것이고 이용자에게 의미가 되기 어려웠을 것입니다.

하지만 여기에서 그친다면 아직 저와 자원활동가들이 한 작업은 영원히 미완성입니다. ‘노동자역사 한내’에서 하는 가장 중요한 일이 노동자 스스로 자기 역사를 쓰는 것 아니겠습니까? 다시 말해 ‘노동자역사 한내’에서 노동조합의 자료들을 정리하고 열람할 수 있도록 문을 열어놓는 것으로 끝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회원들과 나아가 더 많은 분들이 관심을 가져주시고 한내 웹에 있는 자료들을 이용하시거나 또는 직접 찾아오셔서 한내가 소장하고 있는 도서들을 열람하셨으면 합니다. 그리고 이를 바탕으로 현장에서 운동으로 혹은 자기 운동을 기록하는 작업에서 비로소 ‘노동자역사’라는 꽃이 활짝 피어나지 않을까요?

 
 
 
 
 
목록
 
이전글 홍대 앞 스페인 박씨 집, 빠끼또(Pakito)
다음글 선전일꾼들에게 권하는 책, 유혹하는 에디터
 
10254 경기도 고양시 일산동구 공릉천로493번길 61 가동(설문동 327-4번지)TEL.031-976-9744 / FAX.031-976-9743 hannae2007@hanmail.net
63206 제주특별자치도 제주시 중앙로 250 견우빌딩 6층 제주위원회TEL.064-803-0071 / FAX.064-803-0073 hannaecheju@hanmail.net
(이도2동 1187-1 견우빌딩 6층)   사업자번호 107-82-13286 대표자 양규헌 COPYRIGHT © 노동자역사 한내 2019. ALL RIGHTS RESERV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