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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세일중공업노조의 총액임금제 분쇄투쟁(1992년 6월)
첨부파일 -- 작성일 1992-05-30 조회 212

세일중공업노조의 총액임금제 분쇄투쟁

 

시기 : 1992년 2월~7월

 

세일중공업노조 투쟁의 의의

세일중공업노조의 1992년 총액임금제 분쇄투쟁은 정권과 자본의 임금인상 억제정책인 총액임금제를 둘러싸고 형성된 투쟁 동력을 최대한 살려내면서 비타협적인 파업투쟁을 전개함으로써 마산·창원지역 임금인상 투쟁 분위기를 공세적으로 형성했다. 또 지역의 다른 노조들이 유리하게 임금인상·단체협약 갱신 투쟁을 마무리할 수 있도록 기여했다. 그리고 사업장에 공권력이 투입되었을 때 지역과 전국 차원의 공동대응 결의가 힘있게 실행되지는 못했으나 전국 임금인상 투쟁 전선을 형성하고 총액임금제 분쇄투쟁의 축을 이어나간 것은 커다란 성과였다.

 

마산창원지역 차원의 투쟁 조직

세일중공업노조는 1992년 임금인상 투쟁에 앞서 199110월 위원장 선거, 11월 정기대의원대회와 조합원 총회 등을 통해 조직을 정비하고, 1991년 사업 평가를 통해 노동조합의 모든 사업에서 조합원이 사업의 주체가 될 수 있도록 한다1992년 사업의 방침을 확인했다. 또 투쟁으로 쟁취한 징계위원회를 노사동수로 구성하고 결정권을 노조가 갖는다는 단체협약 조항을 근거로 해고됐던 핵심 활동가들이 속속 현장으로 복귀하면서 조합의 활동력이 강화됐다.

지역 차원에서는 19911122일부터 이틀간 지역의 노동조합 대표자 교육으로 1992년 사업 기조에 대해 논의했다. 창원지역 노조 대표자 간담회에는 53개 노조에서 64명의 대표자들이 참석해 노조 탄압에 대한 공동대응을 결의했다. 1992117일 마창노련 정기 대의원대회에서 안준환 세일중공업노조 위원장이 마창노련 부위원장으로 선출돼 지역 공동투쟁에 대한 세일중공업노조의 핵심적 역할을 확인하기도 했다. 118일에는 회사와 경찰의 침탈에 맞선 효성중공업노조의 노조 사수투쟁에 세일중공업노조 조합원 700명과 대림자동차노조 조합원 600명이 연대투쟁을 전개해 공권력 철수와 휴업조치 철회를 쟁취했다. 이는 세일중공업노조뿐 아니라 마창지역 노동조합들의 연대투쟁에 대한 결의와 투쟁력을 확인하고 공동투쟁에 대한 자신감을 느끼는 계기였다.

21913개 노조 19명이 참석한 가운데 열린 마창지역 노조 대표자 수련회에서 1992년 공동 임금인상 투쟁의 목표와 방침, 조직체계, 규율 등에 관해 논의하며 1992년 임금인상 투쟁에 대한 공동인식과 투쟁 결의를 확고히 했다. 이어 224일 마창노련 운영위원회에서는 투쟁의 세부계획을 확정했다.

 

세일중공업노조 투쟁의 시작

지역 차원에서 확정된 세부계획에 따라 세일중공업노조는 1992년 임단협을 앞두고 228일 임시대의원대회에서 임금요구안을 확정했으며, 전 조합원을 투쟁의 주체로 세우는 투쟁계획을 마련하고 ‘1992년 임금인상단체협약갱신 투쟁위원회를 구성해 투쟁 준비를 체계적으로 진행해 나갔다. 확정된 임금 요구안은 기본급 기준 95,610(22.54%) 인상과 각종 수당 38,787원 인상을 합한 통상임금 기준 134,397원 인상이었다.

임금인상단체협약갱신 투쟁위원회는 선봉대와 별도 조직체계로 상황실에 교육선전, 진행, 후생복지 등 3개 분과를 설치하고 산하에 6개 협의체별 회의기구를 두었으며, 협의체를 다시 세분하여 48개 선거구로 나누어 반별회의체계로 구성했다. 조합원은 상황실 3개 분과 중 한 곳에 속하도록 함으로써 전조합원이 주체로 나서 일사불란하게 움직일 수 있는 체계로 활동의 폭을 넓혔다.

세일중공업노조는 33일 단체협약 요구안을 발송하고, 318일에 임금요구안을 발송하면서 본격적인 투쟁에 돌입했다. 318‘1992년 임금인상·단체협약 갱신투쟁 완전 승리를 위한 출정식을 열어 전 조합원의 투쟁 결의를 다졌다. 이날 출정식에서는 각 협의체별로 투쟁결의문을 작성해 발표했으며, 교섭위원들도 투쟁결의문을 작성·발표하는 등 투쟁위원회 각 단위가 주체적으로 결의를 밝혔다.

한편 회사측은 328일 상견례 이후 사장이 교섭석상에 나타나지도 않으며 임금을 체불해 투쟁을 위축시키고자 했다. 게다가 퇴사자에 대한 보충 인원을 충원하지 않음으로써 물량 부족으로 인한 잔업 전면 중단과 고용불안 상태를 야기하는 등 투쟁을 왜곡하고자 했다. 노조는 410일 임금이 체불되자 곧바로 전 간부 본관 항의농성을 전개하고, 전 조합원이 참석해 항의집회를 했다. 11일부터는 노조 간부 전원이 무기한 철야농성을 전개해 임금 체불에 대한 항의와 임단협투쟁의 열기를 북돋웠다.

세일중공업노조는 52일 노동조합 앞마당에서 이영일 노동열사 2주기 추모제 행사를 열어 조합원 1,500여 명이 모인 가운데 민주노조를 강화하고 임단협을 완전 쟁취하겠다는 결의를 다졌다.

한편 4288차 교섭에서도 회사는 총액 5%” 주장으로 일관했다. 노조는 회사측이 수정안을 제시할 때까지 9차 교섭을 무기한 연기하고 57일 조합원 총회를 열어 쟁의발생신고 찬반투표를 실시했다. 압도적 찬성으로 쟁의발생신고를 결의한 노조는 쥐잡기, 산업재해 방지를 위한 환경미화작업, 생산성 촉진을 위한 새노래 배우기, 민중가요 배우기 등의 다양한 방법으로 준법투쟁을 전개했으며, 투쟁의 열기를 고조시키기 위해 위원장배 족구대회도 열었다. 527일에는 파업 찬반투표를 하며 선거구별 민중가요 경연대회를 진행했다.

노조 집행부는 527일 파업 찬반투표를 앞두고 26일부터 전 간부 철야농성에 들어갔다. 3월부터 임단협투쟁을 시작한 세일중공업노조는 지역과 전국 임금인상 투쟁 일정에 맞춰 계속 파업투쟁을 지연시키다가 527일 조합원 91.23% 찬성으로 파업을 결의한 이후 528일부터 부분파업에 돌입했다. 530일과 61일에는 2일간 전면파업을 벌여 총액임금제 분쇄와 임단협투쟁 승리에 박차를 가하였다.

회사측은 61작금의 작업거부 행위에 대하여62조합측 주장은 이런 문제점이 있습니다라는 유인물을 내고, 작업거부 행위에 무노동무임금을 적용하고 법적 처리하겠다는 방침을 밝혔다. 이에 노조는 즉각 규탄집회를 열어 회사측 주장을 탄압행위로 규정하고 강철같은 투쟁으로 승리를 쟁취할 것을 결의했다. 조합원들은 95% 이상의 출근율을 기록하면서 투쟁위원회의 지침에 따라 집회나 파업 프로그램에 참여해 결의를 높였다.

앞서 회사측은 529일 열린 12차 교섭에서 호봉승급분을 제외한 총액임금 기준 5%를 수정안으로 제시했으며, 노조 집행부는 6913차 교섭결과에 따라 전면파업 돌입 여부를 결정하기로 했다. 노조는 회사측이 총액임금 5%만을 고수하며 더이상 타결의사가 없고 노조 깨부수기에만 혈안이 되어 있다고 판단하고 611일부터 강도 높은 전면파업에 돌입했으며, 공권력 투입에 대비한 결사항전의 전투태세를 갖추었다.

 

지역 차원의 파업투쟁 지지·엄호

한편 612일에는 총액임금제 분쇄와 92임투 완전승리를 위한 마창 노동자 결의대회가 열렸다. 창원대학교 민주광장에서 열린 이 결의대회에 참가한 노동자 800여 명은 총액임금제를 분쇄하고 임금인상 투쟁 완전 승리를 위해 강철같은 투쟁대오를 갖추고 결사항전하기로 결의를 확고히 했다. 이날 대회는 결사항전 결사투쟁의 자세로 총자본의 탄압 책동에 일격을 가하자는 허연도 마창노련 의장의 대회사를 시작으로 최동환 마창총협 의장의 연대사, 박정훈 루카스디젤노조 위원장의 전국과 지역의 투쟁상황에 대한 보고, 박성식 세일중공업노조 대의원의 투쟁 선동과 투쟁결의문 낭독의 순으로 이어졌다.

그리고 마창노련 운영위원회는 611일 비상운영위를 소집해 세일중공업의 전면파업 돌입을 전폭적으로 지지했다. 또 예상되는 경찰병력 투입에 공동 대응키로 결정한 610일의 전국 노조 대표자 간담회의 결의사항을 재확인했다.

마창노련은 이러한 운영위원회의 결의사항을 613총액임금제 철회와 세일중공업노조탄압 중단 촉구를 위한 기자회견에서 명백히 밝히고, 마창연합과 함께 대대적인 투쟁에 돌입할 것을 선언했다. 611일에는 마창연합과 경남연합 의장단이 노동부 항의 방문을 통해 노동운동 탄압중단을 촉구하기도 했다.

 

공권력 침탈에 맞서 굴뚝투쟁 전개

총액임금제 분쇄와 임금인상 투쟁 완전 승리를 위한 전면파업에 돌입한 세일중공업노조는 619201,200여 명의 병력을 동원한 경찰의 진압에 현장을 빼앗기고 말았다.

경찰은 파업 9일째인 19일 새벽 5시 헬기, 페퍼포그, 중장비 등 진압 장비와 전투경찰, 백골단 1,200여 명을 동원하여 정문과 후문, 옆문 등 3개 출입문에 설치된 철구조물 바리케이드를 치우고 불법분규를 중단하고 자수하라는 선무방송을 하면서 공장 안으로 진입해 전 공장을 장악했다. 진압작전이 시작되자 각 문에서 경비 중이던 조합원들은 정문 안쪽에 신너 등으로 불을 질러 진입을 저지했고 농성장인 2공장 A동 노조사무실 건물 주변에도 신너를 뿌려 공권력의 침탈에 대비했다.

안준환 위원장 등 노조 간부 10명은 노조사무실 2층 옥상에서, 황선엽 부위원장 등 5명은 32m 높이의 굴뚝에 올라가 총액임금제 철회’, ‘경찰병력 철수’, ‘노조탄압 중지등의 요구를 내걸고 결사항전에 들어갔다.

경찰투입 후 회사쪽 요청에 따라 농성장인 옥상과 지상 중간 계단에서 두 차례 교섭이 열렸으나, 회사가 징계위원회 노사동수 구성조항을 개악할 것을 요구했기 때문에 노조는 이를 거부하고 공권력 침탈에 맞서 굴뚝투쟁을 전개했다.

그러나 경찰은 20일 새벽 1시 소낙비가 억수같이 쏟아지는 틈을 타 농성장에서 가까운 공장 담 철망을 뚫고 진압작전을 재개해 새벽 230분경 옥상에 있던 12명을 연행했다. 이어 오후 4시경 굴뚝에서 농성하던 김영조 부위원장 등 3명마저 연행했다. 연행자 중 사전구속영장이 발부된 안준환 위원장 등 10명이 구속되고 김영조 수석부위원장 등 4명은 불구속입건으로 22일 오후에 풀려났다. 그리고 박성식 대의원은 수배됐다.

노조는 20일 안준환 위원장으로부터 전권을 위임받은 오홍렬 위원장 권한대행(산업안전부장, 교섭위원)을 중심으로 바로 비상대책위원회를 구성하고 22일 오전 10시 창원대학교에서 조합원 집회를 가진 뒤 이후 투쟁방향을 논의했다. 조합원들은 이에 앞서 19일 경찰이 침탈하자 오후 5300여 명이 창원병원 앞에 모여 시위를 벌이고 이를 막는 전투경찰과 백골단에 맞서 격렬한 투쟁을 전개했다. 회사측은 경찰이 현장을 장악한 619일부터 공장 안을 청소하면서 정상조업을 준비했다. 또 경찰은 조합 간부들을 연행한 뒤 철수했으나 조합원의 현장진입 투쟁에 대비해 622일 공장주변에 다시 병력을 배치했다.

 

지지·엄호투쟁 전국으로 확대

세일중공업노조의 총액임금제 분쇄와 임금인상 투쟁 완전승리을 위한 총력투쟁을 경찰이 침탈한 데 맞서 전국 각 지역에서는 항의투쟁을 전개했다.

전노협은 619일 오전 10시 비상 전국 임금인상 투쟁본부장단 회의를 열어 19일 지역별 항의 철야농성 <한겨레신문>에 규탄 광고 게재 세일중공업노조 투쟁기금 모금 등을 결의했고, 75일경 총액임금제 철회와 노동운동 탄압 규탄대회를 열기로 결정했다.

마창노련은 619일 오전 10시 비상 운영위원회를 소집해 쟁의결의 노조들이 즉각 파업에 들어갈 것을 결의하고 오후 마산 시내 전역에 경찰침탈을 규탄하는 성명서를 배포했다.

서울지역 임금인상 투쟁본부, 세일중공업노조, 전국노련, 전국노운협, 진정추 등은 620일 연세대 노천극장에서 2,500여 명의 노동자·학생이 모인 가운데 세일중공업 공권력 침탈 규탄 및 총액임금제 분쇄 결의대회를 가졌다. 대회 참석자들은 총액임금제가 분쇄되는 날까지 모든 수단을 동원하여 투쟁할 것을 결의하고 거리행진을 막는 경찰의 최루탄에 맞서 돌과 화염병을 던지며 1시간 30분 동안 격렬한 투쟁을 벌였다.

대구노련은 620일 오후 4시 경북대학교 야외공연장에서 120여 명의 노동자가 모인 가운데 총액임금제 분쇄와 세일중공업 공권력 침탈 규탄대회를 가졌다.

서노협 사무실에서는 19일 오후 8시부터 16개 노조와 단체 소속 노동자 100여 명이 모여 철야농성을 했다. 비디오 상영, 전국임투 현황 보고, 세일중공업 투쟁보고에 이어 진행된 분반토론에서 노동자들은 쟁의 지원금 모금, 격려 대자보 보내기 등 전국 임금인상 투쟁 본부장단 회의 결정사항을 결의했다. 인천공대위 소속 20개 노조와 단체 소속 노동자 60여 명도 이날 인노협 사무실에서 철야농성을 했으며, 경기남부 임금인상 투쟁본부는 경기노련 안양지구 사무실에서 15개 노조 100여 명이 모인 가운데 세일중공업노조 지원 결의를 다지는 농성을 했다.

부산지역 공동 임금인상 투쟁본부는 619일 운영위원회를 열어 세일중공업 지원을 결의하고 22일부터 선전전을 벌이기로 했다.

이러한 투쟁에도 불구하고 기업별 노조체계라는 근본적인 한계와 세일중공업노조 지도부의 구속 및 지역·전국 차원의 연대투쟁의 미진함 등으로 공권력 침탈 이후 민주당사에서 철야농성을 벌이던 세일중공업노조 비상대책위원회 지도부도 농성을 풀고 79일 정상조업에 들어감으로써 총력투쟁은 일단락되었다. 회사측은 74일 교섭에서 임금 9.73% 인상, 징계위원회 노사동수 구성은 그대로 두고 결정권을 노조에서 회사대표로 개악, 상근자 1명 추가, 추가 고소고발자 8명에 대한 고소·고발 취하, 구속자 10명에 대해 2심까지 평균임금 지급 등을 제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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