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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엔진노동조합 결성
⦁ 시기 : 1987년 7월 14일
⦁ 요약 : 1986년 현대중정기 기능직 처우 개악 시정을 요구하면서 시작된 집단행동은 노사협의회 대표위원 선출, 상여급 차등지급제 철폐, 1987년 임금인상요구 투쟁을 거쳐 첩보작전을 방불케 하는 모임과 치밀한 준비를 거쳐 7월 14일 드디어 열매를 맺었다.
1980년 5월 17일 노동조합 결성투쟁
현대그룹에 노동조합 결성 움직임은 1979년 11월로 거슬러 올라간다. 울산 현대중공업 이민우 과장이 울산경찰서로 강제 연행돼 1주일간 모진 고문 끝에 반공법 위반으로 구속됐는데, 미국 노동운동 비사인 <알려지지 않은 이야기>라는 책을 자신의 현장부서원에게 빌려줬다는 게 이유다. 이 사건은 1980년 3월 1심에서 무죄를 선고받았지만, 회사가 사직을 강요하다가 여의치 않자 이민우 과장을 서울 본사로 발령내면서 새로운 전기를 맞는다. 앞서 1980년 5월 17일, 이민우 과장과 동료 80여 명은 노동조합 결성을 준비했다. 당시는 10․2 6이후 계엄 상태였으므로 울산경찰서장은 “광주에서 국가변란이 나 집회를 할 수 없으니 조금만 기다리라”고 통보했다. 그러나 본사에서는 이 틈에 발령을 낸 후 5일 이내에 부임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이민우 과장을 해고한 것이다. 이후 지방노동위원회, 중앙노동위원회, 행정소송, 지방법원, 고등법원, 대법원 등을 거친 모든 법적 투쟁은 허사로 끝나고 사회 전반의 공포 분위기 속에서 함께 활동했던 동료들도 차례로 해고당함으로써 최초의 노동조합 결성 시도는 열매를 맺지 못했다.
현대중전기 기능직 처우 개악 시정 요구
1986년 들어 머리마저도 마음대로 깎을 수 없었던 현대 노동자들의 불만이 조금씩 집단적으로 나타나기 시작했다. 현대자동차 기숙사에 유인물이 뿌려져 회사를 긴장시키기도 했다. 이 무렵 현대중전기에서 사무실에 근무하는 기능직 노동자의 처우를 일방적으로 저하하는 사건이 일어났다. 야간 잔업을 실제 잔업시간과 관계없이 한 달에 50시간만 인정한 것이다. 이 조치에 해당하는 대상자 100여 명이 모임을 갖고 회사에 교섭을 요구했으나 회사의 감언이설에 승복하고 말았다. 며칠 뒤 기숙사에는 “현 정부의 경제정책과 노동자의 실상” “노동조건 저하의 부당성”을 지적하며, 함께 모여 시정을 요구하자는 유인물이 뿌려졌다. 그러자 회사는 이날 모든 사람이 출근한 뒤 기숙사 전체를 수색해 지난번 회사와 교섭할 때 입장이 강경했던 사람을 유인물 배포 혐의로 전출시킴으로써 사태를 종결했다. 비록 실패로 끝났지만, 이 사건은 1987년 대투쟁과 연관된 첫 번째 집단행동이었으며, 노동자들이 서서히 권리의식을 갖기 시작했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노사협의회 대표위원 선출 투쟁
1986년은 현대엔진 노동자들에게도 노동문제, 즉 자신의 문제에 관심을 두게 되는 중요한 한 해가 됐다. ‘현대엔진 노사협의회’를 둘러싼 투쟁이 바로 그것이다. ‘현대엔진 노사협의회’는 사측의 일방적인 주도로 운영됐음에도 상당히 민주적으로 구성돼 있었다. 전체 부서를 10개로 나눈 뒤 노동자측 위원 10명을 선정하고, 부서마다 인원비례로 200명 이상인 부서는 5명, 미만인 곳은 3명씩 소위원 제도를 두어 각 부서장이 월 1회 회의를 진행했다. 상정된 안건에 대해 소위원회가 열려 부서 단위의 문제점을 논의하고, 여기서 해결되지 못한 안건은 간담회에 상정해 관리이사 또는 중역과 토론을 거치고, 여기에서도 해결되지 않은 안건은 3개월에 1회 개최되는 노사협의회(사장, 각 부서장 등 사용자측과 노동자측 위원 각 10명)에서 처리하게 했다. 그러나 대부분의 사안이 강압이나 매수 등을 통해 회사에 유리하게 결정될 수밖에 없는 구조였다. 그러나 1986년 노동자측 대표위원이었던 김종국이 굽힘 없이 싸우기 시작했고, 그의 투쟁은 소극적이던 현장노동자들에게 적극적 의식을 불어넣는 계기가 되었다. ‘2.4회’(1985년 10월 24일 관리자들의 횡포에 대항하기 위해 군필자 중심으로 처음 모인 뒤 매월 24일 친목과 현장문제 토론. 1987년 노사위원 선거와 상여금 차등제 문제, 임금인상 등을 거쳐 4월에 해체될 때까지 1년 6개월간 현대엔진의 중요한 현장조직으로 역할)를 중심으로 노사협의회의 노동자측 수석대표위원과 간사를 노동자측 입장에 선 사람으로 뽑기 위한 활동을 은밀하게 시작했다.
1986년 12월로 예정된 노사협의회 위원 선거를 준비하던 중, 11월 23일 회사에서 노사협의회 위원의 자격요건을 공고함으로써 오히려 현장노동자들의 분노를 자아냈다. 이 공고문은 입사 후 5년이 지난 자, 현역을 필한 자, 인사고과가 중(中) 이상인 자로 자격을 제한했다. 이러한 자격을 갖춘 사람은 전체 노동자의 10% 내외로 대부분 이미 다른 직책을 가진 사람들이었다. 분노한 노동자들은 자격요건 철폐를 내걸고, 부서별로 선거 무산 전략을 밀고 나갔다. 이리하여 11월 25일 기계공장에서 선거규정의 부당성을 폭로하고 선거를 거부하기에 이르렀다. 이어 11월 26일에는 조립공장을 포함 4개 부서에서 선거를 무산시킴으로써 현장에 자신감을 불어넣었다.
관리과에서는 기존의 자격요건으로는 선거를 치르기 어렵다고 판단하고, 노사위원의 자격요건을 입사 후 5년에서 3년으로, 현역필자에서 군필자로 수정하고, 부서 단위로 치러지던 노사위원 선거를 축소해 각 과 단위에서 선정하는 것으로 바꾸어 일방적으로 공표했다. 이에 노동자들은 ‘자격 제한 완전철폐’냐 ‘대표위원 확보’냐 논란 끝에 대표위원 확보로 입장을 재정리해 선거에 임한 결과 10개 부서 중 7개 부서의 노사협의회 위원과 소위원의 대부분이 민주파로 선출됐다.
상여금 차등지급제 철폐 투쟁
현대그룹에서는 상여금을 각 계열사에 거의 같게 500%를 지급하고, 각 회사에서는 인사고과를 기준으로 최상, 상, 중상, 중, 중하, 하, 최하 등 모두 7단계로 나누어 차등 지급하고 있었다. 두발, 아침체조 참석 여부, 연월차 사용, 조퇴, 지각, 외출, 안전사고, 불량 등 생산활동은 물론 회사 내의 일거수일투족 모두가 인사고과 평가 대상이었다. 이 스마일고과에 따른 상여금, 임금인상과 승진, 승급이 결정되는데, 여기에는 관리자들의 입김이 작용했고 이를 통한 통제도 아주 심각했다.
문제는 조립공장 중 한 개의 과에서 시작됐다. 총원 45명 중 13명이 ‘하’를 받았고, 그중 7명이 ‘최하’를 받았다. 평균 상여금이 300%인데 이들 중 7명은 연말 상여금 150%, 6명은 200~250%만을 받게 된 것이다. 1월 4일 시무식을 마치자 이들 13명이 현장 안에 있는 분임토의실로 몰려와 ‘하’를 받게 된 원인을 규명하겠다는 계획을 세우고, 마침내 1월 5일 부서장 조례에 임했으나 준비한 투쟁은 벌이지 못했다. 같은 날 오후 과장과의 면담을 통해 △차등지급된 상여금 전액 소급 지급 △3월 임금 및 앞으로 승진승급에 영향을 미치지 않도록 할 것 △상여금 차등제 폐지를 요구했다. 1월 6일 13명이 3일째 작업을 거부하고 분임토의실에서 농성을 벌이자 소문이 다른 부서로 옮겨지면서 관심이 확대돼 갔다. 이 와중에 농성장에 나타난 과장은 “소급은 어렵고 내년에는 반드시 다른 사람보다 많이 받게 해주겠다”며 회유했다.
1월 7일 13명이 분임토의를 하며 4일째 농성을 계속하는 동안 오전 10시부터 12시 20분까지 조립공장 대표위원, 소위원, 과장, 부서장 등 넷이 남아 협상을 전개해 한때 합의안을 만들어 내기도 했으나 어떠한 진전도 이루어지지 않자 “우리 힘으로도 충분히 해낼 수 있다. 이 문제를 선조립과에만 국한하지 말고 전 공장으로 확대하자. 선조립과 노사위원이 맡아 처리하던 것을 노사대표위원에게 일임하자”는 결론을 내렸다. 이로써 한 개 과에서 진행되던 상여금 차등제 철폐 요구는 전 공장으로 확산되기에 이르렀다. 한편 이러한 사항을 노사위원회에서 거론하는 과정에서 대표위원과 일반 노동자들과의 괴리감을 없애기 위해 소위원으로 구성된 노사협의회 후원회를 구성해 사장 긴급면담을 추진하기로 했으며, 후원회 의장에 권용목, 대표위원장에 신환영, 간사에 사영운, 고충처리위원에 장호철을 선출했다.
한편 회사에 사장 면담요청서가 전달되자 관리자들은 그 내용이 오만불손하다는 이유로 거절했다. 14일 오전 10시부터 공장의 전체 노동자들이 ‘상여금 차등제 철폐’라는 몸벽보를 등에 붙이고 작업에 돌입해, 오후 4시 마침내 사장과의 면담이 이루어졌다. 사장 면담에서 결정적인 것을 얻지는 못했지만, 현장노동자들은 단체행동이 무엇인지를 깨달았고, 노동조건 개선에 대한 인식이 확산됐다. 또 이 기간을 거치면서 3월에 접어들어 기왕에 있었던 조립공장의 ‘2․4회’ 이외에 산철공장의 ‘3․1회’, ‘단조공장 모임’, 기계공장의 ‘동력회 모임’ 등 노동자들의 모임이 속속 결성됐다. 이들에게 구체적인 운동 방향이나 교육, 조직 등에 대한 정확한 계획은 없었지만 “무엇인가 해야 한다” “노동자에게도 강력한 힘이 있어야 한다”는 신념이 있었다. 이들은 노사협의회의 명실상부한 후원회로 활동하게 된다. 1987년 임금인상요구서 제출과 투쟁
현대그룹은 그룹이 책정한 인상률을 그대로 적용해 임금을 지급해 왔다. 그래서 해마다 현대그룹의 종합신장률이 30%를 넘어도 임금은 항상 3~4% 선 인상에 머물렀다. 그룹 기획실에서 내려보낸 임금인상률은 다른 대표위원들의 동의도 없이 대표위원장 또는 간사가 비밀리에 도장을 찍어줌으로써 통과돼왔다. 이러한 관례를 깨뜨리기 위해 3월 노사협의회 1차 본회의에 15% 임금인상안을 제출했으나 회사에 당혹감만 안겨준 채 회의가 무산되고 말았다. 노사위원은 각 부서에서 본회의가 무산된 된 경위와 15% 임금인상의 타당성에 관해 설명하는 보고대회를 열었다. 이후 몇 차례의 노사협의회 끝에 노동자들의 압도적인 지지에도 임금은 단 1%도 올리지 못한 채 회사측 전술에 말려 협상은 패배하고 말았다.
이후 ‘2․4회’와 ‘3․1회’가 주축이 되어 중식시간에 ‘대오를 정렬하고 축구시합 하기’ ‘본관식당 한꺼번에 이용하기’ 등으로 회사의 일방적인 임금인상에 대한 항의투쟁을 이끌어갔다. 그러던 중 전체 노동자 ‘중식시간 축구시합하기’가 자본측에 염탐당하고, 당일 비 때문에 취소되면서 임금인상 투쟁은 막을 내렸다. 이어진 회사의 집중적인 탄압으로 ‘2․4회(27명)’와 ‘3․1회(60여 명)’가 와해됐다. 이러한 임금인상 투쟁이 실질적으로는 아무것도 얻지 못했을지 모르지만, 노동자에게 단체행동의 필요성과 자신감을 불러일으킴으로써 이후 현대엔진 노조결성 투쟁의 원동력으로 작용했다.
현대엔진노동조합 결성투쟁
1987년 4월 들어 반공개적으로 운영되던 몇 개의 모임 중 ‘2․4회’와 ‘3․1회’ 가 해체되고, 미등록 모임에 대한 회사의 통제가 강화되자 자연히 모임의 성격을 새롭게 할 수밖에 없었다. 그중 하나가 공개적인 과 단위 모임과 20~30명 단위의 비공개 소모임을 혼합시킨 새로운 모임이었다. 공개적인 과 단위 모임을 과공조회로 구성해 작업장 내 민주화 실현을 위한 행동통일을 끌어내기로 했다. 그러나 이 공조회는 친목회적 성격을 벗어나지 못했고 그때그때의 문제점을 토론하고 해결하기 위한 출발단계에 지나지 않았다.
한편 1986년에 들어와서 몇 차례 시도되었던 단체행동은 노동자들에게 자신감을 줬고, 그 이후 과장이나 직장에게 공개적인 면담을 요청해 퇴근하지 않은 채 5시간 동안 토론을 한다든가, 조기 퇴근해서 축구시합을 하는 등의 소규모 저항운동이 끊임없이 발생했다. 특히 이 과정에서 전체 현장부서에서 신임을 받고 있던 ‘노동자 대표위원회’와 노동조합을 결성할 목적으로 구성된 ‘제1차 노동조합 설립추진위원회’가 만들어졌다.
‘노동자 대표위원회’는 노사협의회 후원회를 구성하는 실질적인 세력으로, 노사협의회가 몇 번의 투쟁 과정에서 사람들의 성향을 분명하게 구별했기 때문에 좀 더 구체적인 활동을 할 수 있는 독서회 형식의 소모임이 필요해서 만든 조직이었다. 이 위원회는 12명으로 구성됐고 한 부서에서 1~2명이 참가했는데, 친목회 형태의 소모임 임원을 반드시 1명씩 포함하도록 해서 격주로 모임을 진행했다.
‘제1차 노동조합 설립추진위원회’는 노사협의회가 갖는 법규상의 제약과 사용자의 일방적인 회의 운영에 불만을 품은 5명의 노사위원을 중심으로 4월 중순 무렵 결성해 주 2회 극비리에 모였다. 이 모임에서는 다섯 가지의 자체 규율을 결정했는데 △당분간 5명만 이 모임을 이끌어 간다 △현존하는 다른 소모임에도 노조결성에 대한 것은 극비로 한다 △노사협의회는 현행대로 활동 △자체 규약으로 비밀엄수, 책임엄수, 시간엄수, 상호신뢰 △노조설립이 성공할 때까지 절대 금주 등이다. 그 후로 노동조합법과 노조결성에 필요한 제반 사항, 그리고 노조설립 사례를 중심으로 학습을 진행하고, 업무분담을 위해 쟁의부, 기획부, 조직부로 나눠 사전준비에 착수했다.
기획부에서는 노사협의회를 노동조합 설립 분위기 성숙에 활용키로 하고, 2/4분기 노사협의회가 개최되는 6월 중순에서 7월 초순을 노동조합 결성 시기로 정했다. 나아가 노사협의회 본회의에 상정할 안건으로 △간식 지급 △주·단조 및 유해작업장 공해수당 지급과 작업환경 개선 △하기휴가 유급제 △통근버스 증차를 결정했다. 조직부에서는 소모임을 가능한 한 많이 만들기로 하고 특히 조합 결성 당일에 동원 가능한 소모임 조직과 인원을 선정하는 작업에 돌입했다. 이때 사전 접촉은 노조결성 건 대신 노사협의회에서 추진 중인 ‘2/4분기 현안 문제에 대한 후원회 건’으로 해서 조직을 확대해 나갔고, 2/4분기 본회의가 6월 22~29일 사이에 개최될 것이라는 가정에 따라 노조결성 시기를 6월 28일로 확정했다. 노사협의회 본회의에 안건을 상정하기 위해서는 각 부서 소위원회에서 통과된 안건이 있어야만 했는데, 위의 네 가지 요구를 각 부서 소위원회와 간담회를 통해 본회의 안건으로 상정시킬 수 있었다.
1987년 6월 22일 ‘제2차 노동조합 설립추진위원회’ 모임을 열어 인원을 5명에서 12명으로 확대하고 노조 임원진 포함 1, 2, 3진을 구성, 회사측 탄압에 대처할 것을 결의했다. 1진의 경우 노조결성 전면에, 2진은 노조결성 시 회사의 해고 등 탄압에 맞서 회사 내에서 활동, 3진은 1, 2진이 무너졌을 때 운동의 맥이 끊이지 않기 위해 회사 내에서 활동할 사람으로 선정했다.
6월 28일, 약 1주일 동안 진용을 재정비하는 한편 임원 선정 작업을 거쳐 위원장에 권용목, 부위원장 이재홍, 신환영, 사무국장 사영운, 회계감사 장호철, 정흥용을 내정하고 노조결성 작업에 돌입했다. 결성일은 노사협의회가 개최되는 7월 3일 이틀 뒤인 일요일 오후 3시로, 장소는 1차 옥교동 디스코홀, 2차 태화호텔 예식장홀, 3차 송정국민학교로 정했다. 또 금속노련 인준증을 받기 위해 서울을 방문, 일요일 낮 12시에 금속노련 조직부장이 인준증을 가지고 부산으로 오기로 하는 등 만반의 준비를 마쳤다.
1987년 7월 5일 오전 10시, 시내 다방에서 연락을 담당한 9명이 만나 업무를 재점검하고 디스코홀에 도착, 5명이 장소정리와 노조결성 현수막 제작을 하고, 나머지는 연락장소로 흩어져 소집을 담당했다. 마침내 오후 3시 120여 명 정도로 참석인원이 불어났고, 그중 101명이 노조결성식에 참가했다. 노동조합 결성식은 오종쇄의 사회로 시작돼 결성 선언, 애국가 제창, 성원 보고(101명), 규약 통과에 이어 전형위원이 나서서 위원장 권용목, 부위원장 이재홍, 신환영, 사무국장 사영운, 회계감사 장호철, 정흥용을 만장일치로 선출했다. 약 2시간에 걸친 결성식이 무사히 끝나고 이들은 당일 밤 시내 여관에서 밤을 새우며 노조 설립신고에 필요한 서류들을 재점검했다.
1987년 7월 6일, 작업장에 탄압이 가해올 때 효과적으로 대응하기 위해 휴식시간 및 작업시간을 알리는 벨을 눌러 제일 처음 울린 장소로 노동자들을 집결시키기로 했다. 오전 10시 30분 노조설립신고를 하고 접수증을 받았다는 연락이 왔으며, 점심시간에 예정대로 약 1,000여 명이 모인 식당에서 ‘제1차 노조결성 보고대회’를 개최했다. 장호철 회계감사가 사회를 맡고 핸드마이크로 “여러분! 우리는 노사협의회를 통해 우리들의 문제를 해결하려고 무척 노력했습니다. 그러나 지난번 상여금 차등철폐와 임금인상, 그리고 공해수당과 하기휴가 유급제 등을 놓고 사용자측과 협의를 했으나 그 한계를 느꼈습니다. 그래서 어제 오후 3시에 101명이 모여 노조를 결성, 울산시청 사회과에 등록을 마쳤습니다”라고 보고하자 장내는 흥분의 도가니를 이루었다. 권용목 위원장이 인사말을 통해 “이제 일한 만큼 정당한 대가를 받게 된다는 자부심을 가져도 좋습니다. 이제 사람답게 살 수 있다는 자부심을 가져도 좋습니다”고 하자 장내는 다시금 함성 속에 파묻혔다. 첫날부터 조합원 가입이 1,000명을 넘을 정도로 현장노동자들의 호응은 절대적이었다.
1987년 7월 7일, 점심시간을 이용해 조립공장 북문에서 700여 명이 참석한 2차 보고대회를 열었했다. 오후부터 회사는 노동조합을 깨기 위한 방해 공작을 펼쳤다. 노동조합 설립신고증이 교부될 때까지 한 치도 방심할 수 없었다. 3일째 보고대회에서 “우리는 단체로 피해 다니느라 잠도 제대로 못 자고, 식사도 제대로 못 한다. 오늘 아침도 라면으로 때웠다”고 발표하자 즉석에서 성금이 130여만 원이나 걷히기도 했다. 7월 14일 오후 8시, 노동조합 결성신고 후 9일 만에 설립신고증이 교부됐다. 현대엔진노동조합이 탄생한 것이다.
⦁ 참고자료 : 참고자료 : 권용목, 「현대그룹 노동운동사 1, 2, 3, 4」, <새벽 1~4>(석탑, 1988, 198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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