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재인 정부 출범 1년이 지났다. 집권 직후 인천공항을 방문해 비정규직 문제 해결을 약속한 정부였지만, 과연 촛불시위 이후 확산된 ‘노조 만들기’란 흐름에서 긍정적으로 평가할 지는 의문이다. “노동회의소” 등 기존 노조와 별도 기구를 만들려는 발상은 정부가 노조 만들기, 노조를 독립적 행위자로 여길지 의문시되는 발상일 뿐만 아니라, 일부는 노조가 사회적 양극화에 책임이 있는 ‘기득권 집단’으로 간주하기도 한다. 숙련/비숙련 노동자 간의 차별 시정, 노동기본권에 대한 박탈, 이 문제들을 해결하는 과정에서 교섭당사자로서 노조를 인정하는가는 적폐정국임에도 긍정적이지 못하다. 이처럼 비조직 노동자들의 노조 만들기는 개발주의 시기나 신자유주의 시기 모두 간단치 않은 사안이었다. 한영섬유분회 김진수 사망과 ‘노조 만들기’ 김원(노동자역사 한내 연구위원) 문재인 정부 출범 1년이 지났다. 집권 직후 인천공항을 방문해 비정규직 문제 해결을 약속한 정부였지만, 과연 촛불시위 이후 확산된 ‘노조만들기’란 흐름에서 긍정적으로 평가할 지는 의문이다. “노동회의소” 등 기존 노조와 별도 기구를 만들려는 발상은 정부가 노조 만들기, 노조를 독립적 행위자로 여길지 의문시되는 발상일 뿐만 아니라, 일부는 노조가 사회적 양극화에 책임이 있는 ‘기득권 집단’으로 간주하기도 한다. 숙련/비숙련 노동자 간의 차별 시정, 노동기본권에 대한 박탈, 이 문제들을 해결하는 과정에서 교섭당사자로서 노조를 인정하는가는 적폐정국임에도 긍정적이지 못하다. 이처럼 비조직 노동자들의 노조 만들기는 개발주의 시기나 신자유주의 시기 모두 간단치 않은 사안이었다. 오늘은 대선이 있던 1971년, 노동자들의 노조 결성 요구를 무력화하기 위해 테러와 린치를 서슴치 않았던 김진수 사건을 소개하고자 한다. 김진수 사건은 1971년 3월 18일 스웨터 보세가공업체 한영섬유에 근무했던 노동자 김진수가 노조무력화를 위해 고용한 세 명에 의해 드라이버로 머리를 찔러 60여 일 동안 사경을 헤매다가 5월 16일 숨을 거둔 사건이었다. 서울 영등포구 대방동 한영섬유는 스웨터 보세가공업체로 500명 노동자와 110대의 편직기를 갖춘 사업장이었다. 그럼에도 한영섬유 노동조건은 최악에 가까웠다. 하루 평균 10시간 노동, 수출 선적기의 잔업연장, 매달 평균 10일 가량 철야작업을 강요당했다. 뿐만 아니라, 분진으로 직업병으로 고통을 받는 노동자가 적지 않았으며, 형식뿐인 건강진단, 잔업과 철야, 졸음을 방지하는 약물의 복용, 30-40분에 불과한 점심시간, 몸이 아픈 상황에도 사흘 결근이면 해고되었다. 이에 한영섬유 노동자들은 노동조합 결성이 필요하다는 점을 자각하고, 1970년 12월 28일 노동자 6백여 명 가운데 4백여 명이 섬유노조 의류지부 한영섬유분회를 결성하고 분회장에 김용욱을 선출하였다. 노조가 결성되자 사측은 노조가입서를 무효화시키기 위해 조합원들을 강제 퇴사 시켰다가 재입사 시키거나 공장장에게 노조 파괴를 지시하였다. 1971년 1월 4일, 분회장 김용욱을 비롯한 노조간부 4명을 사칙위반 명목으로 해고, 6백여 명을 기숙사에 가두고 외출 금지시키고 노조 때문에 공장을 운영할 수 없으니 휴업수당을 줄 수 없다고 주장하며 노조탈퇴를 강요하였다. 사측의 노조 무력화 시도에 대해 노조측은 부당노동행위구제신청을 제출해 서울시 지방노동위원회로부터 복직명령을 받아냈다. 하지만 사장이 이에 불응하자 1971년 3월 쟁의발생을 신고하였다. 김진수와 그의 죽음, 1971년 5월 김진수는 1968년 19세가 되던 해 한영섬유에 입사해 1970년 조합원으로 가입하자마자 사측이 노조파괴를 목적으로 폐업한다는 말에 자진 사퇴하였다가 재입사하였다. 각종 감시 속에서 가까운 동료들이 회사를 그만두면서 같이 떠나자고 설득했지만, 그는 해고된 조합 간부들에 대한 안쓰러움으로 한영섬유를 떠날 수 없었다. 재입사한 후 김진수는 해고된 노조간부들의 제의로 조합을 탈퇴한 동료 노동자들에게 모종의 활동을 전개했다. 벌였던 것으로 보인다. 공장장의 지시로 노조무력화를 벌였던 최홍인, 홍진기 정진헌 3인은 1971년 3월 18일 오후 5시경 공장 밖에서 술을 마시고 공장으로 돌아온 후 마침 지나가는 김진수에게 시비를 걸었다. 이들의 시비에 김진수가 불쾌한 표정을 짓자 소지했던 드라이버로 김진수의 머리를 찔렀다. 이들은 김진수를 영등포성모병원으로 이송하면서도 그를 린치한 사실을 은폐하려고 넘어졌다고 증언해 의사는 응급조치로 치료를 끝냈다. 그러나 김진수는 계속 피가 흘리면서 의식을 잃자, 세브란스 병원으로 이송됐다. 사측은 세브란스 이송이후에도, “공원들끼리 다투다 넘어져 조금 다쳤다”라고 담당 의사를 속여 제대로 된 조치를 취할 수 없었다. 치료를 받을 수 없었다. 한영섬유분회장과 영등포도시산업선교회 실무자들이 사건의 진상을 알고 병원 진상을 알려 뇌수술을 했지만 김진수는 60여 일 동안 의식불명 상태에 있다가 1971년 5월 16일 숨을 거두고 말았다. 이에 한영섬유 노동자 1백 50여명은 농성을 벌이고 김진수 사건의 진상해명을 요구하는 결의문을 채택하였다.  고 김진수 장례행렬 모습(사진_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오픈아카이브) 김진수 사건의 사회문제화 경찰서는 노동자간의 다툼으로 이 사건으로 처리하고 상해를 가한 자만 입건하였을 뿐만 아니라, 어처구니없게도 이들에게 내려진 형량도 징역 1년 6개월에 불과했다. 이에 영등포 도시산업선교연합회가 진상 조사에 나서자 비로소 한국일보가 4월 10일 이 사건을 노조운동과 관련하여 보도하였다. 하지만 관계기관과 상급단체인 한국노총은 진상 규명에 소극적이었다. 이런 한국노총의 적극성을 보이지 않았다. 사측의 책임 회피에 분노한 한영섬유분회 조합원 10여명은 4월 15일 “노총을 규탄 한다”라고 쓴 런닝 셔츠를 입고 한국노총 사무실에서 농성을 전개했다. 이처럼 사건이 확대될 조짐을 보이자 사 측은 조합원들의 항의를 잠재우기 위해 노조 간부들의 복직에 합의하는 한편, 공장장을 다른 공장으로 전근조치했다. 하지만 영등포 도시산업선교연합회 김경락, 안광수 목사는 지속적으로 김진수 사건을 조사하여 마침내 노조파괴에 앞장선 최홍인, 홍진기의 자술서와 공장장 유해풍이 이들 3명에게 써준 ‘각서’를 손에 넣게 되었다. 산업선교 단체들은 1971년 4월 7일 이 사건에 대한 진정서를 대통령, 각부장관, 노동청장, 한국노총위원장, 17개 산별노조위원장, 관할경찰서장 및 각 일간신문사 및 언론기관에 보내, “앞으로 이러한 비인도적인 불행이 일어나지 않도록” 조처해줄 것과 한영섬유로 하여금 김진수에 대한 충분한 치료와 보상, 한영섬유분회에 대한 부당 노동행위철회 및 노조활동보장을 조속히 실천하게 하라고 촉구하였다. 하지만 한국노총과 섬유노조측이 미온적인 태도로 5월. 김진수가 사망한 뒤에도 장례식도 치르지 못한 채 6월 2일 한영섬유분회는 각계에 재차 진정서를 보냈다. 이런 와중에 대학생들의 지지 방문과 항의시위가 이어졌다. 6월 15일 유가족 4명은 광화문 지하도 입구 동양방송사 앞에 플래카드를 걸어놓고 김진수의 억울함을 호소하는 연좌 농성을 벌였다. 이들의 농성 장면이 보도되자 비로소 사측은 협상에 응했다. 6월 19일, 수습회의에서 사 측은 장시간 격론 끝에 유가족에게 위자료와 병원치료비를 지급하고, 장례비는 사측이 15만원, 영등포 도시산업선교회와 기독교단체가 12만원을 부담하기로 하고 6월 25일 장례식을 치르게 되었다. 한국교회 도시산업문제협의회 주관으로 열린 장례식에서 기독교 학생연맹, 카톨릭 학생연맹 등 9개 단체 회원 2백여 명은, “차라리 철폐하라, 허울좋은 노동조건”이라는 만장(萬丈)을 앞세우고, “김진수의 죽음은 제2의 전태일 사건”이라고 주장하며 정부와 사 측에게 진상을 철저히 밝힐 것을 요구하며 영구차를 앞세우고 시위를 벌였다. ‘노조 만들기’의 과거와 현재 1971년 5월에 사낭한 김진수 사건은 노동조합에 대해 사용자들이 얼마나 적대적인 태도를 가지고 있는가를 적나라하게 보여주었다. 뿐만 아니라 노조상급단체인 한국노총과 섬유노조가 사건을 은폐하려고 기도했다. 전태일 분신이후 일어난 김진수 사건을 계기로 한국노총과 종교계는 협력관계에서 대립갈등관계로 전환하기 시작하였다. 특히 도시산업선교회의 활동은 김진수 사건으로 적극적으로 변했다. 김진수 사건을 통해서 영등포 도시산업선교회는 한국노총 상층부가 쉽게 사측과 협력해 정부의 압력에 굴복하기 때문에 연대가 불가능하다는 것을 깨달았다. 이 전 시기까지 섬유노조나 한국노총 간부들 가운데 적지 않은 사람들이 산업선교회와 밀접한 관계를 맺고 활동을 하고 있었으므로 이들의 충격은 상당했다. 수출주도형 개발독재 체제 아래에서 벌어진 김진수의 억울한 죽음과 각종 정부 기구와 사측, 어용노조에 의한 ‘노조 만들기’ 무력화 시키려는 시도는 ‘노조’의 존재 자체를 적대시했던 과거의 역사처럼 보이기도 한다. 하지만 40여년이 지난 오늘, 촛불이후 출범한 지지율이 80%가 넘는 정권 아래에서도 ‘노조 만들기’가 어렵기는 마찬가지다. 이런 ‘반노조 정서’ 혹은 독립적 노조를 불온시하는 흐름이 이 기나긴 시간을 지나도 여전한 것을 우리는 어떻게 바라보아야 할 것인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