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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국노총 민주화 촉구 점거농성(1980년 5월)
첨부파일 -- 작성일 1980-05-09 조회 322

한국노총 민주화 촉구 점거농성

 

⦁ 시기 : 198059~ 514

⦁ 요약 : 1979년 박정희의 죽음 이후 노동자들의 한국노총 민주화 요구가 거세졌다. 19804월 금속노련 남서울지부 사무실 점거 농성에 이어 59일 금속노련 대의원대회에서 금속노조 민주화운동 투쟁위원회가 구성돼 농성을 벌였고, 513일에는 1천여 명의 조합원들이 한국노총회관을 점거하고 민주화를 촉구했다.

 

 

197910월 독재자 박정희의 죽음은 노동계에 민주화 바람을 몰고 왔다. 이러한 움직임은 먼저 한국노총 금속노련(52개 지부, 13만 조합원)에서 시작됐는데 1026일 직후부터 서서히 확산됐다. 막연한 구상은 1026일 이후 1979년 말 대한전선노동조합 대표자수련회에 참석했던 한달수, 김성오, 김장선, 김송 등을 중심으로 구체화해 19802월 이후에는 이성균, 이종복, 최웅길, 허선희, 이영순 등 노동조합 간부들 사이에서 그 방법을 논의하기에 이르렀다. 금속노련 남서울지부에서도 금속노련에 대한 민주화 요구가 거세게 일어났다. 4월 들어 한일공업, 원풍농기구, 세진전자, 아폴로보온병 등 9개 분회를 대표하는 노동조합 간부 20여 명이 노동조합비를 거둬들여 조합원의 처우 개선보다 사사로운 일에 유용해 온 이중석 지부장을 비롯한 집행부의 퇴진, 이들을 육성해 온 김병용 금속노련 위원장의 퇴진을 요구하며 남서울지부 사무실을 점거하고 10여 일 동안 농성을 하기도 했다.

 

198059일 여의도 한국노총회관 대강당에서 200여 명의 노조 간부들이 참석한 가운데 금속노련 대의원대회가 열렸다. 이 자리에서 대한전선, 대한중기, 동양강철, 새한자동차 등 12개 지부와 남서울지역지부 민주화를 지향하는 분회 간부 및 조합원들은 김병용 위원장이 남서울지역지부, 태양금속, 호남전기, 대한전선, 시그네틱스 등 25개 노조 지부를 징계하는 등 불법으로 노조를 운영해 왔다고 주장하면서 김 위원장의 사퇴를 요구하는 농성을 시작했다. 이들은 금속노조 민주화운동 투쟁위원회’(위원장 이종복·대한중기지부 전 지부장)를 구성하고 불꽃튀는 현장에서 땀 흘리는 조합원 동지들의 고통을 덜기 위해 무엇을 해왔는가? 국가보위법에 의해 단체행동권과 단체교섭권이 묶인 이 마당에 단결권인 노동조합 결성만이라도 적극적이어야 할 집행부가 노동조합 조직을 오도·탄압·기피하여 수많은 노동자를 울렸고, 심지어 결성된 노동조합까지도 팔아먹는 악랄한 만행을 서슴지 않았다. 14년간 권력과 금력에 아부해 온 김병용 체제의 부패를 더 이상 용서할 수 없어 노동자의 살길인 노동조합 민주화의 횃불을 들었다고 선언했다. 또한 투쟁위원회는 노동3권 완전보장 국가보위법 철폐 임금인상 및 근로조건 개선 미조직 사업장의 조직화 동일방직 등 해고노동자의 복직 김병용 퇴진 등을 주장했다. 그러나 김병용 위원장은 금속노련 정기대의원대회를 무기 연기하고 중앙위원회를 소집하여 나의 퇴진문제를 결정짓겠다고 밝혔다. 반대파인 한달수 지부장이 당장 직무대리를 위촉하고 위원장직을 사퇴하라고 맞서 518일까지 금속노련의 업무가 마비됐으나 김병용 위원장은 617일 정기대의원대회에서야 사퇴를 결정했다.

 

한편 한국노총 정한주 직무대행은 사북탄좌, 동국제강, 인천제철, 원진레이온 등에서 폭발적인 시위·농성이 가열되는 데다 한국노총 위원장실마저 동일방직 해고노동자들의 농성장으로 이용되는 등 밑으로부터 노동자들의 열기가 치솟자 그대로 앉아 있을 수만은 없었다. 그러자 국회에서 헌법개정 특별위원회가 구성돼 막바지 절충이 한창이던 51310, 한국노총회관에서 노동기본권 확보 전국 궐기대회를 개최하기에 이르렀다. 이날 주최측인 정한주 집행부가 대회 시작 30분 만에 대회사에 이어 결의문을 낭독하려 하자 원풍모방 방용석 지부장이 단상으로 뛰어올라 마이크를 뺏어 들었다. 그는 첫째, 입법 당사자들이 이 자리에 와서 노동3권의 완전보장을 명시한다는 확답을 할 것. 둘째, 노동3권의 완전보장을 요구하는 서명운동을 전국적으로 전개할 것. 셋째, 어용노조의 두목격인 김영태와 김병용을 이 자리에서 제명 결의할 것. 넷째, 이상과 같은 요구조건이 관철될 때까지 이 자리를 사수하고 농성을 계속할 것을 제안했다. 이에 따라 대회장은 참석자들의 열화와 같은 지지 속에 즉각 농성장으로 바뀌었다. 산업별 노조 대표뿐만 아니라 해고 조합원 124명의 복직을 요구하며 농성 중이던 동일방직, 원풍모방 수백 명의 조합원, 청계피복 조합원, 한일공업 등 금속노조 민주화운동 투쟁위원회소속 조합원 1,000여 명이 큰 힘 주는 조합’ ‘노동가’ ‘노총가등을 부르며 농성을 이어갔다. 형식적으로 참여했던 간부들이 빠지고도 500여 명의 노동자가 출퇴근하며 농성장을 지켰다. 원풍모방에서는 버스 토큰을 40만 원어치나 사다 놓고 퇴근하는 조합원들에게 나누어 주면서 농성에 참여케 했다.

 

1980514, 서울대학교를 출발해 도심으로 향하던 학생 시위대가 한국노총회관으로 우회해 농성노동자들에게 지지를 보내며 함께 가두로 나설 것을 제안했다. 학생들의 진입을 열렬히 환영하던 농성노동자들은 잠시 주춤했다. 농성에 참여한 각 조직 대표들의 요구에 따라 한국노총 자문위원 3명을 포함한 10여 명이 농성 지속 여부에 대해 회의를 열어 중단을 결정했다. 농성은 오후 6시경 성명을 발표하고 해산하게 되었다.

신군부 세력은 노동자들의 이러한 투쟁을 517 비상계엄 확대로 진압했지만, 한국노총 내부의 민주화 바람은 상당한 파급력을 발휘해 노조 민주화 투쟁의 불씨를 완전하게 일소하지 못했다. 그러나 1979년 이후 세계적인 공황 여파가 한국 자본의 축적구조에 심각한 영향을 끼치고 있는 상태였다. 신군부 세력은 저임금 장시간 노동을 통한 노동집약적 착취구조를 재구축하기 위해 강력한 탄압을 전개해 한국노총 간부들을 신군부 세력의 의지대로 재편성했고, 이어 정화조치를 통해 최종공격을 감행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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