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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국수미다전기노조의 일본출정 투쟁(1989년 11월)
첨부파일 -- 작성일 1989-11-15 조회 297

한국수미다전기노조의 일본출정 투쟁

 

시기 : 1989년 11월 15일 ~ 1990년 6월 8일 

 

 

한국수미다전기의 집단해고

 

한국수미다전기는 통신과 전자기기용 코일을 주로 생산하는 회사로 본사는 일본 동경에 있었고, 사장은 쿠시노고이찌(八幡一郞)로 자본금은 약 30억 원에 이르고 있었다. 1972년 자본금 12,000만 원을 전액 출자해 마산수출자유지역에 공장을 설립했다.

 

한국수미다전기는 처음에는 50명으로 출발하여 1970년대 후반부터 1980년대 전반까지 수미다전기 해외생산의 주력공장으로 성장해 1980년대 초에 종업원이 3,000명을 넘고 있었다. 16년 동안 대부분의 여성 노동자들은 하루 4시간 잔업과 월 2회의 휴일 근무조차 무급으로 일했다. 이렇게 수익을 벌어들인 수미다전기 일본 본사는 197048,000만 원이던 자본금이 1987년에는 50억으로 10배 이상 크게 성장했다.

 

1987년 노동자대투쟁 당시 전국적인 노조 결성 흐름 속에서 한국수미다전기에도 811일 노동조합이 결성돼 임금, 권리, 작업환경 등의 개선이 이루어졌고, 1988년에는 노동자들의 권리가 크게 향상된 단체협약을 체결했다.

 

그러자 회사측은 단체협약을 받아들이려고 하지 않고, 노동조건이 더 열악한 중국과 말레이시아에 공장을 설립하고 한국수미다전기를 폐쇄하려는 계획을 추진했다. ‘원가와 인건비 상승을 이유로 임금을 분할지급하는 등 폐업을 위한 사전작업을 계속하는 한편, 노동조합 설립 당시 2,000명이던 노동자들을 희망퇴사자 형식으로 1년 만에 700명으로, 2년 후인 19896월에는 500명으로 감원했다. 이어 생산기재를 중국과 말레이시아로 반출하고 있었다.

 

19891014, 토요일 오후 3시경 일본에서 팩시밀리 한 장이 도착했고, 조합원들은 이 사실을 월요일 아침에 출근해서야 알게 됐다. 이 팩스 한 장으로 450명의 한국수미다전기 노동자들이 일시에 해고된 것이다. 노동조합은 현장에서 생산을 계속했지만 생산에 필요한 원자재와 주문이 모두 끊어진 상태였다. 어쩔 수 없이 회사측의 생산자재 밀반출을 방지하기 위해 공장을 점거하고 농성에 들어가 부당해고 철회를 요구하는 투쟁을 전개했지만 경영책임자는 일본으로 도주한 상태였다. 이에 상급조직인 전노협, 마창노련과 협의 끝에 일본 본사 항의투쟁 외에는 다른 방법이 없음을 확인했다.

 

일본의 말도 관습도 모르는 상태에서 20세 초반의 여성 노동자들이 타국에 가서 투쟁한다는 것은 너무 어려운 일이었다. 대표단은 출발하기 직전 죽을 수는 있어도 패배할 수는 없다는 혈서를 쓰고 결의를 다졌다.

 

일본 출정투쟁

 

일본 항의 대표단은 노조 위원장 정현숙(23), 부위원장 김순미(24), 조사통계부장 박성희(27), 조직차장 정순례(23) 4명으로 구성해 19891115일 일본으로 건너갔다. 노동조합의 요구는 도산과 해고의 실직적인 책임자인 수미다전기 회장이 노조와 교섭에 나설 것 수미다전기 본사는 부당해고 철회와 사과 한국수미다의 경영 정상화 경영 책임자 쿠시노고이찌 사장이 한국에 들어와 단체교섭을 재개할 것 등이다.

 

일본에서 한국 노동자들의 투쟁을 지원해왔던 일본 진출기업 문제를 생각하는 모임일한 노동자 연대 네트워크가 중심이 돼 한국수미다전기 노동자들을 지원하기 위한 한국수미다전기 노동조합과 연대하는 모임이 결성됐다. 이 모임은 수미다전기 본사 항의, 국회 질의, 통산성·외무성·노조·시민단체에 지원요청, 여론과 언론작업, 지원 집회 등을 전개했다.

 

일본에 건너간 대표들은 수미다전기 대표이사 쿠시노고이찌와 교섭에 들어갔다. 그러나 쿠시노는 공장 재개는 불가능하며 공장재개를 전제로 교섭할 수 없다며 노조측 요구를 묵살했고, 실권이 있던 일본 수미다 본사는 한국 수미다가 별개의 회사라는 구실로 교섭에 응하지 않았다. 한국에서는 수미다전기 노동자들이 12월의 혹한 속에 라면 1개로 하루하루 끼니를 때우며 교섭결과를 기다렸지만 한 달이 지나도록 아무것도 진전되지 않았다. 일본 현지의 노동조합과 언론이 지원에 나서 1215일부터는 매일 수미다전기가 교섭에 나서라고 요구하는 항의집회와 시위가 계속됐다. 외무성과 통산성에도 항의문이 전달되는 등 수미다전기를 사회적으로 포위하기 시작했다. 그렇게 해서 1221, 수미다전기가 처음으로 교섭에 응했지만, 노조의 요구를 계속 거부했다.

 

결국 1226, 4명의 노조 대표들은 단식농성에 돌입했다. 혹한의 12월 밤을 단식과 철야투쟁으로 새우는 어린 여성 노동자들의 결사투쟁은 지역 노동자들과 시민·학생들의 분노를 불러일으켜, 이들은 매일 단식 중인 노동자들과 함께 본사 앞에서 밤을 지새웠다. 점차 투쟁이 확산되자 단식농성 돌입 50시간 만에 회사측이 사과와 함께 단체교섭 재개를 약속함으로써 단식농성을 풀었다. 그러나 공장재개를 위한 협상을 하는 동안에도 공장폐쇄 절차를 밟던 수미다전기와의 교섭은 지연될 수밖에 없었다. 213일 노조 대표들의 비자 기한이 만료되자 교대로 귀국하고 출국하면서 투쟁을 이어갔다.

 

한편 19901월부터는 수미다전기 주거래은행인 미쓰이은행을 대상으로 항의투쟁을 전개하고 이 투쟁을 전국으로 확산시켜 나갔다. 미쓰이은행이 한국수미다에 대한 융자를 중단했고, 이들이 도산을 지휘했을 가능성이 컸기 때문이었다. 그렇게 투쟁은 수미다전기를 축으로 해서, 이를 지휘하는 미쓰이은행 등 독점자본에 대한 투쟁으로 확산되기 시작했다.

 

414일부터는 결사항전의 각오로 두 번째 무기한 농성에 돌입했다. 그러나 교섭은 쉽게 타결되지 않다가 한 달이 지난 511일에야 수미다 본사에서 회사측 안이 문서로 제출됐다. 다시 한 달이 지난 68, 61일간의 연좌농성 끝에 체불임금 1개월 이내 지급 퇴직금과 퇴직위로금 지급 퇴직할증금조로 평균임금 2개월분 지급 사내농성중인 노조원 1백여 명에 대한 생계대책비 지급 등에 합의했다. 612일 보고대회에는 지원투쟁을 함께 한 900여 명이 참가해 기쁨을 함께 나누었다. 206일간의 일본원정투쟁을 함께했던 시민, 학생, 노동자들은 아침이슬을 비롯한 한국 노동자들의 투쟁가를 함께 부르며 투쟁을 마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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