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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지역 1987년 노동자대투쟁 서울지역 노동자들은 1970년 이후 지속적인 합법화 투쟁을 전개해온 청계피복노조, 원풍모방노조 등의 투쟁과 함께 1985년에는 구로지역 공동투쟁을 경험했으며, 1987년 6월 항쟁에 참여했다. 그러나 수도 서울이야말로 권력의 중심지이자 투쟁의 폭발성이 전국적일 수 있다는 이중성 때문에 다른 어떤 지역보다 다양하고 철저한 통제가 이루어졌다. 특히 자본측의 교묘한 대응과 정보기관의 좌경용공 조작은 현장 노동자들의 지속적인 성장을 가로막았고, 현장 노동자들과 활동가들을 끊임없이 분리시키는 것이었다. 이러한 이유로 1987년 서울지역 노동자대투쟁은 여타 지역의 투쟁이 소강상태로 접어들기 시작할 때부터, 즉 전국적으로 노동자투쟁이 진정되어가는 한편 정부의 강경방침이 천명되기 시작할 때 불붙기 시작했다.
이런 조건 속에서도 1987년 들어 서울지역 노동자들의 투쟁이 가시화되기 시작했다. 2월 13일 제일피복 노동자들의 임금인상 투쟁, 3월 25일 삼성제약 노동자들의 임금인상 투쟁, 4월 1일 제일피복 민주노조 건설투쟁, 4월의 서울택시 완전월급제 쟁취투쟁, 5월 19일의 인창산업, 6월 21일의 논노 노동자 등 중소기업·섬유봉제·전자업종을 중심으로 투쟁이 계속 이어졌다.
7월 22일에는 구로구 독산동의 (주)태봉에서 회사측의 집요한 방해에도 노동조합 결성에 성공했고, 7월 27일에는 성수동의 영송정기에서 노동조합이 결성됐다. 이후 잠시 잠복기를 거친 노동자들의 투쟁은 8월 13일 OB맥주 영등포 공장과 8월 14일 구로3공단의 금성오디오 노동자들의 농성을 시작으로 구로공단 전역으로 확산됐다. 이렇게 하여 8월 하순경에는 서울 전 지역으로 투쟁열기가 급속히 확산돼 구로공단, 영등포지역, 성수동지역 등에서 폭발적으로 투쟁이 터져 나오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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