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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일중공업 이영일 열사의 분신과 장례투쟁
1990년 5월 3일 ~ 5월 9일
전노협 전국총파업이 전개 중이던 1990년 5월 3일 오전 8시경, 전노협의 통일중공업 대의원 이영일 씨가 분신 후 투신해 오전 10시 50분경 운명했다. 전노협 건설의 토대이자 지역투쟁의 선봉인 마창지역과 1980년대부터 쉼 없이 투쟁해온 전노협 핵심사업장 통일중공업노조는 비통한 심정 속에서 총파업에 돌입했다.
바로 전날, 이영일은 친구 신영호와 술을 마시며 “형사들이 어머님을 괴롭힌다. 5월 10일이 어머님 생신인데, 회사를 그만두고 고향으로 돌아가야 할 것 같다”고 토로했다. 집요한 공작에 갈등하던 이영일 열사는 지긋지긋한 자본의 탄압과 형사들의 협박, 그리고 함께 싸워온 동지들을 뒤로하고 먼저 저세상으로 떠났다. 분신한 제1공장 식당 옥상에는 죽음을 앞두고 삶을 되돌아보며 마지막으로 피웠을 담배꽁초 2개, 우산과 수첩, 명찰과 사원증만 남긴 채 미리 준비한 시너를 온몸에 붓고 불을 붙인 뒤 투신했다. 그는 분신하면서 “군부독재 타도”, “노조탄압 중지”, “회사는 각성하라”고 외쳤다. 그가 외친 구호는 30년 짧지 않은 세월 속에 마지막으로 남긴 그의 희망이었다.
효성이 남달랐던 이영일 열사는 형사들이 7년 동안 투병 중이던 어머니를 찾아와 “자식이 노동운동을 하고 있으니, 그만두게 하라”고 협박했다는 사실을 알고 무척 괴로워하면서도, 노조를 탄압하는 더러운 수법에 분노해 분신한 것이다.
이영일 열사 분신과 경찰의 시신탈취
이영일 열사는 8시경 분신 직후 창원병원으로 옮겨졌으나 10시 50분경 운명했다. 노조는 오전 10시 식당에서 자체 보고대회를 하고 병원에 조합원 700명을 배치했다. 정오에는 오전부터 파업에 돌입해 조합원 집회를 하던 대림자동차노조는 이영일 열사 분신 사망 소식을 전해 듣고 곧바로 병원으로 지원투쟁에 나섰다. 그러나 대림자동차노조 동지들이 도착했을 때는 이미 경찰 1,000여 명이 병원을 에워싼 채 출입을 완전히 봉쇄한 뒤였다. 병원으로 들어가지 못한 마창지역 조합원 300여 명은 병원 맞은편 내동 상가 주위에 모여 구호와 노래를 부르며 대기했다.
한편, 정오부터 26개 사업장 대표가 참여한 가운데 마창투본 비상대표자회의가 열려 1시간 30분간 투쟁 방향과 전술을 논의했다. 회의를 통해 제1지구는 수출공단 후문 민주광장에서, 2·3·4지구는 창원병원에서 집회를 개최한 뒤 오후 3시까지 창원병원으로 조합원들을 총력 집중시키기로 결의했다. 오후 3시 제1지구 조합원들은 한국스타 앞에서 500여 명이 참가한 가운데 이영일 열사 분신 사망 사실을 보고하고 창원병원으로 이동했고, 오후 3시 45분경에는 대림자동차, 통일중공업, 한국루카스, 세신실업, 삼미금속 등의 1,600여 명의 조합원이 병원에 집결해 구호를 외치며 농성에 돌입했다.
오후 3시 50분경 경찰 2,000여 명이 영안실 주변을 에워싸 병원은 완전히 봉쇄돼, 농성 중이던 조합원들과 계속 대치했다. 이때 회사와 경찰은 마산에 도착한 가족들을 먼저 빼돌려 로얄호텔 커피숍에서 사건을 왜곡하고 회유하기 시작했다.
마창투본은 이영일 열사 분신 사망 속보 7,000장을 긴급 제작해 오후 6시 40분부터 시내 곳곳에서 배포하며 가두투쟁을 전개했다. 200여 명이 코아빌딩 앞, 어시장, 동방빌딩 주변에서 1시간 30분 동안 산발시위를 벌여 8명이 연행되기도 했다.
마창투본은 이날 저녁 9시부터 10시 30분까지 비상대표자회의를 열어 △5월 4일 점심시간에 추모제 개최 △5월 4일 오후 3시 민주광장에서 추모집회 개최 △일체의 특근 거부 등을 긴급 결정했다.
그러나 1990년 5월 4일 새벽 1시 30분, 백골단이 유리창을 깨고 들어와 영안실 입구와 화장실 입구를 점령, 시신을 탈취하려고 진입을 시도했다. 약 5분간 마창노련 정방대원과 통일중공업노조 조합원 200여 명이 결사 항전했지만 결국 149명이 창원경찰서로 연행되고 말았다.
5월 9일 ‘노동열사 고 이영일 전국노동자장’ 장례투쟁
적들이 시신을 탈취해 갔지만 통일중공업노조와 마창노련, 그리고 전노협은 ‘전국노동자장’으로 이영일 열사를 천만 노동자의 가슴에 묻기로 결정했다.
5월 9일 오후 2시 통일중공업 정문과 후문이 경찰 24개 중대 2,000여 명에 의해 봉쇄된 상태에서 400여 명이 참여해 영결식을 했다. 원천봉쇄로 영결식에 참여하지 못한 노동자 400여 명은 창원대에, 200여 명은 경남대에 집결해 경찰과 공방을 주고받으며 ‘민자당 발족 규탄집회’를 열었다. 2시 25분경에는 한국중공업 노동자들이 수출자유지역 후문에 3,000여 명 결집했고, 통일, 대원강업, 경남금속 노동자들도 약 1,000여 명이 합류했다. 코리아타코마도 2시 45분경 무학주조 앞에서 전경과 대치하여 투쟁을 전개했다. 장례식은 오후 3시 시작돼 노동조합과 옥상 2층, 2공단 잔디밭으로 행진하고 오후 5시경 마무리했다. 장례식은 끝났으나 가두투쟁은 저녁 9시까지 격렬하게 계속됐으며 이 과정에서 30여 명이 연행됐다. 마창지역에서는 이날도 조퇴투쟁을 전개해 총 23개 사업장 5,150명이 참여했다.
이영일열사 약력 △1962년 9월 25일 생(당시29세) △유족 : 어머니 박태간(63세), 형 이영원(31세), 동생 이영명(21세) △주소 : 경기도 김포군 고촌면 신곡리 550-3(88/127) △본적 : 강원도 양양군 양양읍 조산리 산 2 △강원도 속초고등학교 졸업 △1989년 4월 3일 통일중공업 입사 △조사통계부 차장 역임 △1990년 2월 16일 보궐선거로 대의원 당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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