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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시자열사 장례투쟁과 한국전력노동조합 민주화투쟁
○ 시기 : 1996년 1월 12일 ~ 1996년 1월 28일
○ 요약 : 전국전력노동조합 한일병원지부 김시자 위원장이 노조 민주화를 요구하며 분신했다. 이를 계기로 전력노조 민주화 투쟁이 본격화됐고 발전노조 건설에 이르렀다.
1996년 1월 12일, 경주 교육문화회관에서 열린 전국전력노동조합(전력노조) 54차 중앙위원회 안건으로 김시자 한일병원지부위원장과 오경호 광주전력지부위원장에 대한 징계(정권) 건이 상정돼 있었다. 최태일 집행부의 짜여진 각본대로 징계가 이루어지기 직전, 김시자 위원장은 “징계는 부당하다” “이런 상태로 그냥 있으면 노조 민주화는 이루지 못한다”는 말을 남기고 밖으로 뛰쳐나갔다. 잠시 후 2시 25분쯤 김시자 위원장은 온몸에 휘발유를 끼얹은 채 불길에 휩싸여 회의장 안으로 뛰어 들어왔다.
2시 40분 경주 동국병원으로 후송됐다가 저녁에 서울 한일병원으로 긴급 이송 중이던 1월 13일 새벽 위급상황이 발생해 서울 중앙병원 응급실로 옮겼으나 3시 4분 끝내 숨을 거뒀다. 이런 상황에서도 최태일 집행부는 각 지부로 연락을 취해 “별일 아니다” “괜한 일로 수선 떨 필요 없다”며 사건 은폐·축소에만 급급했다.
전력노조는 대표적인 어용노조였다. 1990년 간선으로 위원장에 선출된 최태일은 그 간선제 덕분에 1993년 4월에 다시 3년 임기 위원장에 당선됐다. 그러나 1994년 3월 정년 퇴임이 예정돼 있던 최태일은 1994년 1월, 임금 3% 인상에 합의해주고 그 대가로 자신을 포함한 노조 간부 13명의 정년만 노조 임기가 만료되는 시점까지 예외적으로 연장받는 데 직권조인했다.
이에 노조 내 민주파 20여 명이 1달 동안 밤샘농성을 벌였으나 사측의 교묘한 탄압으로 해산당하고, 법적투쟁조차 사측의 막강한 로비와 노조 집행부의 공작으로 실패하고 말았다. 곧바로 최태일은 ‘조직 분열 행위’라는 구실로 농성에 참가한 지부위원장 7명의 노조 전임을 해제했다. 회사는 감사실을 앞세워 해당 지부위원장들을 ‘취업규칙 위반’이라며 탄압, 농성을 지지했던 노조 간부들을 부당전보하고 장기영 영광원자력지부위원장은 해고, 유상선 여수화력지부위원장은 징계위에 회부했다.
1995년 4월 노조 위원장 선거를 앞둔 최태일 집행부 역시 노조를 비판하는 김시자 위원장과 본부위원장 출마 예상자인 오경호 광주전력지부위원장을 규약 위반을 구실로 조합원 자격을 박탈해 선거에 참여하지 못하도록 압박했다. 김시자 위원장이 분신한 배경에는 이러한 어용노조의 전횡과 노조 내 민주파에 대한 극심한 탄압이 있었다.
13일 새벽 김시자 위원장을 한일병원 영안실로 이송하고, 곧바로 ‘고(故) 김시자 열사 분신대책위원회(분신대책위)’가 구성됐다. 분신대책위 위원장은 김채로 고리원자력지부 위원장이, 집행위원장은 신민규 본사노조지부위원장이 맡았다.
13일 오후 7시 추모집회에 전력노조 조합원을 비롯해 철도노민추, 한국통신, 기아기공, 공노대, 민주노총 등에서 200여 명이 참가해 ‘어용노조 집행부 퇴진’ ‘노조 전임자 축소 반대’ 등을 요구했다. 이날 밤 조문 온 최태일은 그의 뻔뻔스러운 모습에 격분한 조합원들에게 이끌려 영안실에서 김말룡 국회의원과 노동부 근로감독관 입회 아래 집행부 총사퇴서(사퇴서 제출 시 정년 만료로 자동 사직)를 작성하고 조합원들 앞에 무릎을 꿇었다.
1월 14일 한일병원 추모집회와 수도권 조합원 집회를 시작으로 연일 추모집회, 규탄집회, 선전전, 본사 항의방문 등이 이어졌고, 15일부터 분신대책위 선민규 집행위원장이 단식농성에 돌입했다. 하지만 19일 오전 사복경찰 200여 명과 전경 2개 중대가 사전구속영장이 발부된 분신대책위 간부 6명을 연행했고, 당일 예정된 본사 항의 집회를 막기 위해 영안실에 들이닥쳐 노동자·학생 79명을 강제연행했다. 1월 20일 풀려나기 시작한 연행자들이 투쟁의 의지를 새롭게 가다듬고 있었으나 21일, 가족들은 분신대책위와 상의 없이 가족장을 치러버렸다.
이에 분신대책위는 21일 오후 결의대회에서 “김시자 열사의 장례는 어쩔 수 없이 치렀지만, 전력노조 민주화투쟁은 이제부터 시작”이라는 각오를 밝혔다. 28일 종묘공원에서 열린 ‘故 김시자 열사 정신계승 및 한국전력노조 민주화를 위한 전 조합원 결의대회’가 끝난 직후 한전노조 조합원들은 비상총회를 열어 참여자들의 연락망을 구축하고 ‘김시자 열사 정신계승 및 전력노조 민주화 추진위원회(한전노민추)’를 결성했다.
김시자 열사의 정신은 한전노민추로 이어져 전력노조 민주화의 직접적인 계기로 작용했으며, 이를 바탕으로 이후 한국발전산업노동조합(발전노조)이 건설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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