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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울산지역 1987년 노동자대투쟁
첨부파일 -- 작성일 1987-07-05 조회 300

울산지역 1987년 노동자대투쟁

 

  

회사 중심의 노사협의회와 어용노조에 대한 노동자들의 저항

 

울산지역에는 현대그룹 산하 15개 이상의 대기업들이 있었으나 노동조합이라고는 단 한 군데도 없었다. 그래서 이들 기업의 노사관계는 노사협의회에 의해 조정되어 왔다. 그러나 노사협의회는 항상 노동자의 입장보다는 회사측의 입장을 받아들이는 쪽으로 결정을 내려왔다. 이에 노동조합이 없었던 곳에서는 노동조합을 결성하기 위한 노력을 계속해 왔다. 한편 노동조합이 있어도 노동자들의 의사를 제대로 반영하지 않아 태광산업, ()럭키 등에서는 어용노조에 대한 노동자들의 불만이 쌓여왔다. 울산지역 노동자들에게 있어서 민주노조는 그 자체가 꿈이며 희망이었다.

 

열악한 노동조건

 

울산지역 노동자들의 임금은 의외로 낮은 수준이었다. 기능직 현장 노동자들의 임금을 보면 현대정공의 경우 고등학교 졸업 후 입사해 5년 동안 근무한 기능공이 시급 680원이었다. 이는 월 기본 근무시간을 208시간(26×8시간)으로 할 때, 기본급이 14만 원 밖에 안된다는 의미다. 10년 경력자의 경우 기본급은 19만 원 정도에 머물고 있다. 이러한 실정은 현대그룹 계열기업 대부분이 비슷한 실정이다. 이 때문에 많은 노동자가 월 300시간 이상의 장시간 노동에 시달리고 있었으며, 심지어 한 달에 503시간까지 작업을 한 사람도 있었다.

 

한편 현대그룹 계열기업은 대부분 정상 출근 시간인 오전 8시 이전에 출근하도록 강요해왔다. 물론 8시 이전의 작업시간은 전혀 임금에 계산되지 않았다. 또 분임조(품질관리와 불량감소를 위해 노동자를 교육하고 노동자들 간 의견을 교환하기 위해 회사가 만든 조직) 시간도 근로기준법상 임금을 지급해야 하나, 그렇지 않은 회사가 대다수였다. 이외에 공해수당, 가족수당, 근속수당도 아예 없거나 쥐꼬리만큼씩 지급돼 노동자들의 불만을 샀다.

 

또한 재벌기업 노동자들의 투쟁에서 특징적으로 나타나는 두발 자율화, 출퇴근복 자율화 요구에서 알 수 있듯이 군대식·가부장적인 노사관계가 강요돼 노동자들의 불만을 초래했다. 인사고과제에 따른 상여금 차등지급제도 노동자들의 불만을 가중시켰다.

 

울산지역 노동자대투쟁의 개관

 

한국 최대의 공업지역인 울산에는 공단지역에만 251개 업체 85,000여 명의 노동자가 근무하고 있었고, 온산공단과 공단 주변의 기업체까지 합치면 533개 기업, 126,900여 명의 노동자가 생활하고 있었다.(1985420일 기준 노동부 통계에 따르면 울산지역 제조업·서비스업 포함 전산업 노동자 수는 157,000)

 

75일 현대엔진노동조합 설립에서부터 715일 현대미포조선소 노조설립 신고서류 탈취사건, 721·24일의 현대중공업과 현대자동차 어용노조 설립신고 등을 거치며 현대자동차, 현대중공업, 현대정공 등이 속속 노동조합을 결성했다. 이러한 현대계열사의 투쟁은 곧바로 다른 사업장에 영향을 끼쳐, 727일 태광산업과 동양나이론이 어용노조 퇴진과 임금인상을 요구하며 파업농성에 돌입했다. 태광산업의 경우 자발적으로 구성된 지도부가 7일간의 파업농성을 조직적으로 주도했는데, 농성이나 협상 과정에서 노동자들의 의견을 민주적으로 수렴함으로써 1,600여 명의 단결된 투쟁을 묶어내고, 결국 요구조건을 관철할 수 있었다.

 

731일에는 울산여객을 중심으로 울산시내 6개 버스업체 기사노동자 전원이 파업농성을 전개함으로써 울산 전역을 마비시켰다. 8월 들어서는 한국프랜지, 고려화학 외에도 고려아연(83, 650), 효성금속, 효성알미늄(84, 500여 명), 대한알미늄(84, 150여 명), 경기화학(85, 70여 명), 럭키울산공장(85, 1,000여 명), 한성기업(85, 100여 명), 진양(86, 200여 명) 등에서 파업농성이 줄을 이었다. 현대그룹에서 시작된 파업투쟁이 울산 전역으로 빠르게 확산된 것이다.

 

한편 현대정공 창원공장에서 730일 노동조합을 결성하고 83일까지 파업농성에 들어감으로써 울산지역 노동자들의 투쟁은 다른 지역으로 옮겨져 들불처럼 번져나가기 시작했다.

 

울산지역 노동자대투쟁의 주요 양상

 

울산지역의 투쟁은 주로 회사 내 파업농성으로 진행됐는데, 농성이 진행되는 동안 참가자 수가 계속 늘어났다. 태광산업이 대표적인 경우로 처음 400여 명으로 시작한 파업농성이 전체노동자 2,500명 중 절반이 넘는 1,600명까지 참여하는 투쟁으로 발전해 갔다. 농성과정에서 자체방어를 위한 경비대 혹은 순찰조 등을 조직해 경찰과 회사를 비롯한 파업 방해세력의 침입을 막고 내부규율을 강화하여 술 취한 사람이 농성장에 들어와 행패를 부리거나 과격한 행위를 저지르는 경우를 예방했다.

 

또한 현대엔진과 현대미포조선을 중심으로 다른 사업장에 대한 지원과 격려를 아끼지 않았다. 이들은 현대자동차의 농성투쟁이나 회사측과의 협상테이블에 함께 참여하는 것은 물론, 태광산업 농성장을 방문해 격려연설을 했다. 현대정공에서 구속노동자가 발생하자 경찰서 항의방문 등을 수행함으로써 연대투쟁의 분위기를 고조시켰다.

 

한편 가족과 시민들의 지원과 참여도 두드러졌다. 기혼 남성노동자들이 사원주택이나 공장 가까운 곳에서 가족과 함께 거주하는 경우가 많았기 때문에 노동자들의 파업농성이 진행될 경우 많은 가족들이 농성장 주변에서 지켜보거나 지원투쟁을 벌였다. 이 점은 미혼 여성노동자가 중심이었던 서울 구로지역에서 부모들에게 겁을 주어 농성대열을 분열시키고 회유했던 사례와 비교되는 점이다.

 

태광산업은 모범적인 가족투쟁의 전형을 보여준다. 농성 초기에 사측이 노동자 가족들을 회유하고 협박했지만, 농성 3일째부터 가족들이 오히려 농성 대오에 참여해 회사측의 탄압을 깨뜨리는 원동력이 됐다. 812일 럭키 울산공장 농성장 앞에는 백발이 성성한 노인들과 초등학교도 들어가지 않은 것 같은 어린이 수십 명이 모여 투쟁을 지지하기도 했다. 현대그룹의 경우 가족들이 아예 발 벗고 나서 3,000여 명의 독자 대오를 형성해 투쟁에 참여하기도 했다. 

 

⦁ 참고자료

- <새벽 2>, 석탑, 1988, 192262쪽, 한국기독교사회문제연구원

- <78월 노동자 대중투쟁>, 민중사, 198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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