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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진중공업 노동자와 함께하는 희망의 버스_서동석 (32호)
첨부파일 -- 작성일 2011-07-03 조회 960
 
한진중공업 노동자와 함께하는 희망의 버스
 
서동석 (통일문제연구소 회원)

우리 사는 시대를 일컫는 표현은 다양하다. 누구는 첨단정보화의 시대라느니, 누구는 청년백수의 시대라느니 또 세계화의 시대라고 하는가 하면 배신과 사기가 넘치는 시대라고 규정하는 이도 있다. 아무려나 시대를 뭐라고 하던 우리의 시대는 자본의 횡포가 그 어느 때보다 극심한 시대인 것만큼은 틀림없다. 그러다보니 환호만 있고 감동은 없는 시대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자본이 만든 허상에 끌려 헛된 함성만 질러댈 뿐 참으로 사람의 가슴을 뭉클하게 하는 감동은 찾기 어렵다. 거대한 운동장에 구름처럼 사람이 모이지만 그네들은 고작 관객으로 잠깐의 흥분에 자신을 잃어버린다. 그사이 사람의 넋을 앗아가는 자본에 눌려 지금 이 땅의 노동자들은 피눈물을 흘리고 있다. 부산 영도에 있는 한진중공업 노동자들 역시 외로운 투쟁을 오늘도 이어가고 있다. 이들에게 연대와 위로의 투쟁을 함께 하고자 한국노동운동사에 처음으로 희망의 버스가 등장했으며 이 버스는 지난 611일 부산을 향해 떠났다.
 

<희망버스 출발지인 서울시청 옆의 재능교육 본사와 환구단 입구. 대기중인 버스에 가려 농성장이 제대로 보이지 않지만 버스 뒤엔 벌써 숱한 이들이 모였다.>

서울에서 출발하는
정리해고, 비정규직 없는 세상을 위한 희망의 버스’(희망버스)는 서울시청 앞 광장의 동쪽편, 재능교육빌딩 옆의 환구단 입구 마당에 설치된 재능교육해고자 농성장을 집결지로 잡았다. 학생들의 학습지회사인 재능교육은 학습지교사들이 노동조합을 만들자 조합원 전원을 해고하였다. 이에 해고자들은 노동자 복직과 단체협약 준수를 요구하며 20075월부터 무려 15백일에 가까운 날 동안 농성하고 있다. 지난 4월에는 유명자 지부장이 24일째 단식농성 끝에 병원에 입원하기도 했다. 2008년부터 회사 쪽이 법원에 집회·시위 금지 등 가처분 신청을 내어 조합원 개인당 최고 3억 원의 
재산과 노동조합 집기류 등이 압류되거나 압류 절차가 진행 중이다. 회사는 노조 간부에 대한 20억 원 손해배상 청구 소송도 냈다. 아이들 학습지로 돈을 벌어 노동자를 탄압하는 거대한 괴물이 된 회사다.
희망버스에 동참을 호소하는 소설가 공선옥은 이런 호소문을 배포하였다.
이 버스는 다만 고공농성 150일째인 김진숙과 한진중공업 해고자들만을 위한 버스가 아닙니다. 우리 모두를 위한 버스입니다. 우리 사회 전체의 민주주의를 촉진하기 위한 간절한 염원의 버스입니다. 모든 정리해고자들과 비정규직들의 절망을 딛고 우리 사회가 조금은 안전하고, 평등하고, 평화로웠으면 하는 희망을 담은 버스입니다. 무엇보다 즐겁고 유쾌한 버스입니다. 자발적이고 수평적인 연대의 문화를, 그 기쁨과 환희를 나누는 버스입니다. 이 사회는 늘 우리에게 낙담과 무거움을 강요하지만 우리는 그럴수록 더 밝을 것입니다.
버스는 611일 저녁6시에 재능교육 해고자 농성장을 출발하였다. 서울에서 모두 11대의 희망버스가 부산으로 떠났다. 운전기사 포함하여 45인승버스이니 줄잡아 5백 명에 가깝다. 글쓴이는 그 가운데 2호차에 올랐다. 2호차는 특별하게 노나메기 희망의 버스라고 불렀다. 좀 귀에 설은 노나메기는 백기완선생이 주창하는 너도 일하고 나도 일하며 그리하여 너도 잘살고 나도 잘살되 올바르게 잘사는 세상을 이른다. 20107, 백선생의 주창에 김세균 서울대 정치학과 교수가 호응하여 노나메기재단을 설립하고자 준비모임을 꾸렸다. 재단설립운동은 올해 들어 본격적으로 추진, 지난 64일 서울대 강당에서 재단설립위원회 창립대회를 열었다. 2호차는 백선생을 비롯하여, 김세균 양길승 박석운 등, 이 재단설립추진위원의 임원들이 탔다. 그런데 2호차에는 아주 특별한 탑승자들이 더 있었다. 인천 만석동의 기차길옆 작은학교의 교사와 학생들이 그들이다. ‘작은학교는 대안학교가 아니라 동네 이모, 삼촌이 꾸려가는 공부방이다. 이곳의 교사와 어린 학생들이 노동자농성을 지원하고자 나섰다. 교사와 초등학생, 중학생 등 15명 정도가 대담한 체험교육에 동참했다.
 
예정대로라면 이날 밤 11시에 부산 영도대교 건너 한진중공업으로 가는 삼거리에 집결하여 약 20분 동안 촛불행진을 하기로 하였으나 버스가 늦게 도착하여 하루를 넘긴 12030분부터 촛불행진이 시작되었다. 서울을 비롯하여 전주, 순천, 광주 그리고 수원에서 희망버스로 모인 대중이 7백 명을 넘었다. 서울에서 부산을 향하면서 전해들은 소식에 따르면 약 20개 중대에 이르는 경찰병력이 대기 중이라고 했다. 과연 엄청난 병력이 촛불행진을 둘러쌌다.


<영도조선소 정문 앞 도로가 촛불행진을 한 농성지원단 인파로 메워졌다.>
 
대열은 민주노총 전국운수산업노조 화물연대 부산지부가 마련한 방송차량의 인도에 따라 움직였다. 행진 중간에 경찰의 차단과 방해가 있었고 그때마다 이를 항의하는 몸싸움이 약간 있었지만 대열은 평화롭게 한진중공업 영도조선소에 닿았다. 토요일에서 일요일로 넘어가는 깊은 밤, 촛불행진의 노란불꽃이 거리를 수놓았고 대열의 노래와 구호가 영도의 밤을 술렁이게 하였다. 조선소 정문은 회사 쪽이 고용한 용역깡패, 재벌의 백골단이 철통의 벽을 치고 있었다. 그들이 쓴 노란안전모가 이상하리만치 섬뜩하였다. 부산지역의 지원단의 합세로 농성지원단의 수는 더 늘었다.

 농성지원단인 희망버스가 부산에 오기로 한 바로 전날, 한진중공업은 이들을 고용하여 조선소 안에서 농성 중이던 노동자에게 무차별 폭력을 썼고 조선소의 정문과 나머지 출입문에 컨테이너박스를 쌓아, 이것들을 서로 용접하여 철의 저지선, ‘산성을 만들었다. 그것도 모자라 대형중장비로 이 산성을 고정시켰다. ‘명박산성에 빗대어 한진중공업의 조남호의 이름을 딴 남호산성이었다. 외부에서 조선소로 들어가는 일은 도저히 불가능한 상태였다. 경찰은 이 용역깡패의 폭력을 방관하였을 뿐만 아니라 조선소 정문 바깥쪽에 겹겹으로 병력을 배치하는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방송차량이 정문에서 떨어진 김진숙동지가 농성하고 있는 85호 크레인이 보이는 곳으로 이동하자고 안내하여 대열은 어디가 어딘지 구분이 되지 않는 어둠 속에서 차량을 따라 움직였다. 남쪽에는 장마전선의 영향으로 밤하늘엔 달빛도 없어 더욱 캄캄하였다. 어둠 속에서 방송차량의 지시에 맞춰 85호크레인이 보이는 찻길에서 김진숙동지에게 뜨거운 격려의 함성을 보냈다. 그리고 희망버스 참가자들은 공장담에 잇닿은 인도에 올라섰고 방송차량과 부산지역 지원단은 다시 정문 쪽으로 투쟁의 대열을 이끌었다. 희망버스 참가자들은 좀 어리벙벙하였다. 도로를 점거하고 연좌농성이라도 해야 할 판에 왜 담벼락의 인도로 올라서라고 하는 걸까. 이 어두운 밤에. 경찰은 인도로 올라선 대열에서 2미터 정도 떨어져 있었다.

  <봉쇄된 조선소 안으로 넘어가는 백기완 선생. 누구도 눈치채지 못한 전격적인 기습작전이었다.
어쩌면 이 작전으로 이번 농성지원단이 노동운동사에 빛나는 기록을 남기게 되지 않을까.>


바로 그때였다. 조선소 안의 노조원이 담벼락 위에 보이는가 싶더니 곧바로 철제사다리가 내려졌다. 전혀 예상치 못한 기습작전이었다. 군산과 전주에서 희망버스를 이끌고 온 문정현신부가 고령에도 날쌔게 사다리를 올랐다. 사다리는 담을 타고 속속 걸쳐졌다. 백선생도 담을 넘었다.
멍하고 있던 경찰이 달려들어 한쪽에서는 거친 몸싸움이 벌어졌다. 나도 사다리를 타고 담을 넘어 조선소 안으로 들어갔다. 누구도 눈치 채지 못한, 기습작전은 성공했다. 조선소 안으로 들어온 지원단과 농성 중인 조합원이 합세했다. 공장을 울리는 손뼉과 구호가 담을 넘은 사람들을 반겼다. 순식간에 4백 명 정도가 안으로 들어왔다. 이제 대부대를 이룬 대열은 곧 정문으로 이동했다. 외부와 완벽하게 차단된 정문의 안쪽에는 60명가량의 용역이 버티고 있었다. 차단된 출입문, 그것이 오히려 외부의 지원을 받지 못하는 결과를 가져왔다. 용역은 정문 경비실 옆에 바짝 조여든 형식으로 대열을 만들었고 해산과 퇴거를 요구하는 우리 쪽에 분말소화기를 쏘아댔다. 바로 옆 사람도 확인할 수 없는 분말이 대열을 덮쳤다. 하지만 곧 조합원의 공격에 맥도 못쓰고 자신들이 쌓은 산성의 꼭대기로 내몰렸고 퇴로가 없는 상황에서 정문바깥으로 뛰어내려 도망갔다. 현장은 완전 접수되었다. 조선소 안은 이제 조합원과 지원단의 차지가 되었다. 정문 경비실 바깥에서는 여전히 민노총 부산지부의 조합원들이 경찰과 대치하며 집회를 계속하고 있었다. 공장을 장악한 노조원과 지원단은 정문 안쪽에서 집회를 가졌다.

 

<정문 안쪽에서 문을 지키던 용역깡패들이 분말소화기를 쏘아대고 있다.
이들의 저항은 금방 제압되었으며 남호산성을 넘어 도망갔다.>


한창 집회의 열기가 오르고 있던 무렵 경비실을 통해 바깥의 참가자들이 속속 들어왔다. 농성지원단을 위한 물과 음식, 필요한 물품을 저나르는 조합원과 봉사자들이 쉴 새 없었다. 2시쯤, 그들 틈에 섞여 이정희 민노당 대표, 조승수 진보신당 대표, 권영길 의원, 정동영 의원, 이종걸 의원이 함께 들어왔다. 이들은 이날 낮에 부산에 내려와 한진중공업의 대표 등을 만나 원만한 해결을 모색해보았지만 그리 좋은 성과는 없었다는 말을 전하였다. 아마 배우 김여진도 이때쯤 들어온 듯하다.

 참석대중은 밤2시반 무렵에 김진숙 한진중공업 노조 지도위원이 농성하고 있는 85호크레인이 올려다 보이는 곳에 설치된 무대 주변으로 자리를 옮겼다. 이때부터 연대와 위로의 문화제가 이어졌다. 최규종 한진중공업 지회장의 인사말에 이어 쌍용자동차 해고노동자의 연대사가 이어졌다. 그렇게 1시간 가까이 문화제가 진행되고 나서 땅에서 35미터나 올라간 크레인의 조종실 난간에 나와 있던 김진숙 지도위원이 직접 감사의 말이 있었다. ‘살다보니 이런 날이 진짜 오기는 오는군요라고 말문을 연 연설은 영도조선소 전체를 숙연하게 만들었다. 그녀의 한마디 한마디는 듣는 이로 하여금 가슴을 저미게 하였다. 하긴 그녀는 8년 전 김주익동지가 바로 그 85호크레인에서 자결을 한 뒤 방에 불을 지피지 않았다고 한다. 그를 지켜내지 못한 죄책감에, 자본가에게 밀려난 분개심을 잊지 않으려 냉방에서 살았다. 김주익 열사가 삶을 마친 그 85호크레인 조종실에 들어가는 바로 전날 15일 밤에야 방을 따숩게 하였으니 그녀의 말은 말이 아니었다. 저 깊디깊은 땅 속에서 그간 억압과 수탈에 숨진 모든 무지랭이들의 설움을 담아내는 넋들의 울림이었다. 그녀는 말했다. “ 지금까지 여러분들이 이 85호 크레인을 생각하셨다면 이제부터는 우리 조합원들을 기억해주십시오. 2003년 그 모질었던 장례투쟁의 와중에 장애를 가지고 태어난 현서, 다림의 애비, 고지훈, 김갑렬을 기억해주십시오. 짤린 동생을 지키기 위해 끝까지 함께 싸우는 최승철을 기억해주십시오. 말기암으로 언제 운명하실지 모르는 아버지보다 동료를 지키기 위해 농성장을 지키는 박태준을 기억해주십시오. 비해고자임에도 이 크레인을 지키고 있는 한상철, 안형백을 기억해주십시오. 그리고는 백기완선생님, 문정현신부님, 박창수동지 아버님, 박종철동지 아버님 진심으로 고맙습니다. 큰절이라도 올리고 싶을 만큼 뜨겁게 고마운 여러분. 제가 삶과 죽음의 경계에서 비틀거릴 때마다 천수보살의 손으로 제 등을 받쳐주신 여러분. 꼭 이기겠습니다. 157일 아닌 1570일을 견뎌서라도 반드시 이기겠습니다.”는 다짐으로 인사를 마쳤다. 그녀의 진정하고 절절한 심정을 고스란히 전해 받은 참석자들은 뜨거운 손뼉으로 화답하였다.


<크레인 위 김진숙 지도위원에게 박종철 인권상을...>


박종철열사기념사업회는 해마다 6월에 박종철인권상을 수여하는데 이번 2011년에는 김진숙 지도위원이 수상자로 선정되었다. 3시반, 인권상 수여식이 있었다. 무대에는 박종철열사 아버님과 박창수열사 아버님이 올랐다. 인권연대 박래군동지가 김진숙동지를 대신하여 받았다. 그리곤 어느새 영도조선소에 희뿜한 새벽이 먼데서부터 다가오고 있었다. 그것은 꼭 노동자의 햇새벽이 오를 때까지라던 노동의 새벽이었다. 그 새벽을 맞는데 흥을 돋운 건 날나리들의 난장이었다. 우리가 익히 아는 바라면 투쟁현장에서 문화선전은 우리네 전통풍물이 기본이었다. 하지만 세대교체가 되고 있는지 뽕짝가락이 공장안을 들썩이게 하였다. 알록달록한 장식에 몸빼바지까지 맞춰 입은 날나리들이 몸을 꼬고 소리를 질렀다. 그런 흥이라면 몇날며칠을 자지 않고 난장을 이어갈 만큼 열정적인 날나리였다.

밤을 꼬박 지샌 조합원과 지원단이 저마다 무리를 지어 아침끼니를 해결하던 무렵 비가 추적추적 내렸다. 비를 머금은 바닷바람이 추웠지만 연대의 마당에는 대동한마당이 그치지 않고 이어졌다. 용산참사현장에서 '끝나지 않는 미술전'을 열었던 파견미술가모임동지들'촛불방송국'을 운영해주었던 미디어활동가들, 판화가 이윤엽, 만화가 이동수의 얼그림(캐리커쳐) 등 다양한 참여공간이 열리고 있었다. 이를 크레인조종실에서 내려다 본 김진숙동지는 이날 낮3시에 마무리집회를 마치고 공장을 떠나는 희망버스참가자들에게 이렇게소감을 밝혔다.



<투쟁에 연대하며 힘을 모으는 희망버스 동지들>
 
“… (154천볼트 송전탑에서 홀로 88일을 견뎠던 분) 그 강병지동지가 마침내 살아서 땅을 딛고 여기를 오셨습니다. 그리고 오늘 새벽 날나리들과 어울려 춤을 추던 강병지동지를 보았습니다. 그 앞에서 함께 어울려 춤추던 한진지회 박성화동지 또한 보았습니다. 박창수위원장 시절 상집간부를 했고 해고됐고 징역 3번 갔고 김주익 곽재규의 목숨 값으로 15년 만에 복직되었다가 이번에 다시 해고되었습니다. 그 두 사람이 날나리들과 어울려 춤추는 모습을 보며 저는 벅찼습니다. 손뼉을 치면서도 눈물이 났습니다. 그리고 그 모습에서 제가 꿈꾸는 세상의 모습을 보았습니다. 정규직 비정규직 해고자 그리고 청춘들이 아무런 벽도, 아무런 구분도 없이 저렇게 어울려 춤추는 세상, 제가 꾸는 꿈과 여러분이 꾸는 꿈이 다르지 않을 거라 믿습니다. 그 꿈을 위해 여기까지 달려오셨고, 어제 오늘 그 꿈으로 가는 징검다리 하나를 놓았습니다. 사람이 있는 공장을 철옹성으로 만든 저 오만한 자본에 파열음을 냈습니다. 어떻게 연대해야 되는지 누구의 손을 잡아야 하는지, 어떤 연대가 진정한 힘을 가질 수 있는지도 우리 눈으로 확인했습니다.”라고 하였다.
 
점심 무렵에는 비는 그쳤다. 이번 연대와 위로에는 참으로 다양한 이들이 뜻을 모았다. 그야말로 대동한마당의 현장이었다. 새벽 동터오던 무렵, 한진 노동자 가족들이 어묵국과 떡볶이를 참으로 제공했으며, 문정현신부님과 함께 행동한 평화바람12일 오전 아침밥을 마련했다. 기륭전자, 동희오토, 지엠대우, 홍대청소용역노동자, 쌍용차 정리해고자, 재능교육비정규직 등 힘들게 투쟁하는 자리에 늘 함께 해온 '갈비연대'라는 모임에서는 11일 밤, 뒷풀이음식을 담당하기로 했지만 확인하지 못했다. 예상보다 많은 인원이 이번 지원단에 합류하는 바람에 준비한 밥은 턱없이 부족했지만 서로를 양보하고 나눔으로써 공동체의 미덕이 어디에 있는지를 생생하게 체험하는 시간이 되었다.
바로 점심을 준비하는 참에 비상이 걸렸다. 배우 김여진이 연속극 촬영일정 때문에 다른 6명과 낮 11, 정문을 나서다 경찰이 긴급체포, 부산 해운대경찰서로 연행되었다는 다급한 소식이 전해졌다. 김씨 이전에도 먼저 현장을 떠나는 이들이 있었지만 이들에 대한 제지는 없었다. 경찰은 가능한 다른 충돌이 없는 가운데 지원단이 떠나기를 바라는 태도를 보였었다. 그런데 갑자기 김씨 일행이 연행되었다. 이날 오전10시쯤에 관계기관대책회의가 있었다는 정보도 들어왔다. 짐작컨대 이 회의 직후 경찰의 태도가 바뀐 듯 했다. 이제 조선소 안에 있었던 지원단의 무사 귀가는 보장할 수 없게 되었다. 한쪽에서는 점심을 먹고 있는 사이 희망버스를 주관했던 비정규직없는세상만들기’(비없세) 실무자 중심으로 긴급회의를 열었다. 그간 들어온 정보를 종합 공유하고 서로 의견을 나누며 대책을 세웠다. 그런데 지상에서 35미터 떨어진 고공에 있는 김진숙 위원이 외쳤다. “동지 여러분, 방금 김여진동지가 훈방되었습니다.”


<동지들의 함성과 연대가 크레인과 땅을 연결하고 있다.>

지상에 있는 사람보다 더 먼저 상공에 있는 사람이 알았다? 그럼 거기서 해운대경찰서가 보이나? 알고보니 요즘 각광을 받고 있는 사회정보망, ‘트위터를 통해 실시간으로 김여진의 연행이 알려졌고 이 소식에 연행에 항의하는 여론이 빗발치고, 그런 과정에서 김여진씨는 담을 넘지 않았음이 드러났고 따라서 무리한 연행이다, 하여 서슬 퍼렇게 연행했지만 바람 빠진 풍선처럼 맥없이 풀어줄 수밖에 없었다. 이어 밖에서 들어온 정보에 따르면 일단 희망버스참가자가 집으로 돌아가는 데에는 경찰이 개입하지 않겠다고 전해졌다. 다만, 일정을 앞당겨 귀가해달라는 의견이 있었다고 실무자들이 전했다. 거기에 개의치 않고 예정되었던 문화마당을 모두 마치고 이날 낮3시 조금 못미처 집회를 정리하는 순서에 들어갔다.
가족대책위의 어린아이들 3명이 아빠 힘내세요. 우리가 있잖아요라는 노래를 너무도 천진스럽게 하여 오히려 눈시울이 붉어졌다. 아이의 엄마인 듯한 가족 한분이 우리 가족대책위에서 여러분께 드릴 선물로 양말을 준비했습니다. 이틀 동안 양말 못 갈아 신어서 아마 양말이 발에 붙었을 겁니다. 새 양말로 갈아 신어 뽀송뽀송한 발로 돌아가세요. 다음에 꼭 다시 찾아오세요.”
이어 역시 노조원의 아내가 직접 남편에게 보내는 편지를 낭독하였다.
“ … 우리 꼭 승리해서 오늘이 좋은 추억이 되게 합시다. 여보 사랑해. 여러분 우리 한진중공업 노동자에게 희망을 주어 너무 감사합니다. 바깥엔 용역과 경찰이 버티고 있습니다. 여러분이 가시더라도 이 싸움이 승리하도록 여러분의 적극 지원을 바랍니다.”
민노총 부산지역본부 윤택권 본부장은, “ 노동자의 인간다운 삶을 위해 희망을 잃지 않고 키워가겠습니다. 저희들 끝까지 싸우겠습니다. 한진투쟁이 한진동지들의 외로운 투쟁이 아니라 지역에 있는 제 시민단체와 제 정당, 그리고 4만 민노총(부산)동지들이 모두 함께하는 그런 투쟁입니다. 승리하겠습니다.”라는 씩씩한 연대사를 밝혔다.
최규종 한진 지회장은, “ 저도 87일간 고공농성했습니다. 여자라서 더 독종인지, 오늘 158일째를 이어가고 있습니다. 동지들 2003년 김주익열사가 울었던 눈물을 기억한다. 지금 노조원은 그때보다 4분의 1정도되는 수준입니다. 그때 많은 연대동지들이 85호크레인 밑에서 투쟁을 함께할 때 김주익열사가 눈물을 흘렸습니다. 그건 반가움의 눈물이고 반드시 승리해서 민주노조 깃발을 지키겠다는 결의의 눈물이라고 기억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열사를 지키지 못했습니다. 이젠 다시는 그런 비극이 없도록 결사 투쟁하겠습니다. 라며 더욱 목소리에 힘을 주었다.
이어 마지막으로, 김진숙동지는 고마움의 인사를 하면서 여러분의 마음처럼 오늘 이 크레인의 문이 열리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이겨서 내려가기 전엔 결코 내손으로 열지 않으리라 굳게 마음먹고 16일 제 손으로 걸어 잠그고 단 한 번도 열어보지 않았던 저 문을 제 손으로 열고 내려간다면 얼마나 좋겠습니까.”라며 오늘 보다 내일은 더 나은 날이 오리라는 믿음으로 투쟁의 고삐를 바짝 죄겠다는 당당한 말로 헤어짐의 아쉬움을 속으로 삼켰다.
 

한진중공업 여러 출입문 가운데 동문 밖에 서울을 비롯한 각지에서 타고 온 희망버스가 대기 중이었다. 연대의 무대에서부터 길게 늘어서 85호 크레인 밑을 지나 동문으로 향하는 대열을 한진의 조합원이 양쪽에 늘어서 손뼉으로 환송하였다. 누구나 손을 맞잡아 헤어지는 아쉬움을, 아니 다시 꼭 만나겠다는 다짐을 나눴다. 박창수열사와 함께 이 조선소에 들어와 지금도 여기서 소금땀을 흘리고 있는 노동자 한 명이 박창수열사의 아버지를 끌어안고 조선소가 울리도록 큰소리로 울었다. 그 곁을 지나는 이들 모두 목젖이 울컥이며 속으로 삭히는 모습이 보였다.
크레인의 김진숙 동지는 떠나는 이들을 향해 두 손을 저었다. 구름 낀 하늘을 배경으로 인공의 거대한 철구조물에 한 점이 된 그녀. 그녀는 희망버스가 조선소 안에 못 들어오도록 회사가 자본의 백골단을 고용하여 사방의 출입문을 봉쇄하고 농성중인 노동자를 마구 짓밟는 모습을, 위에서 보면서 쇠볼트를 한가마 올려놓았다고 했다. 혼자 남아서라도 죽기 살기로 싸우겠다고. 그런 그녀와 동지들을 조선소에 남겨두고 희망버스는 출발지였던 재능교육 노동자 농성장으로 돌아왔다. 310분쯤 현장을 떠난 우리 버스는 제일 늦게 도착했다. 9시가 넘은 시각이다. 다른 희망버스참가자들은 벌써 돌아갔다.
 
나는 보았다. 인간의 탈을 썼으되 자본의 노예가 되어 인간을 쥐어짜는 짐승을 보았고 참으로 인간답게 살고자 서로 가난하지만 착한 이들이 부등켜 안고 즐거워하는, 진짜 인간을 보았다. 환호만 있고 감동은 찾기 어려운 우리 시대에, 내가 두 눈을 감을 때까지 잊지 못할 감동의 현장을 지켜보았다. 그 안에서 함께 싸웠다. 앞도 보이지 않는 어둠에서 덜컥 길을 열어주는 사다리에 오르는 영광을 누렸다. 약한 이들에게는 승냥이같던 자본의 백골단이 꼬리를 사리고 도망치는 모습을 보았다. 연대의 위대함이여! 일하는 자들의 기쁨이여! 그리하여 참으로 올바르게 사는 세상이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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