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석대중은 밤2시반 무렵에 김진숙 한진중공업 노조 지도위원이 농성하고 있는 85호크레인이 올려다 보이는 곳에 설치된 무대 주변으로 자리를 옮겼다. 이때부터 ‘연대와 위로’의 문화제가 이어졌다. 최규종 한진중공업 지회장의 인사말에 이어 쌍용자동차 해고노동자의 연대사가 이어졌다. 그렇게 1시간 가까이 문화제가 진행되고 나서 땅에서 35미터나 올라간 크레인의 조종실 난간에 나와 있던 김진숙 지도위원이 직접 감사의 말이 있었다. ‘살다보니 이런 날이 진짜 오기는 오는군요’라고 말문을 연 연설은 영도조선소 전체를 숙연하게 만들었다. 그녀의 한마디 한마디는 듣는 이로 하여금 가슴을 저미게 하였다. 하긴 그녀는 8년 전 김주익동지가 바로 그 85호크레인에서 자결을 한 뒤 방에 불을 지피지 않았다고 한다. 그를 지켜내지 못한 죄책감에, 자본가에게 밀려난 분개심을 잊지 않으려 냉방에서 살았다. 김주익 열사가 삶을 마친 그 85호크레인 조종실에 들어가는 바로 전날 1월 5일 밤에야 방을 따숩게 하였으니 그녀의 말은 말이 아니었다. 저 깊디깊은 땅 속에서 그간 억압과 수탈에 숨진 모든 무지랭이들의 설움을 담아내는 넋들의 ‘울림’이었다. 그녀는 말했다. “ … 지금까지 여러분들이 이 85호 크레인을 생각하셨다면 이제부터는 우리 조합원들을 기억해주십시오. 2003년 그 모질었던 장례투쟁의 와중에 장애를 가지고 태어난 현서, 다림의 애비, 고지훈, 김갑렬을 기억해주십시오. 짤린 동생을 지키기 위해 끝까지 함께 싸우는 최승철을 기억해주십시오. 말기암으로 언제 운명하실지 모르는 아버지보다 동료를 지키기 위해 농성장을 지키는 박태준을 기억해주십시오. 비해고자임에도 이 크레인을 지키고 있는 한상철, 안형백을 기억해주십시오. … ” 그리고는 “ … 백기완선생님, 문정현신부님, 박창수동지 아버님, 박종철동지 아버님 진심으로 고맙습니다. 큰절이라도 올리고 싶을 만큼 뜨겁게 고마운 여러분. 제가 삶과 죽음의 경계에서 비틀거릴 때마다 천수보살의 손으로 제 등을 받쳐주신 여러분. 꼭 이기겠습니다. 157일 아닌 1570일을 견뎌서라도 반드시 이기겠습니다.”는 다짐으로 인사를 마쳤다. 그녀의 진정하고 절절한 심정을 고스란히 전해 받은 참석자들은 뜨거운 손뼉으로 화답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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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레인 위 김진숙 지도위원에게 박종철 인권상을...>
박종철열사기념사업회는 해마다 6월에 박종철인권상을 수여하는데 이번 2011년에는 김진숙 지도위원이 수상자로 선정되었다. 밤3시반, 인권상 수여식이 있었다. 무대에는 박종철열사 아버님과 박창수열사 아버님이 올랐다. 인권연대 박래군동지가 김진숙동지를 대신하여 받았다. 그리곤 어느새 영도조선소에 희뿜한 새벽이 먼데서부터 다가오고 있었다. 그것은 꼭 ‘노동자의 햇새벽이 오를 때까지’라던 ‘노동의 새벽’이었다. 그 새벽을 맞는데 흥을 돋운 건 ‘날나리’들의 난장이었다. 우리가 익히 아는 바라면 투쟁현장에서 문화선전은 우리네 전통풍물이 기본이었다. 하지만 ‘세대교체’가 되고 있는지 ‘뽕짝’가락이 공장안을 들썩이게 하였다. 알록달록한 장식에 ‘몸빼바지’까지 맞춰 입은 ‘날나리’들이 몸을 꼬고 소리를 질렀다. 그런 흥이라면 몇날며칠을 자지 않고 난장을 이어갈 만큼 열정적인 ‘날나리’였다.
밤을 꼬박 지샌 조합원과 지원단이 저마다 무리를 지어 아침끼니를 해결하던 무렵 비가 추적추적 내렸다. 비를 머금은 바닷바람이 추웠지만 연대의 마당에는 대동한마당이 그치지 않고 이어졌다. 용산참사현장에서 '끝나지 않는 미술전'을 열었던 ‘파견미술가모임동지들’과 '촛불방송국'을 운영해주었던 미디어활동가들, 판화가 이윤엽, 만화가 이동수의 얼그림(캐리커쳐) 등 다양한 참여공간이 열리고 있었다. 이를 크레인조종실에서 내려다 본 김진숙동지는 이날 낮3시에 마무리집회를 마치고 공장을 떠나는 ‘희망버스’참가자들에게 이렇게소감을 밝혔다.

<투쟁에 연대하며 힘을 모으는 희망버스 동지들>
“… (15만4천볼트 송전탑에서 홀로 88일을 견뎠던 분) 그 강병지동지가 마침내 살아서 땅을 딛고 여기를 오셨습니다. 그리고 오늘 새벽 날나리들과 어울려 춤을 추던 강병지동지를 보았습니다. 그 앞에서 함께 어울려 춤추던 한진지회 박성화동지 또한 보았습니다. 박창수위원장 시절 상집간부를 했고 해고됐고 징역 3번 갔고 김주익 곽재규의 목숨 값으로 15년 만에 복직되었다가 이번에 다시 해고되었습니다. 그 두 사람이 날나리들과 어울려 춤추는 모습을 보며 저는 벅찼습니다. 손뼉을 치면서도 눈물이 났습니다. 그리고 그 모습에서 제가 꿈꾸는 세상의 모습을 보았습니다. 정규직 비정규직 해고자 그리고 청춘들이 아무런 벽도, 아무런 구분도 없이 저렇게 어울려 춤추는 세상, 제가 꾸는 꿈과 여러분이 꾸는 꿈이 다르지 않을 거라 믿습니다. 그 꿈을 위해 여기까지 달려오셨고, 어제 오늘 그 꿈으로 가는 징검다리 하나를 놓았습니다. 사람이 있는 공장을 철옹성으로 만든 저 오만한 자본에 파열음을 냈습니다. 어떻게 연대해야 되는지 누구의 손을 잡아야 하는지, 어떤 연대가 진정한 힘을 가질 수 있는지도 우리 눈으로 확인했습니다.”라고 하였다.
점심 무렵에는 비는 그쳤다. 이번 ‘연대와 위로’에는 참으로 다양한 이들이 뜻을 모았다. 그야말로 ‘대동한마당’의 현장이었다. 새벽 동터오던 무렵, 한진 노동자 가족들이 어묵국과 떡볶이를 참으로 제공했으며, 문정현신부님과 함께 행동한 ‘평화바람’은12일 오전 아침밥을 마련했다. 기륭전자, 동희오토, 지엠대우, 홍대청소용역노동자, 쌍용차 정리해고자, 재능교육비정규직 등 힘들게 투쟁하는 자리에 늘 함께 해온 '갈비연대'라는 모임에서는 11일 밤, 뒷풀이음식을 담당하기로 했지만 확인하지 못했다. 예상보다 많은 인원이 이번 지원단에 합류하는 바람에 준비한 밥은 턱없이 부족했지만 서로를 양보하고 나눔으로써 ‘공동체의 미덕’이 어디에 있는지를 생생하게 체험하는 시간이 되었다.
바로 점심을 준비하는 참에 비상이 걸렸다. 배우 김여진이 연속극 촬영일정 때문에 다른 6명과 낮 11시, 정문을 나서다 경찰이 긴급체포, 부산 해운대경찰서로 연행되었다는 다급한 소식이 전해졌다. 김씨 이전에도 먼저 현장을 떠나는 이들이 있었지만 이들에 대한 제지는 없었다. 경찰은 가능한 다른 충돌이 없는 가운데 지원단이 떠나기를 바라는 태도를 보였었다. 그런데 갑자기 김씨 일행이 연행되었다. 이날 오전10시쯤에 관계기관대책회의가 있었다는 정보도 들어왔다. 짐작컨대 이 회의 직후 경찰의 태도가 바뀐 듯 했다. 이제 조선소 안에 있었던 지원단의 무사 귀가는 보장할 수 없게 되었다. 한쪽에서는 점심을 먹고 있는 사이 ‘희망버스’를 주관했던 ‘비정규직없는세상만들기’(비없세) 실무자 중심으로 긴급회의를 열었다. 그간 들어온 정보를 종합 공유하고 서로 의견을 나누며 대책을 세웠다. 그런데 지상에서 35미터 떨어진 고공에 있는 김진숙 위원이 외쳤다. “동지 여러분, 방금 김여진동지가 훈방되었습니다.”


<동지들의 함성과 연대가 크레인과 땅을 연결하고 있다.>
지상에 있는 사람보다 더 먼저 상공에 있는 사람이 알았다? 그럼 거기서 해운대경찰서가 보이나? 알고보니 요즘 각광을 받고 있는 사회정보망, ‘트위터’를 통해 실시간으로 김여진의 연행이 알려졌고 이 소식에 연행에 항의하는 여론이 빗발치고, 그런 과정에서 김여진씨는 담을 넘지 않았음이 드러났고 따라서 무리한 연행이다, 하여 서슬 퍼렇게 연행했지만 바람 빠진 풍선처럼 맥없이 풀어줄 수밖에 없었다. 이어 밖에서 들어온 정보에 따르면 일단 ‘희망버스’ 참가자가 집으로 돌아가는 데에는 경찰이 개입하지 않겠다고 전해졌다. 다만, 일정을 앞당겨 귀가해달라는 의견이 있었다고 실무자들이 전했다. 거기에 개의치 않고 예정되었던 문화마당을 모두 마치고 이날 낮3시 조금 못미처 집회를 정리하는 순서에 들어갔다.
가족대책위의 어린아이들 3명이 ‘아빠 힘내세요. 우리가 있잖아요’라는 노래를 너무도 천진스럽게 하여 오히려 눈시울이 붉어졌다. 아이의 엄마인 듯한 가족 한분이 “우리 가족대책위에서 여러분께 드릴 선물로 양말을 준비했습니다. 이틀 동안 양말 못 갈아 신어서 아마 양말이 발에 붙었을 겁니다. 새 양말로 갈아 신어 뽀송뽀송한 발로 돌아가세요. 다음에 꼭 다시 찾아오세요.”
이어 역시 노조원의 아내가 직접 ‘남편에게 보내는 편지’를 낭독하였다.
“ … 우리 꼭 승리해서 오늘이 좋은 추억이 되게 합시다. 여보 사랑해. 여러분 우리 한진중공업 노동자에게 희망을 주어 너무 감사합니다. 바깥엔 용역과 경찰이 버티고 있습니다. 여러분이 가시더라도 이 싸움이 승리하도록 여러분의 적극 지원을 바랍니다.”
민노총 부산지역본부 윤택권 본부장은, “ … 노동자의 인간다운 삶을 위해 희망을 잃지 않고 키워가겠습니다. 저희들 끝까지 싸우겠습니다. 한진투쟁이 한진동지들의 외로운 투쟁이 아니라 지역에 있는 제 시민단체와 제 정당, 그리고 4만 민노총(부산)동지들이 모두 함께하는 그런 투쟁입니다. 승리하겠습니다.”라는 씩씩한 연대사를 밝혔다.
최규종 한진 지회장은, “ … 저도 87일간 고공농성했습니다. 여자라서 더 독종인지, 오늘 158일째를 이어가고 있습니다. 동지들 2003년 김주익열사가 울었던 눈물을 기억한다. 지금 노조원은 그때보다 4분의 1정도되는 수준입니다. 그때 많은 연대동지들이 85호크레인 밑에서 투쟁을 함께할 때 김주익열사가 눈물을 흘렸습니다. 그건 반가움의 눈물이고 반드시 승리해서 민주노조 깃발을 지키겠다는 결의의 눈물이라고 기억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열사를 지키지 못했습니다. 이젠 다시는 그런 비극이 없도록 결사 투쟁하겠습니다. … ”라며 더욱 목소리에 힘을 주었다.
이어 마지막으로, 김진숙동지는 고마움의 인사를 하면서 “여러분의 마음처럼 오늘 이 크레인의 문이 열리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이겨서 내려가기 전엔 결코 내손으로 열지 않으리라 굳게 마음먹고 1월 6일 제 손으로 걸어 잠그고 단 한 번도 열어보지 않았던 저 문을 제 손으로 열고 내려간다면 얼마나 좋겠습니까.”라며 오늘 보다 내일은 더 나은 날이 오리라는 믿음으로 투쟁의 고삐를 바짝 죄겠다는 당당한 말로 헤어짐의 아쉬움을 속으로 삼켰다.
한진중공업 여러 출입문 가운데 동문 밖에 서울을 비롯한 각지에서 타고 온 ‘희망버스’가 대기 중이었다. 연대의 무대에서부터 길게 늘어서 85호 크레인 밑을 지나 동문으로 향하는 대열을 한진의 조합원이 양쪽에 늘어서 손뼉으로 환송하였다. 누구나 손을 맞잡아 헤어지는 아쉬움을, 아니 다시 꼭 만나겠다는 다짐을 나눴다. 박창수열사와 함께 이 조선소에 들어와 지금도 여기서 ‘소금땀’을 흘리고 있는 노동자 한 명이 박창수열사의 아버지를 끌어안고 조선소가 울리도록 큰소리로 울었다. 그 곁을 지나는 이들 모두 목젖이 울컥이며 속으로 삭히는 모습이 보였다.
크레인의 김진숙 동지는 떠나는 이들을 향해 두 손을 저었다. 구름 낀 하늘을 배경으로 인공의 거대한 철구조물에 한 점이 된 그녀. 그녀는 ‘희망버스’가 조선소 안에 못 들어오도록 회사가 ‘자본의 백골단’을 고용하여 사방의 출입문을 봉쇄하고 농성중인 노동자를 마구 짓밟는 모습을, 위에서 보면서 ‘쇠볼트’를 한가마 올려놓았다고 했다. 혼자 남아서라도 죽기 살기로 싸우겠다고. 그런 그녀와 동지들을 조선소에 남겨두고 ‘희망버스’는 출발지였던 재능교육 노동자 농성장으로 돌아왔다. 낮3시 10분쯤 현장을 떠난 우리 버스는 제일 늦게 도착했다. 밤9시가 넘은 시각이다. 다른 ‘희망버스’참가자들은 벌써 돌아갔다.
나는 보았다. 인간의 탈을 썼으되 자본의 노예가 되어 인간을 쥐어짜는 짐승을 보았고 참으로 인간답게 살고자 서로 가난하지만 착한 이들이 부등켜 안고 즐거워하는, 진짜 인간을 보았다. 환호만 있고 감동은 찾기 어려운 우리 시대에, 내가 두 눈을 감을 때까지 잊지 못할 감동의 현장을 지켜보았다. 그 안에서 함께 싸웠다. 앞도 보이지 않는 어둠에서 덜컥 길을 열어주는 사다리에 오르는 영광을 누렸다. 약한 이들에게는 승냥이같던 ‘자본의 백골단’이 꼬리를 사리고 도망치는 모습을 보았다. 연대의 위대함이여! 일하는 자들의 기쁨이여! 그리하여 참으로 올바르게 사는 세상이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