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체복무제 도입을 그리며
고동주(노동자역사 한내 회원, 가톨릭뉴스 지금여기 기자)
얼마 전, 노동자역사 한내를 알게 되었고 그래서 회원가입까지 하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한내에서 병역거부자의 경험을 들려달라고 하셔서 이렇게 새벽에 글을 쓰고 있습니다.
한국 땅에서 최초의 병역거부로 얘기되는 기록은 일제시대로 거슬러 올라갑니다. 1939년 여호와의증인 신자들이 강제징병을 거부해 38명이 구속된 사건이지요. 이들은 신사참배도 거부해 독립운동사에도 기록이 돼있답니다. 이들은 시대의 변화와 상관없이 병역을 거부했지만, 일제시대에는 독립운동으로 지금은 국가가 부여한 의무를 저버리는 배신자로 낙인찍히고 있지요.
여호와의증인 신자들은 6.25 전쟁 때도 병역을 거부했고, 강제 징집이 되던 시절에는 집총거부로서 그들의 신앙을 지켰습니다. 2001년 전까지만 해도 이들의 병역거부는 단지 사이비 종교의 광적인 행위로만 비쳐졌습니다. 그러다가 <한겨레21>을 통해 이들의 병역거부가 알려지고, 총을 들 수 없다는 ‘양심’ 때문에 최대 3년까지 감옥 생활을 해야 한다는 사실이 알려지면서 이들은 세상의 관심을 받게 됐습니다.
그리고 불교 신자인 오태양 씨가 병역을 거부하면서 병역거부 문제가 더는 한 종교의 문제로 국한되지 않게 됐습니다. 2004년 5월에는 서울 남부지법의 이정렬 판사가 병역거부에 대해 무죄선고를 내려 다시 한 번 병역거부가 사회의 이슈가 됐습니다. 그러나 같은 해 7월 15일 대법원에서 유죄가 선고됐고, 8월 26일에는 헌법재판소가 병역법에 대해 합헌 결정을 내려 병역거부에 대한 논란은 다시 수면 아래로 가라앉게 됐습니다.
저는 그 다음해 2005년 10월 11일 입영을 거부하고, 19일에 병역거부를 선언하는 기자회견을 가졌습니다. 한국 가톨릭 신자로서는 공식적으로 최초의 병역거부였습니다. 그래서 상당히 많은 언론의 주목도 받았었지요. 이쯤해서 제가 왜 병역거부를 했는지 말해야겠지요. 사실 저는 어렸을 때 신부님은 당연히 군에 안 가는 줄 알았습니다. 예수님의 제자라는 성스러운 분들이 군에 가는 건 어릴 적 상식으로 이해할 수 없었던 것이지요.

<2005년 10월 19일, 고동주 병역거부 선언 기자회견>
대학에 입학해서 ‘가톨릭 학생회’라는 동아리 활동을 하게 되면서 제가 신부님은 아니지만 예수를 따르는 제자로서 삶을 살아가야 한다고 다짐하게 됐습니다. 그리고 그 삶은 자신의 안위를 위한 기도가 아니라 모두가 평등하고 평화로운 하느님나라가 이 땅에 세워질 수 있도록 노력하는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위와 같이 살아가려는 다짐과 군대는 별개의 문제였습니다. 어느새 어렸을 때 가졌던 ‘상식’은 잊어버리고 군대는 한국의 남자라면 피할 수 없는 것으로 생각하게 됐지요. 여호와의증인 신자들의 병역거부 이야기를 들었을 때도 남의 이야기로만 받아들였습니다. 군대는 그저 가기 싫지만 결국은 가야할 곳, 최대한 편한 곳을 찾아갈 곳 정도로 인식했습니다.
하지만 미국이 9.11 테러를 이유로 아프가니스탄과 이라크를 상대로 침략 전쟁을 벌이면서 무수한 민간인들이 죽어가는 걸 보게 되면서 마음의 동요가 일어났고, 어렸을 때의 ‘상식’이 떠올랐습니다. 김선일의 죽음에 파병 국가에 살고 있는 저 또한 책임이 있다고 생각이 들었고, 그리스도인으로서 전쟁 행위에 참여해서는 안 된다는 생각이 강해졌습니다. 한국군의 파병을 보며 군대가 진정 전쟁을 막아주는 가에 대한 회의가 깊어졌고, 군대는 오히려 전쟁을 부추기는 결과를 초래할 가능성이 높으며, 설사 전쟁을 막아도 그것은 진정한 평화가 아니라 불안한 평화라 생각하게 됐습니다. 예수께서 말씀하신 참평화는 힘의 균형으로 이뤄지는 것이 아니라 진정 평등함 속에서 서로의 사랑 속에서 이뤄지는 것이고, 그를 따르려면 ‘칼’을 내려놔야 했습니다. 저는 저의 가슴 깊은 곳에서 형성된 양심의 소리에 귀 기울였고, 병역을 거부했고, 감옥을 택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옛 이야기를 꺼냈는데, 길어져버린 것 같습니다. 그렇게 들어간 서울 영등포 구치소는 그럼에도 또 하나의 군대였습니다. 면회를 온 친구들에게 6시에 일어나서 밤 10시에 잠을 자는 하루 일과를 설명했더니, “어, 군대랑 똑같잖아?”라는 답을 들었지요. 실상 감방 안의 막내 생활은 군대의 내무반 생활과 같았습니다. 저는 설거지, 방청소, 목욕용품 챙기기, 인원 점검 때마다 입어야 할 관복 챙기기, 행주 만들기, 고깔(다용도 종이 상자?) 접기 등 다양한 일들을 해내야 했습니다.
실제 감옥 안에 들어가기 전에는 가서 실컷 책이나 봐야겠다는 낭만적인 생각도 가지고 있었습니다만, 미결수일 때는 막내 생활 하느라 바빴고, 기결수일 때는 일하느라 바빴던 것 같습니다. 물론 제가 드라마를 좋아했는지라, 일이 끝나면 TV삼매경에 빠진 것도 큰 이유입니다. ^^;
취사장에서 3개월 반, 보안과 청소부로 출소할 때까지 일한 과정을 돌이켜보면 정말 총만 잡지 않았지, 숨 막히는 위계서열 생활과 말도 안 되는 교도관들의 요구들이 군대 생활과 다를 바가 없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이놈의 세상 군사문화가 뻗치지 않은 곳이 없구나 하며 절망스러웠죠. 뭐 그것도 시간이 지나면서 그럭저럭 보내고 2007년 9월 28일 가석방으로 출소를 했습니다.

<2005년 3월 19일, 평화난장 행사 장면>
제가 복역을 하는 동안 국가인권위의 권고 이후, 국방부는 대체복무제도를 연구하겠다고 발표를 하고 연구위원회를 꾸렸습니다. 그리고 저희는 저희 나름대로 유엔에 한국 정부를 제소했지요. 유엔은 한국 정부가 병역거부자들에게 보상할 것과 대책을 마련할 것은 권고했고, 한국은 연구 중이라는 답변을 했습니다. 지지부진한 연구가 끝나고 2007년 9월 18일 국방부는 종교적 신념 등으로 병역을 거부하는 이들에게도 대체복무를 허용하겠다고 발표를 합니다. 저는 이 소식을 구치소에서 듣고 얼마나 기뻤는지 모릅니다.
그러나 그 기쁨도 잠시, 정권이 바뀐 후 모든 것은 10년 전으로 돌아가고 있습니다. 2001년부터 9년여의 병역거부운동이 모두 물거품이 될 위기에 놓여있는 것입니다. 평화운동 단체 ‘전쟁없는세상’은 2007년 대선 후보들에게 공개 질의서를 보냈는데, 유일하게 적극적으로 대체복무제 도입을 반대한다고 의견을 밝혀온 곳이 이명박 캠프였습니다. 원래대로라면 2009년부터 대체복무제도가 시행되어, 지금쯤 대체복무를 하는 친구들 중에는 휴가를 나와 있는 사람들도 있었어야 합니다. 하지만, 대체복무를 하고 있어야 하는 친구들 500여 명은 지금 수감 중이지요.
지난 9월 10일, 저와 같이 ‘가톨릭 학생회’ 활동을 하던 후배 한명이 또 병역거부를 선언했습니다. 이 친구 역시 감옥을 눈앞에 두고 있지요. 감옥에 대해 애써 나름 즐거웠던 기억만을 가지고 있었지만, 후배가 들어간다고 하니 힘들었던 기억들이 스멀스멀 기어 올라옵니다. 현재 헌법재판소에는 병역법에 대해서 춘천과 천안의 지방법원에서 올린 위헌제청이 두 건 있습니다. 이들에게라도 희망을 걸어야 하는 게 안타까울 뿐이네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