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택동과 한국전쟁 <8회> 옮긴 이: 이영민 11월 23일, 미군의 추계공세를 막 분쇄한 후이다. 모택동은 중국인민 정치협상회의의 장엄한 전체회의에서 미국정부와 전세계를 향해 정중한 성명을 발표했다. “항미원조의 위대한 투쟁은 지금도 여전히 진행되고 있으며 미국정부가 평화적 해결을 원하는 시점에 그칠 것이다. 우리는 어떤 국가도 침범하지 않으려 한다. 다만 우리는 제국주의자가 우리를 침략하는데 반대할 뿐이다. 여러분 모두 잘 알고 있다. 만약 미국군대가 우리나라의 대만을 점령하지 앟았다면, 조선 민주주의 인민공화국를 침략하지 않고, 우리 동북 변경을 공격하지 않았다면 중국 인민도 미국군대와 전투하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이왕 미국 침략자가 우리를 공격한 이상 우리는 반침략의 깃발을 들지 않을 수 없다. 그것은 분명히 필요한 일이며 정의로운 일이다. 전국 인민은 이 필요와 정의를 모두 잘 알고 있다. 우리는 일찍이 표명하였다. 조선 문제는 평화적 방법으로 해결해야 하며 아직도 그러하다. 미국정부가 공평하고 합리적인 기초위에서 문제를 해결하기 원한다면, 과거처럼 여러 부끄러운 방법으로 담판진행을 방해하거나 교란하는 행위를 하지 말아야 한다. 그러면 정전담판은 성공할 것이며 그렇지 않으면 실패할 것이다. 우리의 적은 잘못 생각하였다. 새로 태어난 중화인민공화국의 눈앞에 무거운 난관이 놓여 있어 그들이 침략전쟁으로 우리를 반대한다면 우리가 그것을 극복하지 못할 것이라고. 우리가 그들 침략자에 반격하지 못할 것이라고. 적이 예상을 뛰어 넘어 뜻밖에도 우리는 곤란을 극복할 수 있었다. 침략자에 반격할 수 있었으며 위대한 승리를 얻을 수 있었다. 우리의 적은 시야가 좁아서 우리가 이렇게 국내와 국제적으로 위대하게 단결한 힘을 보지 못하였다. 그들은 제국주의가 중국인민을 업신여기던 시대가 이미 중화인민공화국이 성립되어 영원히 끝났음을 알지 못한 것이다.”(주1) 10월 25일, UN군 대표는 담판탁자로 돌아와 중국과 북한대표와 다시 담판을 시작했다. 담판장소는 개성 동남쪽으로 8킬로 떨어진 판문점으로 바뀌었다. 미국은 다시 해군과 공군의 우세를 거론하지 않았다. 하지만 여전히 한반도 서부를 북쪽으로 조정하자는 요구를 포기하지 않았다. 담판협상을 이루기 위해 북한과 중국쪽은 11월 7일 실제 접촉선을 바탕으로 약간 조정하여 군사분계선의 새로운 방안을 만들었다. 그리고 삼팔선을 군사분계선으로 하자는 이전 주장을 하지 않았다. 11월 27일, 쌍방은 제 2항 의제에서 협의를 이루었다. 쌍방이 실제로 접촉한 선을 군사분계선으로 하기로 규정했다. 쌍방은 각자 2킬로미터를 후퇴하여 비군사지역을 설치키로 하였다. 이어서 제 3항 의제인 ‘한반도내 전투중지와 휴전의 구체적 안배’와 제 4항 의제인 ‘전쟁포로 반환문제’의 담판을 진행하였다. 담판과정에서 북한과 중국측의 1항 제안은 모두 UN군 대표의 반대에 부딛쳤다. 쌍방은 담판탁자에서 입으로 총을 쏘고 입으로 칼을 휘둘렀다. 그 격렬한 정도는 전장의 칼날에 못하지 않았다. 모택동은 주은래의 유력한 협조속에서 군사투쟁과 정치투쟁의 주도권을 확고하게 쥐고 있었다. 논쟁에서 우리쪽이 유리했다. 무력투쟁에서는 우리쪽 하나의 방법이 있었다. 견고한 진지에 의지하여 “캐러멜을 빼앗아 먹는” 방법으로 적을 하나씩 먹어 치웠다. 소수를 모아 다수를 이루고, 그것을 합하면 커다란 숫자가 된다. 논쟁과 무력투쟁을 긴밀히 결합하여 한차례 또 한차례 거듭 대결한 끝에 UN군을 복종시켜 협상을 이루었던 것이다. “싸우고, 안정시키며, 건설한다.” 1951년말이 되자 국민경제 회복과 국가 재정상태가 호전되는 중요한 진전이 있었다. 그 해의 농공업 총생산량치는 전년보다 19퍼센트 제고되었다. 그중 공업 증가율은 38.2퍼센트였으며 농업은 9.4퍼센트 증가하였다. 전쟁비용이 대폭 증가하는 가운데서도 재정이 적자를 면했을 뿐 아니라 오히려 건국이래 최초로 수지균형을 절약하였다. 이것은 국내 경제회복과 건설사업이 항미원조로 정체되지 않았으며더 진전하였음을 설명해주는 것이다. 나라는 인력과 물력,재력을 부단히 증가시켰을 뿐 아니라 정기전쟁의 소모를 지탱할 수 있었다. 또 이 전쟁을 마지막 승리로 가져가기 위하여 끊임없이 커다란 물질적 기반을 제공하였다. 당시 출병을 결정하는 과정가운데 사람들이 가장 걱정하는 것이 경제회복에 영향을 줄 것이라는 점이었으며 또한 오랜 전쟁으로 피폐해지는 것을 두려워하였다. 모택동은 이 전쟁이 국내건설에 여러 불리한 영향을 줄 것이라는 점을 충분히 예측하고 가장 나쁜 상황을 생각하였다. 1951년 상반기까지 그는 내내 경제가 한국전쟁 장기화를 견딜수 있는지 걱정하였다. 미국이 아군과 소모전을 꾀하는 경험속에서 이러한 우려를 표현한 일도 있었다. 그러나 1년이 넘는 실천속에서 증명되었다. 모택동과 중공 중앙의 정확한 지도아래 항미원조 전쟁은 전국 수억의 인민들에게 애국열정과 집단주의(모두 함께 해야 한다는 정신을 말한다. 역자 주.) 정신을 불러 일으켰다. 그것은 국내 각종 건설사업의 빠른 발전을 촉진시켰다. 사람들이 그것을 미처 예상하지 못하였으며 모택동도 마찬가지였다. 중국 공산당과 전국 인민은 이 전쟁이 승리할 것이라는 믿음이 더욱 충만하게 되었다. 미래에 대한 희망과 믿음이 가득한 가운데 모택동은 11월 11일 팽덕회, 등화, 진갱과 지원군 당위원회 모든 동지들에게 전문을 보냈다. 이 전문은 사람들을 깊이 감동시켰다. “여러분은 조선에서, 그리고 우리는 국내에서 합심하여 가능한 절약을 대규모로 진행하고 있다. 국내의 증산운동을 더하여 내년에는 모든 일이 좋아지도록 할 것이며 임무를 완성할 수 있을 것이다. 우리가 적과 진행하는 담판은 성공할 것이며 가능성이 비교적 크다. 담판을 이루지 못하더라도 우리는 전쟁을 계속하여 승리로 마감할 수 있을 것이다. 국내 국방건설과 다른 건설사업에는 추호의 장애도 되지 않을 것이며 각종 사업도 모두 크게 발전해 나갈 것이다. (주2) 새로 탄생한 중화인민공화국은 이렇게 험난한 시험을 거치는 가운데 싸우고, 안정시키며, 건설하는 가운데 1951년을 보냈다. 전쟁포로 송환 문제 1952년 5월, 한국전쟁 정전담판에 중요한 진전이 있었다. 제 3항과 5항 의제에서 쌍방은 협의를 이루었다. 이때쯤 정전담판은 5개항의 의제중 4항을 남겨두었는데 바로 전쟁포로 처리문제였다. 전쟁포로에 관한 담판은 1951년 12월 11일부터 시작하였다. 쌍방 논쟁의 쟁점에서 북한과 중국측은 제네바 협약이 규정한대로 포로 전원 송환을 주장했다. 미국측은 이른바 “스스로 원하는 사람만 송환하는 원칙”을 구실로 전원 송환을 거절했다. 북한과 중국측은 문제해결을 모색하기 위해 2회에 걸쳐 절충 조정안을 제출했다. 하지만 모두 UN군 대표의 거절에 부딛쳤다. 7월 13일, UN군 대표는 하나의 송환방안을 제출했다. 그중 조선인민군 전쟁포로는 송환대상 전체의 80퍼센트쯤 되었다. 중국 인민지원군 전쟁포로는 전체 대상가운데 32퍼센트 가량 되었다. 양자가 이렇게 차이가 큰 것은 미국이 중조 양국과 양측 군대를 이간하려는 기도가 숨어 있었다. 7월 15일, 모택동의 심사를 거쳐 주은래는 스탈린에게 전문을 발송하였다. 이 전문은 “우리는 절대로 적의 도발과 유인을 위한 그러한 방안을 받아들이지 않을 생각이다. 적의 압력에 굴복한다면 우리에게 극히 불리하게 될 것이다.”하고 지적하였다. 또 “만약 적이 양보하지 않고 계속 질질 끈다면 우리는 적이 정전담판 결렬을 기도한다는 선전을 확대할 것이다. 적이 침략전쟁을 확대할 음모가 있음을 갈파하여 세계 인민의 여론을 불러 일으킬 것이다. 우리는 조선 전선을 수호하고 적이 손상을 입도록 할 것이다. 그래서 적이 최후의 양보를 하도록 압박할 것이다. 만약 적이 감히 담판을 결렬시킨다면 전쟁은 확대될 것이며 우리도 마땅한 준비를 할 것이다. 이 문제는 정치문제이기 때문에 조중 양국뿐 아니라 혁명진영에도 영향을 줄 것이다.”(주3) 하고 덧붙였다. 같은 날, 모택동은 주은래가 기초한 전문을 심사하여 김일성 및 이극농에게 보냈다. 그는 전문에서 이렇게 말했다. “적의 13일 방안을 받아 보았는데 우리에게 극히 불리한 것이다. 받아들일 수 없으며 적의 결렬에 대비하여 우리는 결심해야 한다. 우리가 이렇게 결심을 한다면 오히려 적이 반드시 결렬시키지는 않을 것이다. 만약 적이 양보하지 않거나 담판을 결렬시킨다면 우리는 적과 계속 싸울 수밖에 없다.”(주4) 7월 16일, 스탈린은 모택동에게 이런 회신전문을 보냈다. “당신들은 평화담판에서 정확한 입장을 가지고 있다.”(주5) 정전담판에 호응하기 위해 “적에게 부단히 손해를 입혀라. 그래서 적이 마지막에 양보하도록 압박하라.”고 하였다. 중국 인민지원군은 1953년 9월 18일부터 전 전선에서 반격작전 전술을 시작했다. 이 작전은 10월 31일에 끝이 났다. 44일이 소요되었으며 적 2만 5천여 명을 섬멸했는데 지원군의 전상자는 1만 5백여명에 이르었다. 적과 아군 사이 전상자 대비는 2.5대 1이었다. 모택동은 이 반격작전에 대하여 높은 평가를 하였다. “이런 작전에서 전술적으로 선택된 요점은 아군의 우세한 병력과 화력을 집중시키는 것이다. 또 돌발적 행동을 채택하여 소대,중대,대대로 구성된 적의 전부 또는 대부분에게 섬멸적 타격을 주는 것이다. 그 후 적이 아군에게 반격하려는 시기에 다시 작전을 반복하여 적에게 대량 살상의 타격을 주는 것이다. 다음에는 상황에 따라 우리가 함락한 거점에서 지킬 수 있는 곳이면 지키고 지킬 수 없을 때는 포기해야 한다. 우리는 주도권을 가져야 하며 다음 반격을 준비해야 한다. 이런 작전 방법을 계속 실행해 나가야 한다. 반드시 적을 제압할 수 있어야 하며 적이 타협하여 조선전쟁을 끝내도록 압박해야 한다. 작년 7월부터 아군이 견고한 진지에서 작전한 이래 적에게 준 손실은 그 이전에 각지에서 운동전으로 입힌 손실을 상당히 초과하였다. 반면 아군이 입은 손실은 크게 감소하였다. 지원군에 대해서만 말하자면 작년 7월 이후 15개월 사이가 그 이전의 8개월에 비해 매월 평균 삼분지 2 이상 감소하였다. (이전 8개월간 매월 평균 2만 5천명이었으며 그후 15개월은 매월 평균 8천여명에 이르렀다.) 이런 상황은 진지에 의지하여 실행한 작전방법의 결과이다. 그리고 9월 18일 시작한 기간내 이런 작전방법은 더 조직적이며 전체 전선에 걸쳐 있음을 말해주는 것이다. 그래서 특별히 중시할 가치가 있다.”(주6) 이것은 지원군이 작년 7월이래 진행한 진지에서의 지구전 경험을 모택동이 총괄한 것이며 개괄한 것이기도 하다. 기본전술은 바로 작년 5월 27일 그가 해방과 진갱에게 말했던 그 “캐러멜을 빼앗는” 작전이었다. 그것은 지원군이 “적을 제압하는” 하나의 보물이었다. 지원군이 진행한 전체 전선의 전술적 반격기간에 미국은 전장에서의 피동적 국면을 전환시키고 담판에서 유리한 지위를 도모하기 위해 반격을 개시했다. 10월 14일부터 상감령 지구에서 전례없이 격렬한 ‘김화공세’를 시작한 것이다. 김화는 삼팔선 중간에 위치하고 있으며 서울 지역에서 평강평원을 공격할 때 반드시 거쳐야 하는 철도의 중추였다. 따라서 이번 공세에서 반드시 차지해야 하는 곳이었다. 지원군은 김화지역의 상감령등 요지에 의지하여 완강하게 저항했으며 미군의 공세를 분쇄하였다. 이 전투가 세간에 널리 알려진 상감령 전역이다. 상감령에 있는 오성산은 중조군대 중부방어선의 전략적 요지였다. 또 한반도 중부 평강 평원의 천연 병풍이었다. 만약 미군이 이 방어선을 돌파하여 평강 평원에 진입한다면 탱크와 기계화부대가 곧바로 뒤따라 들어올 것이었다. 상감령 지역의 579.9 고지와 537.7 고지는 중부전선을 지키는 최전방 요지였다. 미군이 펼친 ‘김화공세’의 주공 목표는 바로 이 두 개 고지를 빼앗는 것이었다. 나아가 상감령을 빼앗고 계속해서 오성산을 빼앗는 것이었다. 43일에 걸친 상감령 전역중 지원군 부대는 영용하고 완강하게 싸웠다. 적은 모든 현대화된 군사적 수단을 다 썼다. 그들은 지원군 진지를 교대로 돌아가며 공격했다. 두 개 고지와 부근 지역에 적은 190만발의 포탄과 오천여발의 폭탄을 퍼부었다. 투입한 총병력은 약 4만명에 이르렀다. 두 고지의 흙과 돌은 폭탄에 산산히 흩어졌으며 초토로 변하였다. 높은 사기와 창조정신을 가진 중국 인민지원군은 1년 넘는 전화속에서 경험과 단련을 거쳤다. 또 현대화된 장비를 가진 미국군대와 싸워 능력이 크게 제고되었다. 지원군 장병은 땅위 진지에서 적과 반복적으로 싸워 적에게 커다란 타격을 입혔다. 그후 갱도작전으로 전환하여 역량을 보존하고 반격을 준비하였다. 11월 25일이 되자 빼앗긴 곳을 전부 되찾았다. 중부 방어선은 태산처럼 안정되었으며 사수해 낸 한차례의 엄중한 경험을 얻었다. 상감령 전역에서 중국 인민지원군은 1만 1천 5백여명의 사상자가 발생하는 대가를 치렀다. 적 2만 5천여명을 섬멸하였으며 격추하거나 피해를 입힌 적기가 270대에 이르는 커다란 승리를 얻었다. 미군은 중국 인민지원군의 강력한 공격과 방어능력을 다시 인식하게 되었다. 그후로 미군은 다시는 어떤 형태의 공세를 취하지 못하였다. 미국 신문계는 논평하기를 “이 전역은 사실상 한국전쟁의 ‘베르뎅 전역’이 되었다.”(주7) 주1) 모택동이 중국인민정치협상회의 제 1차회의 전국위원회 제 3차 전체회의에서 한 개막사이다. 1951년 10월 23일, 1951년 10월 24일 ‘인민일보’ 주2) 모택동이 팽덕회,등화,진갱 및 지원군 당위원회 동지들에게 보낸 전문, 1951년 11월 11일 주3) 모택동이 스탈린에게 보낸 전문, 1952년 7월 15일 주4) 모택동이 김일성과 이극농에게 보낸 전문, 1952년 7월 15일 주5) 스탈린이 모택동에게 보낸 전문, 1952년 7월 16일 주6) 모택동이 기초하여 중공 중앙과 중앙군사위원회가 팽덕회에게 보낸 전문이다. 1952년 10월 24일. ‘모택동 군사문집’ 제 6권, 군사과학출판사, 중앙문헌출판사 1993년 12월판, 제 324-325쪽 주7) 군사과학원 군사역사연구부 편저 ‘중국 인민지원군 항미원조 전사’에서 인용하였다. 군사과학원출판사 1990년 12월 제 2판, 180쪽.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