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992년 전국노동자대회
1992년 전국노동자대회 개요
1992년 ILO공대위 9·10차 대표자회의는 ILO기본조약 비준의 중요성, 정부의 노동법 개악 기도, 대통령선거 국면 등의 조건을 고려해 1992년 전국노동자대회의 기조를 △ILO기본조약 비준과 노동법개정을 중심으로 민주대개혁의 내용 결합 △전국의 모든 민주노조가 주체적으로 참여하는 명실상부한 민주노조 총단결 투쟁의 의지를 천명하기 위해 전국의 각 단위노조가 참여하는 대회조직위원회를 구성해 노동자대회 주관 △민주노조 총단결의 과제를 대중적으로 제기함과 동시에 대회의 성과를 바탕으로 대회 이후 노동법개정투쟁 및 대통령선거와 관련한 사업에 대한 구체적인 실천방침 결의로 잡았다.
1992년 전국노동자대회의 주요 요구는 △노동법 개악 기도 분쇄 △자주적 단결권 완전쟁취 △민주노조 총단결 △산별노조 건설 △민중연대 민주대개혁 쟁취 등을 핵심적 과제로 설정했다.
이런 기조 아래 대회 명칭은 ‘ILO기본조약비준, 노동법개정과 민주대개혁을 위한 전국노동자대회’로 정하고 11월 7일 오후 7시 전야제(서울대학교), 11월 8일 오전 10시 사전행사로 시작해 오후 2시 본대회(여의도 고수부지)를 치르기로 했다. 행사는 ILO공대위가 주최하고, 전국노동자대회 조직위원회를 구성해 주관키로 했으며, 민주주의민족통일전국연합과 민주당이 후원했다.
전국노동자대회 지역별 조직화 활동
1992년 전국노동자대회를 앞두고 10월 말부터 11월 초에 지역별로 노동법개정을 위한 조합원 행사를 하고 전국노동자대회 참가를 결의했다.
경기지역에서는 10월 25일 47개 노조와 22개 단체에서 650여 명의 노동자가 참석한 가운데 등반대회를 하고 지역 노동법개정공대위와 선봉대 발대식을 진행했다. 참가 조합원들은 조합원 서명깃발 입장식에 이어 노동법개정 의지를 적은 종이를 풍선에 매달아 날리면서 열기를 돋우었다. 또한 선봉대의 긴급제안으로 그 자리에서 284,340원을 모금, 파업 중인 서울택시노조에도 10만 원을 전했다.
광주지역에서는 10월 30일 오후 6시 30분 전남대학교 대강당에서 800여 명의 조합원과 시민, 학생이 참가해 ‘노동법개정과 민주대개혁을 위한 문화제’를 열었다. 문화제에서 고용불안과 부당징계에 공동으로 투쟁하자는 문선대의 선동과 서명깃발 전달식에 이어 꽃다지 공연이 펼쳐졌다.
부천지역에서는 10월 21일 부천시민회관에서 800여 명의 노동자가 참석한 가운데 ‘노동자 문화제’를 열었다. 예년의 경연대회 형식을 벗어나 1992년 하반기 핵심사업인 노동법개정과 고용보장, 대통령선거 등 공동의 주제에 대한 연설과 공연을 통해 노동자대회에 적극 참여할 것을 결의했다.
부산지역에서는 10월 31일 오후 2시 30분부터 서면 천우장 앞에서 ‘노동법개정, ILO기본조약 비준, 재벌경제해체, 경제개혁실시, 민주정부수립’ 등을 외치며 가두 캠페인을 벌였다. 이날 행진대오를 이끈 이성도 부산노련 의장은 “11월 8일 전국노동자대회에는 10만이 아니라 20만, 30만이 모여 노동악법을 확실하게 박살내자”고 호소해 열렬한 지지를 받았다.
성남지역에서는 성남노련과 택시노련 경기동부직할사무소 주최로 10월 21일 오후 7시 경원대에서 350여 명이 모인 가운데 ‘5회 일하는 사람들의 가요제’를 열었다. 성남노련 소속 노조와 택시노조, 한국노총 시협 소속 노조, 탁아협의회 등 11개 노조가 참석한 가요제에서 성남노련 집행부와 택시노조 새 집행부가 노동법개정 투쟁에 힘쓰겠다는 결의와 함께 조합원들의 노동자대회 참가를 독려했다.
인천지역에서는 10월 31일 인천대 통일광장에서 가을문화제가 열렸다. 업종과 소속을 뛰어넘어 60여 개 노조가 주최하고 인천지역ILO공대위가 후원한 이날 행사에는 500여 명의 노동자가 참석했다.
서울지역에서는 4개 지구별로 문화제와 체육대회를 열었다. 10월 25일 중동부지구는 오전 10시 한양대 대운동장에서 12개 노조와 단체가 모인 가운데 ‘5회 대동제’를, 서부지구는 10개 노조 110여 명이 참석해 체육대회를 했다. 구로지구는 10월 31일 구로3공단 가로공원에서 400여 명의 노동자가 모여 문화제를 했다. 북부지구 8개 노조와 덕계리 노동자사랑방 등 8개 단체에서 참가한 250여 명은 11월 1일 의정부공고 운동장에서 ‘3회 체육대회’를 하고 노동자대회 참가를 결의했다. 서노협은 40여 개 노조 260여 명이 참가한 가운데 노동법개정에 대한 지구별 교육도 진행했다.
마창노련은 10월 24일 경남대 한마관에서 노동자 1,000여 명이 참가한 가운데 문화공연 ‘꽃다지’를 진행했다. 공연에 앞서 조합원 서명깃발을 앞세운 ‘노동법개정 선봉대’ 발대식을 했고, 11월 4일에는 전국노동자대회 출정식을 겸한 ‘선동대회’가 열렸다.
대구노련은 10월 19일부터 노동법개정을 주제로 노조 순회 간담회를 열었다. 10월 21일과 28일에는 노조 간부와 대의원 60여 명이 참가한 가운데 ‘노동법개정 승리를 위한 간부학교’를 열었다. 대구지역에서는 주로 조합원들에 대한 교육을 통해 노동법개정 투쟁의 의의를 선전하며 투쟁 결의를 드높였다.
한편 전국노동자대회를 앞두고 대회포스터 8천 부, 대국민 선전물 4만4천 부, 조합원용 홍보물 15만 부를 사전에 배포하는 한편 <한겨레신문>에 두 차례 광고를 실어 조직화에 힘썼다. 11월 8일 행사 당일에는 대회 안내전단 4만 부를 배포했다.
전국노동자대회 행사준비와 진행
질서유지대는 1991년 전국노동자대회 때 활동 내용을 평가해 1992년에는 △질서유지대를 책임있게 조직하기 위한 지노협·업종·단위노조의 논의와 결의 △조합원 대중과 질서유지대원들이 사전에 대회의 전술 기조를 충분히 숙지 △질서유지대원들의 사전교양과 임무 숙지 시간 확보 △질서유지대 운영을 위한 물품과 재정 확보 등이 반드시 필요하다고 판단했다.
질서유지대는 총대장과 실무총괄을 두고, 연단경비대도 별도로 두었다. 질서유지대장단들은 각 지역·업종·단체 책임자들이 담당하고 조끼를 착용했으며, 각 대는 대장을 중심으로 10조 100명으로 하고, 각 대의 한 조는 조장을 중심으로 10명으로 구성했다. 질서유지대 복장은 대회 로고와 ‘선봉’이라는 글자가 새겨진 노란 모자로 통일했고, 질서유지대 깃발에도 ‘선봉’이라는 글자를 커다랗게 새겼다.
조직반은 지역·업종·그룹 등 광범위한 단위의 참여를 위해 조직 가능한 모든 단위를 조직하고 지도부의 역할이 요구되는 부분은 지도부와 결합해 조직화 사업을 보좌하기로 했다. 대회조직위원회에 최대한의 노조가 참여하도록 한다는 목표하에, 10월 말 지역·업종·그룹 차원의 대회 조직책임자 회의를 시점으로 각 단위의 대회 참가 예상인원을 매일 점검해 독려하기로 했다. 이는 1991년보다 2배 이상 참여토록 한다는 목표하에, 각 조직의 조직화운동을 독려 점검하는 과정이었다. 그리고 대회 당일까지 최종 참가 인원을 확인 점검했다. 대회 때 각 대오에 대한 안내와 배치 등을 질서유지대와 협조해 실시하고 각 조직 대오의 인원을 파악하여 대회 집행단위 및 지도부와 각 대오 간의 유기적인 연결을 항상 유지할 수 있도록 한다는 임무를 설정했다.
1992년 전국노동자대회는 노동법개정 투쟁의 주요 수단이자 전국노동자 축제한마당의 성격을 강하게 띠었기 때문에 문화반의 사업내용이 대회 전체 내용을 규정한다 할 수 있다. 그래서 문화반은 ‘대회의 기조와 목표’를 예술적으로 형상화하는 작품을 만들어 참여 노동자들의 열기를 북돋웠다. 전야제, 식전행사, 그리고 본대회의 상징의식 등이 문화반의 주요 사업이었고, 이러한 사업들은 문화반장을 중심으로 하는 문화반 운영체계를 중심으로 준비하고 집행했다.
전노협 문화국이 기획하고 극단 ‘현장’이 대본을 맡았던 ‘노동자 전망대’는 전야제 행사 중의 하나로서, 전야제의 노동자 문화한마당이 나열식 공연이 될 수 있고 지루할 위험을 감안해 영상도입을 통해 다양함을 모색했다. 또한 전야제가 내용적으로 집중성이 부족할 우려를 극복해, 노동법개정에 대한 의지를 집중적으로 확인하고 대선을 둘러싼 지배권력의 추악한 모습을 풍자적으로 폭로해 민주정부 수립에 대한 노동자의 열망을 모아내는 동시에 간단하고 명확한 영상선동을 통해 대중의 열기와 의식을 통일시켜내기 위한 것이었다. 행사의 형식도 참여한 노동자들과 호흡을 함께 하는 방식으로 준비됐다.
이러한 준비를 거쳐 11월 8일 여의도 고수부지에 5만여 노동자·시민들이 참가해 전국노동자대회가 성대하게 열렸다. 대회 전야제 ‘전국노동자 문화한마당’은 전날 서울대 노천국장에서 5천여 명이 참가한 가운데 흥겹게 진행됐다.
1992년 전국노동자대회 조직별 평가
전노협은 전국노동자대회가 기조나 내용, 형식, 전술에 있어서 노동법개정 투쟁을 전개하는 과정에 놓인 하나의 투쟁이 되지 못해 단순한 행사에 그쳐 노동법개정 투쟁의 분위기와 대중의 요구를 수렴 발전시키지 못했다고 평가했다. 또 평화적․합법적 전술 기조를 채택했으므로 비합법 대회보다 전술 운용의 폭을 넓힐 수 있었는데도 행진을 포기해 참여한 조합원 대중의 욕구와 조직적 힘을 분산시켰다고 평가했다. 대회 내용이 집중되지 못했고 대회 형식도 형식적인 틀에 묶여 있었다는 점도 지적했다. 특히 노동법개정 투쟁, 민주대개혁 실현, 산업별 노조 건설 등의 내용과 관련한 대회 이후의 실천방침이 구체적으로 전달되지 못해 참가 대중들에게 아쉬움을 안겨주었다는 것이다. 이와 관련해 향후 구체적 실천방침이 전야제 중에 개최된 조직위원회 대표자회의에서 폐기된 것도 대회 내용을 취약하게 하는 데 일조했다. 민주노조운동 지평에 따른 전노협의 위상 변화와 조합원의 요구와 지향을 충분히 고려하지 못했다는 점도 한계로 지적했다. 전노협과 조합원의 상태에 대한 충분한 고려와 함께 업종회의와의 사업이 적절하게 조정되면서 집행되었어야 했는데, 프로그램을 일방적으로 편재하는 것은 사업의 성과를 약화시킨다는 것이다. 대회의 전체 상(의의, 목표, 명칭, 주 구호, 보조 구호, 프로그램, 이후 실천방침 등)을 사전에 조합원 대중이 숙지하고 참여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는 점도 과제로 뽑았다. 그럼에도 전국노동자대회를 통해 산업별 노조 건설을 대중적으로 선포한 것은 민주노조 운동의 단결과 발전에 있어서 의미가 매우 크다고 평가했다.
업종회의는 소속 조직들이 자체 행사를 기획할 경우 수천 명이 참석하는 데 비해 전국노동자대회에는 수십~수백 명의 참석에 머무렀다는 점에서 노동자의 단결 도모라는 전국노동자대회의 가장 근본적인 취지를 무색하게 했다는 점을 지적했다. 이것은 업종회의의 상당 부분이 전국노동자대회를 자신의 것으로 인식하고 있지 못한 사실을 보여주는 것이며, 결국 전국 단위의 노동자 집회를 수차례 거치면서 적극적인 태도를 견지하지 못함에 따라 누적된 결과로 이후 이러한 문제 해결을 위하여 더욱 주체적인 노력을 기울였어야 한다고 평가했다. 준비과정에서 드러난 업종회의 내부의 문제, 조합원의 참여 정도, 대회의 내용에 대한 평가 등을 종합해 볼 때 업종회의는 대회를 통해 조직적 성과를 얻는 데 실패했으며, 오히려 조직 내부 이완의 우려마저 제기됐다. 업종회의는 무엇보다도 당면의 대통령선거 투쟁을 매개로 조직의 통일성을 강화하고 힘을 최대한 조직적으로 모아내는 한편, 대표자회의에서 결의된 바 있는 업종회의 중앙위원회를 신속히 구성해 집행력을 강화하는 등의 특별한 노력이 필요하다고 평가했다.
전국노련은 1992년 전국노동자대회가 민주노조의 조직적 발전전망으로서 중요한 결의를 도출해내고 민주노조 총단결의 의지를 다졌다는 커다란 성과를 냈다고 평가하면서도 이를 대중적으로 확산, 조직하지 못했다는 한계를 지적했다. 특히 노동자계급 정치세력화의 중요한 계기인 대통령선거 투쟁에서 노동자계급의 독자적인 성과를 만들지 못하는 정치적 미숙함을 보였고, 그럼으로써 정세의 엄중함과 이에 대응하는 민주노조 진영의 임무를 일반 노동자 대중에게 실천적으로 제시하는 데 실패했다는 점이다. 그럼에도 ILO공대위가 어려운 조건에서도 5만여 명의 대회 참가와 100여 개가 넘는 미가입노조와 많은 노동단체의 대회조직위원회 참가를 조직함으로써 민주노조 진영의 공동투쟁기구로서 위치를 확고히 했다고 평가했다. 이러한 조직적 성과는 연대투쟁의 강화라는 측면에서 계승돼야 하며, 산업별 노조 건설을 위한 전노협과 업종회의의 조직적 확대강화로 이어져야 한다고 평가했다.
전국노운협은 대회조직위원회를 구성하고, 참가자 수가 예년보다는 적었지만 활기찬 분위기를 확인했다는 점을 성과로 뽑았다. 또 노동운동단체 연석회의나 사전결의대회를 통해 변혁적 노동운동 진영의 통일을 위해 노력했고, 산업별 노조 건설과 민주대개혁을 과제로 제시했다는 점도 의미로 평가했다. 그러나 참가 대오의 이동과 해산과정이 타협적이었던 점, 전태일 열사 정신 계승 발전이 언급되지 않은 점, 전반적으로 집중성과 긴장감이 부족했고 진행이 형식적이었던 점, 대공장 노조의 조직적 참여를 추동하지 못한 점 등을 한계로 평가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