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주할 것, 연애하지 말 것, 비밀을 엄수할 것’
(제주지역 야체이카와 적색농조 - 1930년대)
송시우(노동자역사 한내 제주위원회 운영위원)
제주지역 1930년대의 항일운동은 이른바 ‘코민테른 12월테제(1928년)’와 ‘프로핀테른 9월테제(1930년)’의 영향과 청년운동에 대한 일제의 무자비한 탄압으로 비밀조직화 되었고, ‘제주도야체이카(조선공산당 제주야체이카 1927, 재건야체이카 1931)’ 및 ‘적색농조(1933, 1934)’의 결성과 활동이 1930년대 전반기를 주도했으며, 일제 강점기 투쟁 중 혁명적 사상을 기반으로 민중속에서 살다간 투사들이 모습을 볼 수 있다. 이후 중일전쟁(1937년)과 태평양전쟁(1941년)의 소용돌이 속에서도 혁명운동이 지하화되어 가는 것과 궤를 같이한다고 볼 수 있다. 반도의 끝자락 섬에서 국제적인 정세에 조응하고 제주지역 민중들과 새로운 세상을 향해 일제의 탄압에도 굴하지 않는 그들이 진정 혁명가였으리라. 특히 1932년 1월 구좌 좀녀(潛女)투쟁을 일궈낸 야체이카 조직과 활동, 그리고 과거 운동의 오류를 반성하고 거주지 중심의 농민투쟁을 이끈 적색농조 운동은 개량적 운동을 배격한 반제투쟁이야 말로 오늘날 많은 교훈을 준다고 볼 수 있다.
1927년 후반부터 제주청년연합회의 중심인물들은 조선공산당(제3차)에 입당하여, 제주읍내를 중심으로 ‘제주도 야체이카’를 구성해 나갔는데 대표적인 사람들이 송종현, 강창보, 김택수, 오대진 등이었으며, 구역별로 책임자를 두었다. 그리고 이들은 제주청년연합회를 제주청년동맹제주지부로 개편, 활발한 대중운동을 하던 중, 제주도를 포함한 전라도당원들이 1929년 8월에 검거되어 활동의 위축을 가져오게 된다. 그런데도 1931년 5월 ‘재건 조선공산당 야체이카’를 결성하여, 지식인 위주의 운동을 극복하고자 한다. 1931년 7월의 제사(製絲)공장 노동현장 지원이나, 그해 8월 정구대회 구타 사건, 화북지역의 교사배척운동(1929년 6월, 1931년 2월 및 3월), 조천지역의 노동야학 사건(1930년 2월)이나 함덕지역의 한영섭 기념비 사건(1931년 1월), 구우공립보통학교 맹휴 사건(1931년 5월), 모슬포 시위 사건(1929년 5월) 등이 이 시기를 전후한 대표적인 투쟁들이었다. 이런 와중에 보다 엄격한 규율과 철저한 사회주의를 바탕으로 민족 해방을 목표로 투쟁하는 비밀 조직이 결성되는데, 1930년 3월 구좌면 일대에서 결성된 ‘혁우동맹(革友同盟)’이다.
<애국열사 강창보 선생 추모비와 순국선열 부생종지묘>
혁우동맹은 제4차 조선공산당(1928, 7)에 가입하였던 신재홍이 주도하였으며, 문도배, 오문규, 강관순, 김성오, 김순종, 김시곤, 부대현 등이 이에 적극 동참하였다. 그들은 그 지역의 현안이었던 제주도해녀어업조합의 좀녀(潛女) 수탈 문제에 적극적으로 대응하다가, 발각될 위험에 빠지자 1931년 4월에 해체시킨다. 이와 유사한 조직으로 애월지역의 ‘8인동지회’, 신창지역의 ‘신창독서회’ 등이 있었다. 이러한 청년들의 운동이 비밀조직으로 활동 영역을 넓혀 나갈 즈음 제4차 조공사건으로 검거되었던 강창보가 1931년 1월 석방되어 귀향하게 된다. 그는 제주지역 이외에서도 유명한 거두(巨頭)였다. 돌아온 직후 동지들을 규합하여 ‘제주도사회주의운동자 간담회’를 개최하여 청년운동 중심에서 벗어나고 운동 방법의 전환을 모색하였으며, 5월에는 강창보의 제안으로 이익우 오대진, 김한정, 신재홍 등이 지역별 책임자를 선임하고 ‘재건 조선공산당 제주도야체이카’를 결성한다. 특히 당 규율 문제와 입당 자격 등을 세우게 되는데, 그 당시 엄격한 규율과 입당 자격의 제한을 가진 야체이카는 없었다고 전해진다. 특히 이들은 지역별 청년동맹, 해녀회, 소년회, 농민회, 리민회 등을 지도해 나갔으며, 이를 규합하고 지도해 낼 비밀 결사 조직을 결성하기도 한다. 대표적인 것으로 연평리(牛島) 지역의 ‘적(赤)’이다. 특히 구좌, 연평 지역은 이러한 활동으로 1932년 1월의 ‘잠녀투쟁(潛女鬪爭)’을 대중화 시켜 내기도 하였고, 그 이전 1931년 10월 7일, 러시아 혁명 기념일에 맞춰 ‘제주 산지항 축조공사 노동자들의 파업투쟁’을 전개 및 지도해 내기도 하였다. 특히 대정 지역 책임자였던 오대진은 해방 후 제주도인민위원회위원장을 역임한 인물이기도 하다. 그런데 잠녀투쟁 관련자 검속과정에서 야체이카의 실체가 드러났고, 이어 1932년 3월 전도에 걸쳐 검거 선풍이 일어나 강창보를 비롯한 100여 명을 체포 그 중 40명을 재판에 회부하여 22명이 실형을 언도 받게 되어 이후 운동의 위축을 가져왔으나, 한림지역의 ‘무명그룹’과 ‘운동자연구회’ 협재리의 ‘윤독회’, 두모?신창지역의‘5인 결사’ 등과 같은 비밀 조직으로 이어졌으며, 야체이카의 뒤를 이어 새로운 지도부가 꾸려져 적색농조 활동으로 이어진다.
 
<순국열사 김명식지묘> <강정은 평화다.>
야체이카의 책임자였던 강창보가 제주유치장에서 탈출, 도일 직전에 강병희, 부병훈, 강팽학 등에게 운동 재건을 부탁하게 되었고, 김두경과 강팽학은 야체이카 운동의 오류를 비판하면서 운동 지도부가 1932년 8월 경에 다시 건설된다. 김두경은 ‘제주도 야체이카 사건은 동지 다수를 표면에 노출시켜 일망타진되고 마을사람들의 신용을 잃었기 때문에 실패했으며, 농민조직과 같은 하부조직을 확립하고 상부운동을 도모’해야 한다며, 과거의 운동을 비판하여 대중속에서 활동을 주장하게 된다. 이때 지역의 핵심인물로 부병훈(화북), 김경봉(구우면-한림), 김일준(신좌면-조천, 함덕)이 맡게 되어 ‘제주도적색농민조합창립준비위원회’를 1933년 1월 결의하게 되었고, 이를 보고 받은 김두경은 3월에 추인하고, 8월 ‘조선공산당 재건전남동맹’과 연결하게 된다. 적색노조 준비위원들은 농민대중의 신뢰를 얻기 위해 관제 단체에도 접근하기도 하였으며, 대판에서 노동운동을 하다가 귀향한 고경흡을 합류시켜 ‘적색노동연구회’를 결성(1934년 7월)하기도 하였다. 소비조합운동, 협재 방사림 반대 운동, 관제조합비(임야세, 축산조합비, 농회비 등) 거부운동을 벌임으로써 투쟁을 대중화하려고 많은 노력을 기울이던 중, 1934년 10월 구우면에서 조직이 발각되어 62명 입건, 16명이 목포로 이송되어 1937년 4월에 가서 재판이 종결된다. 이 과정에서 함덕 출신 부생종은 취조 과정에서 1936년 6월 옥사하기도 하였다.
세계 경제 대공황이 닥치던 1927년 이후, 일제가 만주 및 중국과의 약탈적 전쟁을 획책하던 시기에 제주지역에는 사상적 기반을 바탕으로 ‘금주할 것, 연애하지 말 것, 비밀을 엄수할 것’ 등의 엄격한 규율과 ‘2년 이상 실천운동에 종사한 자, 6개월간 감시 기간을 경과한 자, 자주적 활동을 한자, 건강을 소유한자, 등의 자격을 내건 조직이 있었다. 이런 조직이 어디 있었으랴. 대중적으로 혁명을 풀어 가고자 계급을 바탕으로 겸손하게 사업을 진행해 나갔던 혁명가들이 어디 있었으랴. 오늘날 곱씹어 볼 일이다.
이 글을 쓰는데 참고한 책들
제주도지 제2권. 2006 제주도 p645~p658
제주항일독립운동사. 1996 제주도 p228~p272
새로 쓰는 제주사. 2005 이영권 p290~p322
4?3과 제주역사. 2008 박찬식 p66~p128
기미년삼일독립운동 87주년 기념 제주독립운동 유적지 체험학습자료. 2006 제주보훈지청?전국교직원노동조합제주지부 p32~p41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