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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5년 11월 1일에 창립된 철도노동조합은 올해로 창립 68주년을 맞는다. 급진적 성격의 ‘조선노동조합전국평의회’(전평) 산하 철도연맹으로서 전평을 이끌어 갔던 철도노조는 탄압을 받아 와해되었다. 이후 대한노총을 거쳐 한국노총 소속의 ‘어용’ 노조로서 독재 정권과 결탁해 오다가, 꾸준한 노조 민주화운동을 통해서 2001년 5월 21일에 민주집행부(제18대 김재길 위원장)를 수립하였다. 그리고 2002년 11월 4일 ~ 6일에 상급단체변경을 위한 조합원 총투표를 통해서 민주노총 산하로 들어왔다. 오랜 철도노조의 역사와 민주화 과정을 수원역지부 최장신 전 지부장의 증언을 통해 되돌아본다.
철도의 민주화를 위해 바친 일생: 최장신 전 수원역지부장의 이야기
이재성 (노동자역사 한내 연구위원)
1987년 노동자대투쟁 이후 철도노동자들의 노조 민주화 투쟁도 시작되었다. 1988년 7.27 기관사 파업투쟁이 벌어졌고, 전국기관차협의회(전기협)이 조직된 후 1994년에 전지협 공동파업(철도기관차직종, 서울지하철, 부산지하철 연대파업)이 전개되었다. 이러한 과정에서 해고된 노동자 200여 명은 철도노조민주화추진위원회(노민추)를 결성했다. 노민추는 몇 개의 조직으로 분화되었다가 1999년 철도민영화 발표 이후 철도민주화추진위원회(철민추)로 통합되었다. 철민추는 위원장 선거 직선제 쟁취를 목표로 투쟁하였고 마침내 2001년 5월 21일에 첫 직선제 선거를 통해 민주노조 집행부를 구성하는 데 성공하였다.(제 18대 김재길 위원장 당선)
1945년 11월 1일에 창립된 철도노동조합은 올해로 창립 68주년을 맞는다. 급진적 성격의 ‘조선노동조합전국평의회’(전평) 산하 철도연맹으로서 전평을 이끌어 갔던 철도노조는 탄압을 받아 와해되었다. 이후 대한노총을 거쳐 한국노총 소속의 ‘어용’ 노조로서 독재 정권과 결탁해 오다가 민주화되었고, 2002년 11월 4일 ~ 6일에 상급단체변경을 위한 조합원 총투표를 통해서 민주노총 산하로 들어왔다. 민주집행부의 출범 이후 철도노조의 활동에 대해서는 다양한 평가가 존재할 것이다. 그러나 무엇보다 반세기 지속된 어용노조를 민주화시킨 철도노동자들의 노력과 성취는 인정받아야 할 것이다.
철도노동조합은 1953년에 단체교섭권을 획득한 이후 1980년까지 노동협의회(1968년 이후에는 노사협의회로 명칭 변경)를 중심으로 노사관계를 형성해 왔다. 그러나 주로 1년에 2~3회에 불과했고, 임금문제는 의제가 되지 못하였다. 의례적으로 채택된 의제들은 주로 노동현장의 노동조건 개선과 조합원들의 복지와 관련된 것이었다. 즉, 장갑, 작업복, 목욕탕, 취사실, 등 노동현장의 후생복지와 직접적으로 관련된 사안들이 대부분이었는데 당시 노동현장에는 복지시설이 거의 없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예를 들면 취사도구나 장갑 등도 개인이 구입하는 경우가 많았다. 역무에 근무했던 노동자들은 숙직실이 비좁아 의자에서 휴식을 취하거나 벽장에 올라가 잠을 자야만 했다.”(주1)
하지만 1980년대 이전의 철도노동자들은 철도청이나 상급 관리자에게 저항한다는 것을 거의 상상하지 못하였다. 노동조합이 나서서 철도노동자들의 순응을 강요하기도 했다. 철도노동조합과 철도청은 단체협약을 통해서 법적으로 보장되던 철도노동자들의 단체행동권을 스스로 제한했던 것이다. 이 제한은 1988년 공공부문노동조합협의회 소속 노동자들이 단체행동권과 관련한 헌법소원을 제출한 후 1991년에 헌법재판소가 “공공부문 노동자들의 단체행동권을 제약하는 근로조건을 개정해야 한다.”는 취지의 판결을 함으로서 복원되었다.
노동자대투쟁 이후 본격화된 철도노조 민주화 투쟁은 사실상 그 이전부터 존재했던 많은 ‘의식적’ 노동자들의 활동이 뒷받침이 되었기 때문에 가능했던 것으로 보인다. 이런 사연을 최장신 전 수원역지부장의 증언을 통해서 확인해보고자 한다. 1954년 충남 서산에서 태어난 최장신은 1974년도에 처음 철도청 철도보조원으로 취직하여, 서울역과 청량리역 등에서 근무하다가 1989년 수원역 역무원으로 발령을 받았다. 그 후 2012년 12월 31일자로 정년퇴임을 할 때까지 수원역 철도노동자이자 민주노조 운동가로 헌신하였다.
최장신이 노동조합 활동을 시작하게 된 계기는 철도노조 내부의 과도한 권위주의와 비민주성 때문이었다. 서울에서 열차원으로 근무할 당시 현직 노조 지부장들은 조합원들에게 ‘거수 경례’를 시켰다. 작업현장은 열악했고 이를 개선해 나가야 할 노동조합은 오히려 조합원 위에 군림하고 있었다. 한 차례 대의원 선거를 나갔다가 떨어지고, 다시 제대로 노동조합 간부가 되기 위해서 영등포역으로 근무지를 변경하였다. 그 후 1년 6개월 동안 차장 시험을 준비해서 차장이 된 후에 다시 1년 6개월 동안 동료들을 설득한 끝에 드디어 1984년 12월 최고 득표로 대의원이 되는 데 성공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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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장신 씨가 펴낸 <현장물결> 1호
당시 노동조합은 간접선거를 통해 지방본부 대의원과 지부장 등 지도부를 구성하면서 평조합원의 의사가 전달되는 민주적 과정이 왜곡되는 ‘중층간선제’였다. ‘민주노조’를 주장하는 조합원들과 지부에서는 지방본부 대의원과 노조 위원장 직선제를 꾸준히 요구해 왔다. 또한 공무원 신분으로서 노동3권이 모두 보장되지 않는 상황에서 ‘쟁의권’이 없다 보니 단체교섭도 형식적일 수밖에 없었다. 최장신 전 지부장의 증언에 따르면 철도노조는 단체교섭을 3년에 한 번씩 하는데 단협 조항에 “토씨 하나 바꾸는 정도”에 그치면서도, 단체교섭비 3,000만 원을 써서 술을 먹곤 했다고 한다. 70년대 초에는 김종필 전 중앙정보부장의 친척이 위원장을 하기도 했고, 그 누구라도 노조 간부가 되면 꽤나 부과 권력을 누렸다고 한다.
1988년 7월의 파업은 비록 이틀 만에 진압이 되었지만, 철도노동자들의 열악한 노동조건을 사회에 알리는 계기가 되었다. 또한 공무원인 노동자의 노동3권 행사에 대한 문제를 환기시키는 역할을 하였고, 무엇보다도 파업 이후에 진행된 대의원 선거 등에서 새롭게 민주적인 활동가 진용이 갖추어지기 시작하면서 1990년대 초까지 철도노조 안팎에서 새로운 흐름들이 자라나는 시발점이 되었다. 이는 1994년 ‘궤도 3사 노동자 공동투쟁’으로 이어진다. (주2)

출처 : 철도노동자 7호
최장신은 1994년 파업 당시 수원역 역무원으로 일하면서 전국철도노동조합 서울지방본부 수원지부 연합지부장을 역임(1992~1994년)하고 있었다. 파업이 있기 전 2월부터 수원지부 지부장으로서 철도노조 내 민주화를 위해 일하다가 전국철도노조 대의원대회 도중에 100여 명과 함께 단상을 점거하고 “어용노조 박살내고 민주노조 건설하자.”는 등의 구호를 외치며 노조 지도부를 성토하는 과정에서 기물을 파손한 사건이 벌어졌다. 이로 인해 업무방해죄 등으로 벌금형을 받았고 1994년 8월 24일 서울지방철도청에서 파면되게 되었다.
결국 최장신 지부장은 1994년부터 복직투쟁을 시작하였고 그 어느 때보다 고난의 시기를 보내게 되었다. 그가 꿈에도 그리던 복직을 하게 된 것은 2004년이 되어서였다. 불가능해 보이던 복직이 가능했던 데에는 2001년에 소위 ‘철도노조 민주화’가 이루어졌기 때문이었다. 2004년 12월에는 철도청장 표장이, 2007년 12월에는 철도공사 사장 표장이 수여되어 최장신 지부장의 명예회복은 직장 수준에서 분명히 이루어질 수 있었다. 그러나 이 사건과 처분에 대해 2005년 민주화운동관련자명예회복및보상심위위원회에서는 ‘민주화운동으로 인한 처벌 및 해직’으로 인정하지 않는 결정을 내렸다.(주3)
2002년의 상급단체 변경도 평온한 분위기에서 진행되지 않았다. 철도청에서는 조합원 총투표를 부결시키기 위해 기존 업무를 전폐하다시피 하였고, 흑색선전물이 철도청 팩스를 통해 유포가 되고, 조합원 집집마다 편지가 배달되었다. 교육시간은 민주노총과 철도노조에 대한 성토장이 되었고, 징계 위협에다가 투표 당일에는 좁합비와 조합원 92명에 대한 78억 원의 가압류까지 신청하면서 상급단체 변경을 위한 총투표를 방해했다. 그 결과 2001년 조합원 설문조사에서 상급단체 변경에 82%가 찬성한 데 반해 2002년 실제 투표에서는 54%의 찬성으로 가결이 되었다.(총 21,722명 중 94.1%가 투표하여 11,043명이 찬성함)
최근 철도사고가 많이 발생하면서 철도의 안전 문제에 대한 문제제기가 늘어나고 있다. 여러 가지 이유 중에서 소위 ‘철도 경영개선’이라는 명목 아래 기능직 공무원을 대폭 줄여가고 있는 데 근본 원인이 있음은 분명하다. 또한 기존 정규직 인원을 대거 비정규직으로 전환해 오면서 고용불안 문제까지 심각해지고 있는 실정이다. 영국과 일본에서도 철도 민영화, 합리화, 구조조정은 대형사고와 노동강도 강화, 비정규직 증가로 귀결되었다.

최장신 씨가 시민을 구한 미담 기사가 있다. 2007년 당시 그는 53세였다.
http://news.korail.com
최장신 전 지부장은 말한다. ‘노동자들이 시민의 발목을 잡는다’는 말이 제일 듣기 싫다고. 노동자들이 왜 철도의 진정한 주인인 시민들의 발목을 잡겠느냐는 것이다. 한 평생을 철도노조 민주화와 노동조건 개선, 그리고 철도 공공성 사수를 위해 살아온 한 노동운동가는 이제 현장에서 물러났지만, 최장신과 같은 노동자들의 희생과 헌신으로 인해 우리 철도노조의 오늘이 존재할 수 있었다는 것은 결코 잊혀져서는 안 될 것이다.
(주1) 강갑구, 이곤익 등 증언; 김영수, ?1960~70년대 한국 철도노동자들의 노동현장과 노동조합?, 이종구 외, [1960~70년대 노동자의 작업장 경험과 생활세계], 한울아카데미, 2005, 80쪽에서 재인용.
(주2) 자세한 내용은 [철도노동자] 제7호, 2011년 가을호 특집 기사를 참조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