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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노협 산업재해․직업병 추방투쟁(1995년)
투쟁 배경과 목표
1994년 이후 ‘신경영 전략’이라는 이름 아래 현장에 가해진 노동 통제와 노동강도 강화로 조선소 노동자들의 산업재해·직업병 문제는 더욱 심각해졌다. 또 하청업체를 무분별하게 양성하면서 최소한의 안전시설조차 갖추지 않은 채 위험한 작업을 재촉했다. 이러한 노동강도 강화와 안전시설 미비로 2월 7일 한진중공업 수리선 대형화재 참사가 발생하기도 했다.
더욱이 자본은 산업재해와 직업병의 실태를 온갖 수단과 방법을 동원해 축소·은폐·조작했다. 실제로 사고 책임을 조합원에게 돌리고 산업재해를 공상이나 의료보험 처리하거나 하청업체로 떠넘기는 일이 비일비재했다. 그런데도 회사는 버젓이 ‘무재해 달성’ 업체로 표창을 받았다.
(코리아타코마조선은 1991년부터 3년간 산업재해 환자 51명을 회사에서 자체 공상 처리해 경고를 받았다. 1993년 12월 현대중공업에 합병된 현대중전기는 1992년부터 2년간 산업재해 환자 26명을 자체 공상 처리해 ‘무재해 달성상’이 취소됐다. 현대미포조선은 4일 이상 요양해야 하는 산업재해 환자 8명을 공상 처리해 경고를 받았다. 현대중공업은 1993년 한 해 동안 856건, 대우조선은 1991년부터 3년 동안 3,232건을 각각 자체 공상 처리했다. 1990년 이후 1995년 8월까지 한진중공업은 산업재해 사망자 7명 중 2명을, 현대중공업은 산업재해 사망자 41명 중 9명을, 대우조선은 산업재해 사망자 8명 중 2명을 산업재해 사망자 소속회사(협력업체) 산업재해로 처리해 해당업체 대표가 사법처리됐다.)
특히 1994년 대우조선노조는 자체 재검진 결과를 통해 회사 건강검진 기관인 대우병원의 건강검진 결과가 직업병을 축소·은폐·조작했다는 사실을 입증하기도 했다. 1992년 대우병원에서 개인 질병 판정자 56명과 진단결과가 알려지지 않은 21명 등 80명에 대해 노조가 나서서 한국노동보건직업병연구소(직업병연구소)에서 건강검진을 재실시했다. 그 결과 69명이 직업성 난청자로 밝혀졌고, 1993년 대우병원에서 정상판정을 받은 12명 등 19명도 직업병연구소 검진 결과 진폐증 5명, 진폐의증 4명 등으로 나타났다. 직업병연구소와 대우병원의 소견 일치율은 7.1%에 불과했다. 같은 총수 밑에 있는 조선소와 병원이 노동자의 직업병 사실조차 속여온 이 사건은 국회 환경노동위원회의 국정감사로까지 번져 큰 사회문제가 됐다. 결국 노조는 연말에 쇠사슬 투쟁을 벌여 대우병원의 검진결과를 노사가 동수로 추천한 의사가 오진 여부를 판정하도록 하는 장치를 확보하게 됐다.
조선노협은 이러한 조선소 산업재해·직업병 발생은 노동자의 생명과 건강권조차 돈벌이를 위한 부품으로 취급하는 생산 제일주의와 신경영 전략에 그 원인이 있다고 규정했다. 이에 따라 1995년에 산업재해·직업병 추방 투쟁을 대중적으로 전개한다는 방침을 세웠다. 조선노협 산업재해·직업병 추방 투쟁의 목표는 △조선소 노동자의 산업재해와 직업병 실태의 심각성을 내외에 적극적으로 알린다 △정부와 회사, 그리고 한국조선공업협회가 근본적인 산업재해·직업병 대책을 마련하도록 만든다. △산업재해·직업병 추방 투쟁을 힘차게 조직해 조선노협의 조직력과 투쟁력을 강화하고 조직의 위상을 높여 나간다 등이다.
조선노협의 산업재해·직업병 추방 투쟁은 조합원의 건강권을 확보함과 동시에 노동 통제와 강화를 초래하는 신경영 전략에 맞선 투쟁이었다. 또 정당한 임금인상 요구를 ‘대기업 이기주의’니 ‘세계화의 장애물’이니 하며 몰아붙이는 정권의 이념 공세에 대해 노동자의 현실을 대변하고 투쟁의 정당성을 입증하는 투쟁이었다.
투쟁 준비와 결의
1994년 11월 29일 조선노협 산업안전국 4차 회의에서는 조선소 직업병 문제의 심각성을 인식하고 1995년에 조선노협 산업안전국 중점사업으로 산업재해·직업병 추방 투쟁을 전개하기로 결의했다. 이어 1995년 2월 18일 정기대의원대회에서 산업재해 추방 투쟁을 1995년 조선노협 3대 투쟁의 하나로 설정하고 강력한 투쟁을 결의했다.
준비 작업으로 조선업 산업재해·직업병과 관련한 1994년 국정감사 자료를 수집하고, 1995년 1월 6일부터 27일까지 직업병연구소에 의뢰해 조선노협 직업병 정밀검진을 시행했다. 그 결과는 검진자 86명(진폐 40명, 소음성 난청 46명) 중 진폐증이 19명, 소음성 난청이 24명으로 판정됐다.
2월 21일 조선소 산업재해·직업병 추방 투쟁을 위한 산업안전 관련 단체 간담회를 하고, 3월 중순 ‘조선노협과 함께 산업재해·직업병 추방하자’는 포스터를 제작해 각 단위노조에 붙이고 투쟁 일정을 공표했다. 3월 24일 국회의원회관에서 250여 명이 참가한 가운데 조선소 산업재해·직업병 추방을 위한 공청회를 실시하고 과천 노동부 항의방문, 기자회견 등을 진행했다. 3월 28일에는 6개 노조 동시다발 ‘산업재해·직업병 추방 조선노협 결의대회’를 열어 대중적 결의를 모아냈다. 4월 10일 각계각층 지식인 264명은 조선소 산업재해·직업병 추방 대책 요구 성명서를 발표했으며, 4월 11일 자 <한겨레신문>에 광고를 실었다.
산업재해․직업병 추방을 위한 투쟁 전개
조선노협은 4월 11일부터 13일까지 산업재해·직업병 추방을 위한 상경 농성투쟁을 전개했다.
11일 조선노협 노동자들은 일하던 모습 그대로 한국조선공업협회를 항의 방문한 뒤 ‘우주복(작업복)’을 입고 명동성당까지 거리행진을 하며 대시민 홍보를 했다. 12일 명동성당에서 출정식을 하고 한진해운센터까지 행진, 한진그룹을 항의 방문한 뒤 마포 민주당사와 여의도 민주당사를 방문했다. 이날은 노동부 면담을 진행했는데 노동부 관계자는 “노동부 산업안전국, 조선노협 소속 각 단위노조 산업안전부장과 회사측 산업안전보건 총괄 책임자 등이 참여하는 대책회의를 갖자”고 제안했다. 이어 13일에는 현대, 한라, 대우그룹 소속 노조별로 본사 항의방문을 진행했다.
전노협은 조선노협의 투쟁을 적극 지지하며 4월 13일 자 <전국노동자신문>에 광고를 게재했고 지지팩스 보내기와 선전전 결합 등 지원 투쟁을 전개했다.
4월 16일 16차 조선노협 중앙집행위원회에서는 12일 노동부가 제안한 안을 수락하기로 결정하고, 산업재해·직업병 추방 투쟁의 대중적 전개 방안을 마련했다. 이에 따라 단위노조별로 요구사항을 공문으로 발송하고 회사측이 성의 있는 대안을 제시하지 않을 시에 1995년 정기검진 거부 조합원 서명운동을 전개하고 산업재해·직업병 추방을 위한 5개 지역 시민 선전전을 5월 13일 오후에 일제히 실시하기로 했다.
4월 28일 조선업종 재해 예방 노사정 대책회의가 열려 조선노협 각 노조 대표가 참여해 “조선업과 수리조선업 안전보건 기준을 제정하기로 하고 이를 위해 조선업 전문가 회의를 개최해 조선노협의 의견을 개진하기로” 했다. 이후 조선업 전문가 회의는 7월 5일, 9월 1일, 10월 20일, 세 차례 열렸다.
5월 13일 5개 지역 동시다발 선전전에는 거제 대우조선 30여 명, 마산 코리아타코마 등 100여 명, 인천 한라중공업 등 1,000여 명, 부산 한진중공업 등 100여 명, 울산 현대중공업·현대미포조선 등 300여 명이 참여해 “당신의 남편 회사에서 이렇게 일합니다”라는 산업재해 실태를 알리는 유인물을 배포했다. 이러한 활동으로 사회여론이 형성되자 5월 14일 MBC ‘시사매거진 2580’에서 조선소 산업재해·직업병 실태를 심층 취재 보도해 여론의 주목을 받았다.
5월 31일에는 직업병연구소 등의 주최로 여의도 국회의원회관에서 70여 명이 참석한 가운데 ‘조선업종 직업병 진단과 사후 관리에 대한 공청회’가 열렸고 7월 13일에는 종로성당에서 노동과건강연구회 주최로 ‘노동자 건강진단 제도의 운영실태와 노동자 참여 방안에 관한 공청회’가 열렸다.
8월 30일에는 한진중공업 김수년 조합원 강제 치료종결에 항의차 근로복지공단 부산본부를 방문했고 9월 21일에는 치료종결 및 요통재해 환자 등급 하위 판정문제 등에 항의하며 전국 산업안전 담당자들이 근로복지공단본부(서울)를 공동 항의방문했다.
조선노협은 이러한 투쟁의 결과 △노동자 특수건강진단 지역 할당제 폐지 △공정 안전보고서(PSM : Pross Safty Management) 및 물질안전보건자료(MSDN) 작성 의무화 △조선업 작업환경 전문연구기관 지정 △작업환경 측정 관계규정 개정(지역제한 철폐, 측정시 근로자 대표의 입회 및 설명회, 작업환경 측정기관에 대한 업무정지 처분 근거 마련) △‘조선업 위험 관리실’ 구성·운영 등 자율 안전관리 지원 △특수건강진단 기관의 정도 관리를 산업안전공단 산업보건연구원으로 이관 △유해위험 작업 분리도급 금지 확대 등 조선소 산업안전보건 관련 제도·정책을 변화시키는 성과를 거두었다.
평가
1995년 산업재해·직업병 추방 투쟁을 계기로 조선소 노동자들의 건강문제에 대한 인식이 크게 높아졌다. 조선노협은 결속력이 강화됐으며 조합원 사이에 명실상부한 상급단체로서 자리를 다졌다.
또 조선소 산업안전보건 관련 여러 규정이 개정돼 조선소 노동자뿐만 아니라 다른 업종 노동자의 건강권 향상에도 많은 도움이 됐다. 조선노협의 산업재해·직업병 추방 투쟁을 통해 향후 노동운동의 주요한 영역으로 노동자 건강권 문제가 제기되어야 함을 확인하기도 했다.
그러나 직업병 정밀검진 결과 오진으로 판정된 노동자들에 대해 노동부와 근로복지공단이 인정하기를 거부하는 바람에 직업병에 걸린 노동자들에게 실질적인 혜택이 돌아가지는 못했다. 그리고 상반기 산업재해·직업병 추방 투쟁의 성과를 집약해 산업안전보건법 개정 투쟁을 전개해야 했으나 당면한 민주노총과 금속연맹 건설 일정에 밀려 추진하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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