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별 아내가 면회 와서 하는 말이 아버지가 면회하고 싶다고 하셨단다. 나는 결사반대했다. 철창에 갇힌 아들을 바라보는 아버지 마음이 예상되기 때문이다. 그로부터 일주일쯤 지난날, 아버지가 온통 흙탕물이 묻어있는 하얀 도포를 입고 있는 이상한 꿈을 꾸다 깼다. 좀처럼 다시 잠이 오질 않아 뜬눈으로 꼬박 밤을 새웠다. 첫 면회가 왔다는 소릴 듣고 집에 무슨 일이 있다는 걸 직감했다. 평소에 면회 오는 시간은 11시쯤이 보통인데 첫 면회인 9시는 처음이기 때문이다. 김상복까지 3명의 동지가 면회실로 들어선다. 예상한 대로 표정들이 무겁고 어두웠다. 내가 먼저 “집에 무슨 일 있는 거 맞느냐?”고 했더니 어떻게 알았냐며, 아버지가 돌아가셨다고 한다. 일시적으로 모든 사고가 멈춘 느낌이랄까. 방으로 들어와 그냥 멍하니 앉아 있었다. 보안과장이 보자고 해서 갔더니 위로한답시고 커피 한 잔을 주며 “아버지가 돌아가셨으니 당연히 보내드리고 싶지만, 구치소 규칙도 있고 해서 불가능하니 제발 마음 굳게 잡수셔라” 한다. 나의 아픈 마음보다는 혹 사고 칠까 두려웠나 보다. 무엇보다 임종을 지킬 수 없었다는 자책이 밀려왔다. 임종이란 돌아가시는 분이 이승과 저승의 교차점에서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고 편안한 마음으로 갈 수 있도록 마지막 곁을 지킨다는 뜻일 것이다. 평생 아버지 바람에 반대 방향으로만 질주해온 자식으로서 고통은 내가 감당해야 할 몫일지도 모른다. 눈물 한 방울 나오지 않았다 날이 어두워지면서 마음에 괴로움은 더욱 깊어지고 부모와 자식에 대해 처음으로 생각해보는 시간이 되기도 했다. ‘인연에서는 죽음이 마지막 선물’이라는 말이 있는데 선물의 의미가 뭘까도 생각했다. 뜬눈으로 밤을 새우는 동안 교도관은 연신 방을 기웃거린다. 그렇게 밤을 새우고 뿌연 새벽이 뺑기통 작은 창가로 스며들고 있었다. 아침밥이 들어오나 했는데 교도관이 방 앞에 오더니 빨리 짐 싸서 나오란다. 어제는 못 보내준다고 해놓고는 보따리를 싸라는 걸 보니, 급작스럽게 보석으로 석방되는가 하는 생각을 잠깐 하기도 했다. 보안과 사무실로 갔더니 장례 잘 치르고 오라고 한다. 다시 오라고 하는 거로 봐서, 보석은 아니었고 외출 같은 것(귀휴)이었다. 구치소 밖에서 기다리는 동지들과 집 앞에 도착하니 수백 명이 즐비하게 늘어서 있다가 좁은 길을 내준다. 길을 따라 집으로 들어가는데 그렇게 창피할 수가 없었다. 집에서는 식구들이 상주 왔다고 곡을 하면서 나를 맞이한다. 나는 눈물 한 방울 나오지 않았다. 상주가 오면 하려고 염도 미루어두었다며 아버지 얼굴을 보라는데 볼 마음이 생기지 않았다. 살아 계실 때 별로 못 보던 얼굴인데 돌아가신 모습을 마지막이라는 이유로 들여다보기에는 염치가 없었다. 내가 외출을 나오게 된 사연을 들었다. 집에서는 권영길 위원장이 상주 역할을 하고 있었고 그 시간에 청와대에서 문상을 왔다고 한다. 문상 온 그들에게 권 위원장이 협박을 했다고 한다. “보다시피 이 집에 상주는 양위원장 하나인데 만약 장례일까지 상주가 오지 않으면 우리(민주노총)는 관을 매고 청와대로 갈 테니 그렇게 알고 가라”고 했단다. 백기완 선생이 문상을 오셨다. 가시는 길에 일어서며 “선생님 우리 집안 풍습은 상주가 바깥에 나가지 않는 것이어서 여기서 인사하겠습니다.” 했더니, 그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혁명가가 고리타분한 유교적 습성에서 벗어나지 못하냐”고 야단치신다. 장례를 마치고 동지들과 함께 검찰청으로 향했다. 2년 동안은 잡히지 않으려고 애썼고, 지금은 스스로 그들에게 찾아가는 이 아이러니한 상황을 어떻게 설명할까. 장례 후에 들어오겠다는 허접한 약속 때문일까. 살기 위해, 아버지에게 편지를 쓰다 검찰청에서 동지들과 헤어지고, 나는 그들의 승용차를 타고 다시 서울구치소로 이동했다. 또 입방 절차가 시작돼 배방을 하는데 이번엔 다른 사동이다. 내가 있던 방 뺐냐고 물었더니 여전히 비어있다고 해서 그 방으로 가겠다고 했다. 지네끼리 수군덕거리다가 살던 방으로 안내했다. 외출 다녀온 첫날 밤의 독방은 정말 힘들었다. 짧지 않은 세월 동안 아버지에 대한 기억들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나를 괴롭혀 왔다. 긴 한숨 속에 죄송한 마음을 담아보려 했으나 오히려 더 큰 고통이 다가왔다. 그런 시간이 하루 이틀에 멈추지 않고 점점 심각한 상태로 변해가고 있었다. 삶과 죽음에 대한 진지한 고민, 멈추지 않는 아픔은 소리 없이 펑펑 쏟아지는 눈물로도 해소되지 않았다. 장례식 내내 흘리지 않았던 눈물이 평생 흘렸던 것의 수십 배로 쏟아져도 소용없었다. 밥도 잠도 운동도 모두 귀찮아지는 시간이 길어졌다. 살기 위해 편지를 쓰기 시작했다. 살아있는 자식이 돌아가신 아버지에게 보내는 편지는 당연히 메아리가 없지만, 내가 살기 위해 그냥 써 내려갔다. 아버지 삶의 흔적과 내가 선택했던 운동에 대한 변명, 생전에 좋지 않았던 아버지와의 관계, 그리고 아버지에 대한 그리움으로 자신을 달래고 있었다. 아내가 면회 왔을 때, “집으로 편지를 보냈으니 49재 때 아이들이 나 대신 아버지 지방 앞에서 길지만 좀 읽어주라”라고 부탁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