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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달의 역사
..... 경동산업 노동조합 결성 시도_김원 (49호)
첨부파일 -- 작성일 2013-01-14 조회 1111
 

1970년대 민주노동운동의 상징인 동일방직의 해고자 출신 정명자와 다른 선진노동자 김흥섭, 대학생 출신 한덕희, 최봉근, 김종호 등이 주도하는 민주노조 결성 움직임이 1984년부터 시작되었다. 그러던 10월에 이런 시도가 사측에 발각되어 부서이동과 폭행 등을 당했고 손맹식 등 10여 명이 자진사퇴 형식으로 강제사직을 당하기도 했다.

경동산업 노조 결성 시도


김원(노동자역사 한내 연구위원)

경동산업은 1960년 영등포에 공장을 건설하면서 운영이 개시되었는데, 애초 모기업은 1946년에 설립된 삼환기업공사였다. 삼환기업공사는 경동산업 대표 최경환의 두 형과 동생 삼형제가 설립한 것으로서, 이들은 일제시대에 ‘스기야마 제작소’부터 1933년에는 경동기계제작소를 창업한 역사를 가지고 있었다. 다른 형제들이 운영하는 삼환기업공사는 5.16 이후 각종 건설업을 통해 급성장했고, 경동산업도 양식기와 주방용품 분야에서 세계 최고 생산량을 기록했다. 경동산업은 인천시 북구 가좌동 인천교 옆에 위치하고 있었는데, 삼환기업그룹의 계열회사로 영등포에 본사를 두고 인천에는 주로 양식기와 주방용품을 생산하고 있었다. 처음 사업을 시작한 때는 1960년으로, 서울 영등포에 국내 최초로 대미수출을 시작했다.
1983년에 인천 서구 가좌동에 제2공장을 설립했고, 전자동 종이컵 공장 생산라인도 가동되었다. 1987년 6월에는 영등포 문래동 공장을 처분하고 1987년 당시 경동산업에는 2,500여 명의 노동자들이 일하고 있었다. 당시 경동산업 사장 최경환은 아시아양식기협회의 회장이고 동생인 삼환그룹 회장 최종환은 전경련 부회장을 맡고 있었다. 당시 연간 매출액은 500억 원이 넘었고, 순이익만 30~40억 원으로 80년대 말에 세계 최대 양식기 생산업체였다.

 

살인적 노동강도와 중간관리자

그런 만큼 경동산업의 기업운영과 노무관리의 전통은 식민지 시대와 군사문화의 영향을 받아서 지역에서 가장 노동강도가 세고 노동조건이 열악하다고 알려졌다. 그 결과로 매월 유동인원은 약 500여 명에 달했고, 1년 이하 근무자가 60~70%에 이를 정도로 이직률이 높았다. 1980년대 초중반에 걸쳐서 많은 산재 사망, 부상사고가 났지만 회사 측에서는 적절한 조치를 전혀 취하지 않았다. 이는 80년대 당시 학생 출신의 노동운동가들이 쉽게 위장취업에 성공할 수 있는 배경이 되었다.
특히 중간관리자 문제가 심각했는데 관리자들은 노동자들 가운데 선택된 사람들로, 다른 노동자들과의 계급적 동질성에도 불구하고 현장의 ‘최하층 가신’으로서 행동함으로써 노동자들의 제1의 공적으로 지목됐다. 이들은 직접적으로 현장을 통제하고, 특히 노동조합 결성 움직임에 대응했다. 실제로 1985년 1월에 경동산업에 최초로 민주적 노동조합을 결성하려고 했을 때, 사측은 관리자들을 중심으로 한 노동조합을 결성하는 동시에 노동조합 설립신고서를 제출하고 편법적으로 승인을 받음으로써 노조 결성을 무력화시켰다.
그 가운데 가장 빈번하게 일어났던 일은 각종 노동법에 대한 위반이었다. 1985년 당시 경동산업은 근로기준법 47조에 명시된 월차휴가를 하루분의 일당으로 계산하여 지급한 뒤, 다음 달에 결근을 하게 되면 그 벌로 3일치 일당을 제하는 방식으로 노동법을 위반했다. 또한 근로기준법 48조의 연차휴가는 한 번도 시행하지 않았고 근로기준법 46조의 잔업수당 계산법도 어기고 ‘제 수당’을 완전히 제외하고 지급하였다.
임금에 있어서도 경동산업은 대기업이면서도 남자 초임 3,150원, 여자 초임 2,650원이라는 최저 임금수준으로 근로자를 혹사시키고 있으며 임금인상도 관리자에게 잘 보인 사람들 극소수만 간혹 개별적으로 몇 백 원씩 올려주었다. 주종 기계인 프레스에는 안전장치가 거의 없고 매일 일어나다시피 하는 사고발생에 대한 재해보고서 ‘원인’란은 아예 ‘작업자 부주의’라고 인쇄를 하는 것이 나을 정도로 책임을 작업자에게 전가했다. 작업이 끝나 몸속까지 새까맣게 된 근로자들이 사용하는 세면장은 5평 남짓하고 한구석에는 오줌통이 즐비하게 늘어서있어 쓰레기장을 방불케 했고, 노조 임원 및 적극 참여자들 주변에는 항상 감시자 2~3명이 쫓아다니며 감시하고 다른 작업자와는 대화도 못하게 했다.

 

민주노조 결성 시도

이처럼 1985년 1월 경동산업의 민주노조 결성의 첫 시도가 무위로 돌아가게 한 어용노조의 위원장 정현영은 그해 3월 근로자의 날을 맞아 회사에서 주는 공로상을 받았다. 정현영 등은 10대 후반에 경동산업에 입사하여 허드렛일부터 배우기 시작해 15년 이상 근속하면서 지금은 기능공으로 진급도 하고, 많은 월급을 받고 있었다. 또한 회사에서는 노동조합을 노동현장을 관리하기 위한 제도적 수단으로 활용하고자 했다.
한편 1970년대 민주노동운동의 상징인 동일방직의 해고자 출신 정명자와 다른 선진노동자 김흥섭, 대학생 출신 한덕희, 최봉근, 김종호 등이 주도하는 민주노조 결성 움직임이 1984년부터 시작되었다. 그러던 10월에 이런 시도가 사측에 발각되어 부서이동과 폭행 등을 당했고 손맹식 등 10여 명이 자진사퇴 형식으로 강제사직을 당하기도 했다. 이에 정명자와 김흥섭은 12월 13일에 회사에서 “우리의 고통에 귀 기울여 주십시오”라는 호소문을 배포하고, 17일에는 제본실에서 부서원 36명 중 야간자를 제외한 26명이 임금인상을 요구하며 작업을 거부하는 사건도 발생한다.
마침내 1985년 1월 14일에 노동조합 결성식을 이들은 갖고 시청에 설립신고서를 제출하였다. 위원장은 김흥섭이 맡고, 노조 임시사무실은 김종호의 방으로 정했다. 이렇게 설립된 경동산업의 민주노조는 15일 한국노총 산하 전국 금속노동조합연맹에서 가맹증을 받았고, 16일에 인천시청에 노조 설립신고서를 제출하였다. 이에 사측은 김흥섭, 한덕희를 인사위원회에 출두시켜 노조 결성식 참가자 4명을 12일자로 사직서를 작성하여 버렸다. 그리고 김흥섭과 한덕희 역시 15일자로 소급하여 해고를 통보했다.
그러는 사이에 관리자를 중심으로 한 정현영 외 34명이 어용노동조합 결성대회를 열었고, 인천시청에서는 노조 설립대회 시 노동자 참석 인원이 아니라 노조 설립신고서 제출 시 노동자의 상태를 기준으로 둔다고 밝혀, 설립신고서 반려의 의사를 밝혔다. 노동자들은 경동산업 노동조합의 명의로 “경동산업 노동조합 탄압을 즉각 중지하라!”는 성명서를 배포하였다. 또한 사측의 감시, 미행, 격리, 협박, 회유, 사표 강요 등 부당노동행위인천시청의 편파적 판정, 경찰과 여러 기관의 압박 행위, 금속노련의 노조 교육 요청 묵살 등의 행위를 사회화시키려고 했다. 더불어 노동조합 탄압 중지, 해고자 복직, 설립 신고필증 교부, 금속노련의 노동조합 교육 지원 등을 요구했다.
그러나 1월 25일에 인천시청은 결국 정족수 미달을 이유로 노조 설립신고서를 반려하면서, 정현영의 어용노조에 대해서는 신고필증을 교부하였다. 회사는 노조에 참여했던 노동자들을 회유하거나 폭행하는 등 노조탈퇴를 강요하였고, 결국 일부는 해고됐다. 2월 20일에는 회사 측과 가까운 어용 노조의 임시총회가 열려서 이호연 사무국장 등 임원진을 선출했다.
한국노총은 7월 15일 경동산업의 어용노조에게 가맹 인준증을 발급하고, 1985년 말에 김흥섭과 한덕희가 구속되면서 경동산업 민주노조 설립의 첫 번째 시도가 좌절로 마무리된 것이다. 물론 민주노조 결성에는 실패했지만, 경동산업의 해고자들은 구로지역, 인천지역 노동자들과 함께 ‘살인해고 중지, 노동악법 개정, 노동운동탄압저지 투쟁위원회’를 결성하고, 4월 10일 오후 7시에 부평1동 성당에서 결성대회를 개최함과 동시에 3일간 농성을 진행하였다. 이런 과정에서 노동조합은 회사가 월차휴가 제도를 실시하도록 하는 데에 성공했다.

 

민주노조 결성 시도 이후


이후 6월 17일 경동산업, 대림통상, 한일스텐레스, 한영알미늄, 신한일전기, 이천전기, 영창악기, 한국후지카 등 인천지역 8개 사업장 해고 노동자 13명이 신민당사에서 부당해고 및 조직폭력에 의한 노동자 탄압에 대한 항의 농성을 7월 1일까지 전개하였다. 이처럼 경동산업의 민주 노조 결성은 실패하였으나, 민주노조 운동의 경험과 해고자들의 지속적인 노력으로 1986년에 새롭게 현장 모임이 시작될 수 있었다. 경동산업은 열악한 노동조건 때문에 이직률이 높아서 입사도 매우 쉬운 편이었다. 따라서 많은 학출 노동자들이 ‘수시로’ 현장으로 파고 들었고, 경동산업을 주된 활동 공간으로 삼고자 했던 새로운 활동가들이 모임에 결합하였다. 노동자 출신 활동가 이건탁, 서형옥, 신명철과 학생출신인 김학철, 오동진, 박병우 등이 초기 멤버들이었고, 나중에 김성렬, 박순길 등 현장 노동자들이 결합했다. 이들에 의해 1986년에도 현장에서는 산발적인 비공식적 투쟁이 전개되었고, 1987년 2월부터는 공장 밖의 해고자들과 함께 ‘민주노조건설과 근로조건 개선을 열망하는 노동자 일동’의 명의로 <부활 인천교 소식> 제 1호를 배포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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