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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노래를 통해 본 노동자역사 : 동지가와 6월 항쟁
첨부파일 -- 작성일 2008-06-02 조회 1859
 

노동자역사 한내 뉴스레터 창간준비 제3호 (2008년 6월 2일)
노래를 통해 통해 본 노동자역사 (3) : 동지가와 6월 항쟁


한여름의 기운이 시작되는 유월입니다. 이달의 노래로 21년 전 여름 모두가 한 목소리로 불렀던 노래 ‘동지가’가 생각이 나 이 노래에 얽힌 이야기를 조금 적어 보도록 하겠습니다.

동지가(1985∼6년으로 추정)
1.휘몰아치는 거센 바람에도 부딪혀오는 거센 억압에도/ 우리는 반드시 모이었다 마주 보았다/ 살을 에는 밤 고통 받는 밤 차디찬 새벽 서리 맞으며 우린 맞섰다/ 사랑 영원한 사랑 변치 않을 동지여 사랑 영원한 사랑 너는 나의 동지
2. 세상 살아가는 동안에도 우리가 먼저 죽는다 해도/ 그 뜻은 반드시 이루리라 승리하리라/ 통일되는 날 해방되는 날 희망찬 내일 위해 싸우며 우린 맞섰다/ 투쟁 영원한 투쟁 변치 않을 동지여 투쟁 영원한 투쟁 너는 나의 동지.
‘퍽 하고 치니 억하고 죽었다’는 1987년 1월 15일의 신문기사는 전두환 정권이 저지른 만행의 단면을 세상에 알리는 한 계기였습니다. 서울대생 박종철군의 고문사망 사건을 계기로 전두환 군사독재의 폭압 현실이 세상에 명명백백하게 알려지면서 80년 광주의 학살과 독재치하 벌어진 숱한 의문사에 대한 항명의 기초가 마련되었습니다.

박종철군의 고문사망 사건 후 이에 대한 저항과 항의의 움직임이 서서히 전개되던 4월, 전두환은 개헌논의를 유보하고 5공 헌법을 그대로 유지하여 12월 체육관에서 대통령 선거를 치루겠다는 ‘4/13 호헌’조치를 선언합니다.
이에 전국 대학교수들은 ‘위헌 시국성명’을 발표하고 천주교정의구현사제단은 단식기도를, 그리고 제민주단체들은 ‘민주헌법쟁취범국민운동본부’를 결성하였습니다. 그리하여 6월 10일 ‘고문치사 은폐조작 규탄과 호헌철폐 민주헌법쟁취 범국민대회’까지 전국적 행동을 조직하고 확산시켜 나가는 상황이었습니다.
6월 9일 ‘6/10대회’를 하루 앞둔 전날, 집회시위 도중 연세대 이한열군이 경찰이 쏜 최루탄(직격탄) 파편에 목숨을 잃으면서 ‘호헌철폐! 독재타도! 민주쟁취!’의 외침과 투쟁은 들불처럼 전국으로 확산되었습니다.

마침내 시민들의 민주주의와 독재타도, 불의에 항거하는 저항으로 거리의 보도블럭은 온통 짱돌로 변했고, 연일 도로를 점거한 학생과 시민들의 시위와 전투경찰의 최류탄으로 도시 거리는 제 기능을 담당하지 못하고 정지된 상황에서 6월 29일 노태우의 기만적인 ‘6/29선언’이 발표됩니다.
지금도 이해할 수 없는 일은 ‘보통사람 노태우의 등장’과 국민이 직접 투표할 수 있는 권리를 얻은 ‘6/29선언’만으로 그 뜨거웠던 6월의 거리가 급속히 냉각이 될 수 있었다는 점입니다. 20여 년이 지난 지금 생각해도 이해가 되지 않지만 저는 6월 30일 광화문과 시청거리를 12시가 다 된 시간까지 돌아다녔는데, 바로 어제까지 거리점거의 신호였던 ‘흰장갑(누군지는 모르지만 6월 한 달 거리에 나가 서성이다 흰장갑을 낀 사람이 선창을 하면 도로로 튀어 들어가 도로를 점거했습니다)’과 ‘호루라기’, 그리고 군중들의 “호헌철폐! 독재타도!” 박수 소리가 사라진 것입니다.
너무도 허무하게 막을 내렸던 6월이지만, 그때 우리는 이웃의 손을 맞잡았고, 치약을 나눠 바르며, 수업을 중단하고, 전투경찰에 밀리기도 하고 밀기도 하면서, 전투경찰을 둘러싸고 방패를 내리게 하며 함께 울었고 웃으면서서 ‘6월 항쟁’을 만들었습니다.

이후 ‘6월 항쟁’은 한국사회 시민의식의 향상과 민주적 권리를 찾기 위한 반석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기억하는 것은 그 투쟁의 거리에서 불린 6월의 노래 ‘동지가’입니다. 광주를 피로 진압하고 집권한 전두환 정권의 권력이 서슬 퍼렇던 시절에 만들어진 노래이다 보니 이 노래를 누가 만들었는지에 대한 기록은 현재까지도 작가가 밝혀지지 않아 창작자를 찾을 수 없습니다만 이 노래가 박종철의 죽음으로부터 떨쳐 일어선 젊은 대학생들이 각자 일신의 영달을 벗어던지고, 도서관을 박차고, 강의실을 박차고 서울의 명동거리며, 서울역, 광화문 등 거리 곳곳에서 투쟁을 열고 정리하는 진군의 노래였음을 기억하며 6월의 노래로 정해보았습니다.
''''동지가'''' 지은이에 대한 에피소드는 다양합니다. 우연한 기회에 나주신문사 박00 기자가 자신이 ‘동지가’를 만들었다고 주장하는 2007년 3월의 인터넷 기사를 보면서, 박00기자가 ‘동지가’를 만들었나 싶어 광주전남지역에서 노래운동을 하고 있는 사람들의 조언을 들어보기도 했습니다.
80년대부터 지역에서 노래운동을 하고 있는 정세현(범능스님)의 말을 빌면 ''''동지가''''는 전남대에 다니던 학생이 감옥에 들어가기 전 우연히 부른 노래가 채보되어 남은 것이라는 이야기도 있고, 민중가수 박종화님의 말처럼 이전부터 ‘동지가’를 만들어 불렀다는 이야기도 있습니다.
그러나 이런 주장들은 증명하기 어렸고, 나주신문사 박00 기자가 지은이라는 주장은 학생운동시절 박00 기자가 감옥에 가지 않은 점과 지금 시점에서 자신이 창작자임을 밝히는 것도 의심스러워 신빙성이 높지 않은 것으로 판단됩니다. 그저 ‘동지가’에 얽힌 에피소드중 하나로 남길 수 밖에 없습니다.
2002년 12월 대통령에 당선된 날부터 2008년 2월 25일까지 대통령직을 마치고 고향인 김해로 떠나는 노무현의 당선과 이임의 공간에 ‘동지가’가 불렸다고 하는데.... 아! 상황이 이렇다 보니 ‘동지가’를 만들었다고 주장하는 이들의 목소리도 나오는거구나 싶고, 이것도 다 역사의 아이러니구나라는 생각을 하며 혼자 실소를 한 적도 있습니다.
그러나 87년 여름의 그 뜨거웠던 거리를 달군 ‘동지가’ 그리고 그 당시 상황을 회상하며 지금 거리 곳곳에서 외쳐지는 ‘미친 소 너나 먹어!’의 외침과 ‘비정규직 철폐의 외침’ ‘공기업 민영화와 구조조정 저지’의 외침이 시대와 공간을 넘어 6월의 거리에 폭풍처럼 물결치길 바라는 마음은 그 시절의 마음과 다르지 않겠구나 싶어 6월의 노래로 ‘동지가’를 불러봅니다.
글 : 발기인 최도은 동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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