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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93년 근로자파견법 저지와 고용보장 투쟁
첨부파일 -- 작성일 1993-01-01 조회 182

1993년 근로자파견법 저지와 고용보장 투쟁


1993년 고용보장 투쟁의 개요

전노협의 1993년 고용보장 투쟁의 주요 사업 방향은 투쟁 주체를 구성하고 투쟁을 대중적으로 확산하는 것이었다. 단위노조에 고용대책위원회를 구성하고 현장 일상활동으로 정착시켜 나가 고용불안 없는 일터와 고용보장 제도의 확보를 위한 대중운동을 활성화하기 위한 투쟁을 벌여나가며, 단위노조의 고용투쟁 지원 강화를 주요 사업으로 설정했다. 이를 위해 고용보장을 위한 전국·지역·업종 간의 공동 단체협약 요구안을 마련해 정부와 자본의 고용정책에 대한 정책적 대응 강화와 제도개선 투쟁의 토대를 구축하기 위한 사업을 진행했다.

주요 사업으로 전국적인 서명운동, 캠페인 등 대중투쟁을 비롯해 불법용역 철폐 및 근로자파견법 도입 저지를 위한 총력 대응과 고용보험제 등 고용 관련 제도의 도입에 대한 대응투쟁에 집중하고 부도, 폐업 등 고용불안 사업장에 대한 공동대응 조직 등 일상활동 강화에 주력했다.

 

실업률 증가와 불완전 고용 형태의 확산

1990년 들어 한국경제의 안정성장(저성장)에 따라 노동력 흡수가 둔화되고 산업구조조정 과정에서 대량 고용조정 정책이 추진돼 실업률은 지속적인 증가 추세로 나타났다. 1991~1992년에는 각각 2.3%, 2.5%였던 실업률이 19931/4분기에는 3.2%로 높아졌다.

또 중소기업 3D업종의 작업환경 개선과 시설투자가 적고 중소기업과 대기업 간의 노동조건 격차가 심해 취업을 기피하는 현상이 두드러져 인력 수급의 불균형과 중소기업의 인력난이 가중됐다. 그러나 이러한 인력 수급의 불균형은 직업안전망이나 직업훈련기관에 대한 정부의 대책이 없어 여전히 해소되지 못하고 있었다. 특히 능력개발, 재훈련 대책 없이 일방적으로 진행된 대량감원과 산업합리화 정책은 중소기업의 인력난을 가중시켰다.

이러한 불완전 고용의 증가와 함께 기존의 저임금·저기술 형태의 노동시장 구조가 고임금·고기술 형태로 급속하게 변함에 따라 불완전 고용형태가 확산됐다. 시간제 등 임시직, 계약직, 촉탁, 사외공, 하도급 등이 확산됐고 특히 용역, 파견근로, 하도급 등의 노동자 공급형 고용형태가 급속도로 퍼졌다. 1993년 하반기 이후 대우기전, 한라중공업노조의 용역고발, 대우자동차, 삼성제약의 용역문제, 시설관리 용역회사에 관한 국정감사가 진행되는 등 불법용역을 둘러싼 문제가 표면화되기 시작했다.

고용형태의 변화 중 하나는 업종 간 비율의 불균형으로 제조업 취업자가 지속해 감소한 반면 서비스업 종사자는 계속 증가했다. 199311월 현재, 전체 광공업 종사자는 2,849,000명으로 1992년 대비 4.5% 감소한 반면 서비스업 종사자의 비율은 19931/4분기 61.8%로 광공업 25.4%에 비해 훨씬 높게 나타났다.

1992년에는 사상 최대인 10,769개 업체에 이어 1993년에도 중소기업 1만여 개 업체의 부도 사태가 계속됐다. 1992년에는 산업구조조정 과정에서 한계 기업들이 정리되면서 불가피한 측면이 있으나 1993년에는 많은 사업장에서 고의적인 부도사태가 벌어졌다. 1993년 부도가 난 사업장 중 남일금속, 에이스제과, 아신, 공성통신, 국제전광, 슈어프로덕츠, 한양공영, 원진레이온, 유원기업 등은 전노협 가입 사업장들이어서 민주노조 진영이 적극적으로 대응했다.

부도·폐업과 함께 경영합리화에 따른 고용불안도 확대됐다. 공장자동화, 감량경영에 따른 대규모 집단감원(풍산금속, 세일중공업, 한국일보 등), 고용문제와 관련된 노조탄압(동양에레베이터, 남선물산 등), 라인축소(현대정공 등), 합병(현대중공업과 현대중전기, 현대중장비, 현대철탑, 현대로보트, 대우조선과 대우중공업 등), 분할이전(현대종합목재, 현대강판, 한국프랜지 등) 등으로 고용불안이 더욱 심각해졌다. 이 외에도 UR협상 및 개방화에 따른 쌀과 기초농산물 개방 등 정부의 실질적인 농업 포기 전략으로 급격한 추가 이농이 발생하고, 경쟁력이 취약한 부문의 고용불안 요인도 많아져 갔다.

정부는 대량으로 고용을 조정하고 탄력적인 고용을 확대하는 지원책으로 고용보험법, 고용정책기본법, 직업안정법, 직업훈련기본법, 기능대학법 등을 제정 또는 개정하는 등 노동시장 정책을 대대적으로 정비해 나갔다. 이와 함께 근로자파견법을 도입하려 했으며, 남녀고용평등법의 시행, 의무고용기준 및 산업안전 관련 의무고용비율의 완화를 골자로 하는 행정규제 완화정책을 추진했다. 그러나 이러한 정부정책은 또 다른 고용조건의 하락으로 노동자들의 불안은 커져만 갔다.

한국에는 1980년대 중반 이후 파견근로라는 새로운 형태의 고용이 도입됐다. 이러한 형태로 고용되는 노동자가 증가하는 원인을 노동력의 탄력적 이용, 특히 전문기술 인력의 탄력적 이용, 늘어나는 여성 인력의 활용 등으로 설명하지만 이는 근로자파견업이 합법화되었을 때 일어날 문제점을 은폐하려는 시도일 뿐이다. 한국은 노동비용을 절감하고 노동조합의 조직력과 교섭력을 약화하려는 목적에서 파견근로제가 도입되기 시작했다. 특히 증권·보험업의 경우 1987년 이후 노동운동이 활성화되는 시기에 파견노동자들이 본격적으로 도입되기 시작했으며, 이는 실제로 노동자들의 교섭력을 무력화하는 결과를 가져왔다.

 

고용문제에 관한 다양한 활동

전노협은 1992년 말부터 고용정책 연구팀 4개 분과를 구성하여 자동화, 경영합리화, 임시적 고용형태, 법제도적 대안 등에 관한 연구활동을 했다. 327무권리, 이중착취, 용역노동의 실태와 대응에 관한 공청회를 시설노협, 사무금융노련, 한국여성단체연합과 공동으로 개최했다.

이 외에도 2기 고용보장을 위한 간부수련회(424~25)를 열며 고용문제 자료집을 제작했고 512일 해고규제법(), 고용보험법의 도입 방향에 관한 연구 및 청원을 실시했다. 하반기 노동법 개정을 앞둔 729일에는 파견법 관련 연구자료 근로자파견법은 철회되어야 한다와 고용관련 3개 법률()을 비교·검토한 자료, 고용 관련 법률 수정안에 대한 검토 자료를 배포했다. 9월 말부터는 불법근로자 공급사업에 관한 실태 파악을 위한 설문조사를 실시해 기초자료로 활용했다.

전국노동조합 고용특별대책위원회(고용특위)’에서는 교육을 통해 간부들에게는 고용보장을 위한 단체협약 및 제도개선 투쟁의 방향을 공유하고 현장 일상활동에 필요한 고용 관련 실무능력을 배양한다는 목표를 세웠다. 또 고용문제가 발생한 노조 간의 공동대응을 위해 단위노조에서 할 수 있는 실천방향을 모색하고 상호교류를 강화한다는 목표도 세웠다. 고용문제가 발생한 사업장의 조합원들에게는 노조 중심으로 조직적인 대안을 마련해 투쟁하는 것이 해결 방안임을 여러 사례를 통해 알렸다.

전노협 고용특위는 조합원들이 느끼지 못하고 있는 고용문제를 새롭게 환기하기 위한 선전활동을 벌였다. 교육용 비디오 고용안정 믿고 계십니까?’와 근로자파견법에 관한 선전 자료집 그것이 알고 싶다를 제작·배포했다.

전노협 고용특위는 19921127일부터 1993512일까지 6차례의 회의를 진행했고 이어 전노대에서 827일부터 1111일까지 4차례 고용특위 회의를 진행했다. 중앙 고용대책반 아래 부천, 마창, 인천지역도 고용보장 투쟁 주체로 고용문제 대책위를 구성해 활동했다.

전노협 고용특위는 전국노동운동단체협의회, 민중정치연합, 전국노동단체연합 및 여성운동 단체와 협력사업도 활발하게 벌였다. ‘고용불안 없는 일터와 고용보장 제도 확보를 위한 범국민서명운동을 전국적으로 전개했으며 전단을 1만 부 제작해 캠페인과 선전전을 통해 배포했다. 3월에는 용역노동의 실태와 대응에 관한 공청회를 전국노동운동단체협의회, 여성노동자회, 민중정치연합, 전국노동운동단체연합, 수도권 단체연석회의 등과 함께 공동 개최했으며 9월에는 시설노협, 사무금융노련, 한국여성단체연합과 공동으로 근로자파견법에 대한 대자보를 제작·배포했다. 그 외에도 여성민우회, 여성노동자회, ‘민주화를 위한 변호사 모임’(민변), 한국노동교육협회 등과 불법노동자 공급사업 고발사업을 전개했고 민변 변호사들이 고발대리인으로 고발장 작성 및 법리 검토에 결합하기도 했다.

 

1993년 고용보장 투쟁의 전개

경기불황과 매출부진, 조업단축으로 수많은 직장에서 고용불안이 야기되고 있으나 정부와 기업은 적극적인 투자를 통한 고용 창출로 고용보장을 확보하기보다는 감원, 라인축소, 정리해고, 자연감원 후 미충원 등으로 해결하려 했다. 고용보장의 전망은 어두워지고 노동강도 강화로 노동자의 생존권은 더욱 악화됐다. 이에 따라 전국노동조합 고용특위는 경제의 민주적 개혁과 고용보장을 위한 범국민 서명운동을 추진해 전국적 공감대를 확대하고, 4월 말로 예정된 임시국회를 시작으로 청원을 포함한 본격적인 제도개선 투쟁에 나서기로 했다.

전노협 고용특위는 19921212일 동국대에서 800여 명이 참여한 가운데 수도권 고용안정 결의대회와 함께 30만 서명운동본부 발대식을 진행했다. 각계각층 인사들과 노동조합 대표자 1,000인 서명과 조합원·국민 30만인 서명을 목표로 전국적인 서명운동에 들어갔다.

서명운동은 전국노동조합 고용특위, 고용대책회의(전국노동단체연합, 전국노동운동단체협의회, 민중회의, 진보정당추진위원회, 사회당건설추진위원회), 한국여성노동자회, 수도권노동단체연석회의, 가톨릭노동사목 전국협의회, 전국연합의 주관으로 진행했다.

115일 전노협 사무실에서 열린 고용보장 제도 확보를 위한 서명운동 및 전국 고용투쟁 현황 설명회를 시작으로 서울, 경기, 부천, 인천, 성남, 마창, 부산, 울산, 거제, 포항 등 각 지역의 사업장 내 서명은 물론 서울, 경기, 부천, 마창지역에서 4차에 걸쳐 가두서명을 전개했다. 그 결과 512일까지 전국 각지에서 10만여 명이 서명, 이 중 국회에 제출된 서명자 수는 63,000명이었고 각계각층의 700여 인사들이 대표자 서명에 동참했다. 이러한 성과를 모아 512일 대국회 촉구투쟁을 전개하고, 서명 결과를 국회 노동위원회에 제출했다.

220일 고려대에서 1,000여 명이 참여한 가운데 동양에레베이터노조 지원과 고용안정 쟁취를 위한 집회를 개최했고, 512일에는 총 400여 명의 대표자가 고용보장 청원 및 촉구투쟁을 벌였다. 이 집회에서는 국회에 서명 전달 및 청원, 고용보험제와 경제적·기술적 이유로 인한 집단해고 규제 특별법 제정을 촉구했다. 아폴로산업, 남일금속, 국제전광 등을 비롯한 당면 현안에 대한 해결 촉구 공개질의서와 고용보장 제도 확보 및 경제의 민주적 개혁을 촉구하는 각계각층 대표자 연명 성명서도 발표했다. 단위노조에서는 고용안정을 위한 제도개선 요구 내용 대자보를 부착하는 한편 단체협약 위반, 불법 부당한 사례 집단고발장을 조합원 연명으로 작성하고 고용불안 및 일방적인 감원 하청분할, 자동화 등에 대한 시정을 촉구하는 편지 보내기 운동을 전개했다.

1993년 하반기 고용보장 투쟁은 근로자파견법 도입 저지투쟁을 중심으로 진행했다. 특히 노동법개정이 유보된 이후부터는 파견법 문제가 노동법개정 투쟁의 핵심적 과제로 부각함에 따라 전노대 차원의 집중투쟁을 전개했다. 923일 국회 앞 근로자파견법과 공공자금관리기금법 도입 반대 집회에서는 원진레이온, 공성통신 등 투쟁사업장 조합원을 비롯하여 각 지역에서 300여 명이 참여해 어깨띠, 피켓, 현수막 등을 앞세우고 영등포역에서부터 여의도 국회의사당 앞까지 행진했다.

1021일 노동부 국정감사 시기에 과천 종합청사 앞 항의 피켓시위에는 불법용역 관련 노조대표를 포함, 수도권 노조대표자를 중심으로 200여 명이 참여했으며 원진레이온, 전해투의 항의방문 투쟁도 이어졌다. 이러한 흐름에 따라 1031일 전국노동자대회도 근로자파견법 저지를 핵심적인 과제로 제기하고 이후 집중적인 투쟁을 천명했다.

11월에는 노동법개정, 파견법 및 공공자금관리기금법 철회 촉구 서명운동을 시작하고 청와대에 엽서보내기 운동(3만 장 배포) 등을 추진했다. 이와 함께 1113~14일 양일 동안 노동법 개정, 파견법 도입 저지를 위한 지역별 동시다발 집회를 했으며, 대부분 집회를 가진 후 전국연합 차원의 국민대회와 결합했다.

이후 김영삼 정권이 일방적으로 쌀개방을 약속함에 따라 쌀개방 문제와 파견법 문제를 결합한 전노대 대표자 철야농성이 126일에서 9일까지 전개되었으며, 특히 이 과정에서 9~10일 양일 동안 지역별로 단위노조 차원에서 쌀개방 규탄, 파견법 저지를 위한 중식집회를 개최했다. 이러한 집중투쟁은 1210300여 명의 노조대표자가 참여한 국회 앞 쌀개방 규탄 및 근로자파견법 철회를 위한 전국 노조대표자 결의대회를 끝으로 마무리됐다.

 

단위노조 고용보장투쟁 지원 연대


동양에레베이터노동조합 고용안정 쟁취투쟁

부천에 있는 동양에레베이터(조합원 700)1987812일 노동자대투쟁 과정에서 12일간의 파업투쟁을 거쳐 노동조합을 결성한 이후 8차에 걸친 파업투쟁을 통해 조직력을 강화해왔다. 동양에레베이터노조의 고용보장 투쟁은 회사측의 일방적인 단체협약 파기에 맞선 노조탄압 분쇄 투쟁으로 시작됐다.

1991년 수주물량의 증가로 노사 양측은 자동화공장 건설을 합의했다. 그러나 회사는 별도 법인체 설립을 추진하면서 노조 승계(동양에레베이터노조 가입)와 동양중공업으로 이동할 경우의 조합원 자격 유지에 관한 구두 합의를 전면 부인했다. 이에 대해 노조는 고용안정 쟁취투쟁을 벌이는 한편 회사측의 도발에 단호하게 대응했다. 회사는 건설 경기가 안정되면서 엘리베이터 수요가 하락했다는 이유로 경영축소 계획을 입안하고 보수·공사부의 하청 이전과 감원을 추진하면서 문제는 전면화됐다. 시화공장에 대한 합의사항을 파기하면서 다양한 탄압을 가했고, 노조는 이에 맞서 태업을 시작으로 조합원을 조직하며 단결을 공고히하는 한편 사무직 조직화로 회사측을 압박해 들어갔다.

회사는 19926월 임금인상 투쟁 종료 후 노사협의회에서 동양중공업 종업원의 노조 가입 합의 후 8월부터 사측의 조직체계를 개편하고 노무부를 신설해 노무관리를 강화했다. 10월부터 동양중공업에 대한 합의사항 파기, 위원장 고소(관리직과의 사소한 마찰), 노조간부 활동시간 불허(단체협약 제83조 위반), 조합원 일방적 부서이동, 조합원 교육시간 불허, 월급직 조합원 임금체불, 의도적인 잔업 폐지, 일급직 조합원에 대한 상여금 체불 등으로 노조를 무력화하려 했다. 이후 11월에는 10월 임금체불, 조합비 일괄공제 거부, 전임자 급여지급 중단, 간부수당 지급정지 통보, 노조임원 4명과 전 임원 2명 업무방해로 고소, 노조간부 23명 업무방해로 고소하는 등 집중적인 탄압을 가해왔으며, 안기부 직원을 불러 노조파괴를 위한 관리직 교육까지 했다. 12월에는 위원장 해고에 따른 노조 대표 불인정 통보, 무단결근 및 근무지 이탈, 고의적 회사업무 방해를 이유로 인사위원회 회부 대상자 통보(노조간부 30), 쟁의국장·대의원·사무국장 등 3명 일방해고, 노조 간부 26명 집단해고, 2명 경고, 조합원 120명 부서이동 등을 단행했다.

이에 대항하여 노조는 임금체불에 대해 임시노사협의회를 요구하면서 간부 철야 대책회의에 돌입하는 한편, 임시총회를 열어 조합원 97%의 찬성으로 쟁의발생을 결의했다. 또 사무전문직 조합가입 보장에 대한 규약을 변경했고, 태업에 대한 무노동무임금 적용에 반대해 조합원 체불임금 수령을 거부했다. 조합원 가족들로 구성된 가족실천협의회에서는 일일주점을 열어 파업기금 마련에 앞장섰고 각종 집회, 본사 농성 참여 등 모범적인 투쟁을 함께 했다.

12월 중순부터 회사가 대부분 물량을 하청으로 빼돌려 실제 작업이 중단되기에 이르렀다. 이에 노조는 태업 중심 투쟁에서 전면적인 파업농성으로 전환해 맞서 나갔다. 이 과정에서 전국적 연대투쟁과 공동대응이 모색되었으며 쌀 모으기, 지지방문, 집회, 촉구방문, 고용보장제도 확보를 위한 가두서명이 이루어졌다.

노조가 전면파업으로 대응하자 회사는 중식 제공을 거부하고 통근버스 운행을 중단했으며, 파업이 장기화되면서 노조 분열공작을 본격화했다. 한편으로는 직장폐쇄 공고문을 붙여 조합원들을 위축시켰고 다른 한편으로는 평소 노조와 파업에 소극적이었던 사람들에게 파업불참 시 임금 지급을 미끼로 이탈시켰다. 특히 위원장의 교섭대표권을 인정하지 않고 이를 빌미로 교섭을 계속 결렬시켜 노조를 분열시키려 했다.

노조는 즉각 쟁의신고를 내고 본격적으로 광화문 본사 항의방문, 여의도 민주당 항의방문, 부천시장 면담 요구와 시청항의 방문, 시민 홍보전, 점거농성(100) 등에 나셨다. 이와 함께 전열을 가다듬기 위해 총회를 열어 부당해고에 따른 노조집행부 불인정에 대해 신임투표를 실시해 96.3%의 찬성을 얻었다. 부천 시민회관에서 개최한 고용안정과 1993 임금인상 투쟁준비를 위한 노동자대회에는 2백여 명이 참석해 내부단결을 공고히 하고 사회여론도 환기해 상황을 반전시킬 수 있었다. 한편 하도급 비리 홍보전을 적극적으로 전개헤 여론을 조성해 나갔다. 조합원 이탈 공작에 대해서는 사전에 정보를 입수해 전체 조합원들을 대상으로 사측의 의도를 폭로하며 사태를 수습했다. 아울러 사측의 분열 공작을 완전히 저지하기 위해 지도부가 조합원들에 대한 임금지급과 쟁의기금 마련을 위해 집 담보융자, 보험해약 등을 통해 7억 원의 기금을 마련하겠다고 결의하고 하고 투쟁기금을 확보해 갔다.

6개월에 걸친 투쟁은 1993415일 조합원 총회에서 90%의 찬성으로 합의안이 통과됨으로써 마무리됐다. 전노협은 2차 고용특위에서 동양 등 고용투쟁 사업장 지원대책(기금, 광고)을 결의한 이래 고용보장제도 확보를 위한 서명운동과 전국 고용투쟁 현황 설명회를 시작으로 2~3월에 동양에레베이터노동조합 고용보장 투쟁에 대한 집중적인 연대활동을 전개했다. 전노협은 30차 중앙위원회에서 동양에레베이터 투쟁에 쌀 보내기 운동을 결의했다. 그 결과 서울, 경기, 부천, 인천, 울산 등지에서 지원지지방문 40여 회, 쌀보내기 15가마, 300여만 원의 모금 등이 이루어졌다. 이러한 연대활동은 고용투쟁 4사 노조간담회(25, 동양에레베이터, 풍산금속, 세일중공업, 남일금속노조), 전국 고용 관련 투쟁사업장 대표자 간담회(220), 동양에레베이터 투쟁 승리와 고용안정 쟁취를 위한 노동자 결의대회(220), 고용보장을 촉구하기 위한 청와대 방문 투쟁(33)을 거쳐 더욱 활성화되었다. 동양 조합원 500여 명을 비롯한 1,000여 명이 참여한 220일 고려대 집회는 1993년에 진행된 처음이자 마지막인 대중집회 방식의 고용보장 투쟁이었다. 이후 정치적 쟁점화를 위한 촉구방문, 항의방문 등의 방식으로 투쟁을 전개했다.

 

남일금속 부도와 노동자들의 정상화 노력

남일금속은 1976년부터 수출에 총력 매진해 왔고 기술개발에도 주력해서 유럽 수출에 획기적인 전기를 마련했다. 국내 최초로 3중 바닥 접합방식에 대한 발명 특허를 따내 냄비 생산으로 연간 매출 3천만 불이 넘는 회사로 발전했다. 그러나 1992년 말 일시적인 자금운영이 어려워져 19921228일 부도가 발생했다. 남일금속의 부도는 수출 중심의 중소기업이 안고 있는 여러 문제가 복합적으로 작용한 것으로 직접적인 원인은 자금압박에 따른 운용자금의 정지 때문이었다. 그러나 무엇보다 정부 차원의 중소기업에 대한 정책지원 부실과 이에 따른 중소기업 재정 압박이 근본적인 원인이었다. 유망 수출업체임에도 기술개발, 자금지원이 전무해 재정상태가 취약해졌기 때문이다.

부도 발생의 주요 원인이 일시적인 자금난이었기 때문에 일정 기간 운영자금만 확보된다면 정상가동이 가능하다는 전망이 있었다. 따라서 경영난 조짐이 보이자 현장 노동자를 중심으로 위기를 극복하기 위한 자발적인 노력이 시작됐다. 노동자들은 정상조업하면서 품질, 생산성 향상운동, 원가절감운동, 노동조합의 단체협상 및 임금협상의 유보, 상여금 지급 시기의 유동성 인정 등의 노력을 기울였다. 부도 발생 직후 전체 노동자 공청회를 열어 회사를 정상화하기로 결의하고 노사공동의 비상대책위원회를 구성했다. 노조는 공장 정상화를 위한 정책적 요구로 법원에 법정관리 신청 서류를 접수했으며 비상대책위원회는 조직관리, 조사, 재정, 대외활동 등의 분과로 나눠 활동하면서 완제품 판매로 기금을 마련해 가면서 문제 해결을 위한 여론 형성에 힘을 기울였다.

226일에는 남일금속의 현황을 공유하고 대책을 마련하기 위한 지역간담회를 열었다. 간담회에는 10여 개의 지역단체가 참석하였는데 회사 정상화를 위해 안간힘을 쓰는 남일 조합원들의 힘겨운 투쟁과 날로 심각해지는 고용문제에 대해 지역 차원에서의 대응이 필요함을 확인했다. 또 인천지역의 121개 노조는 남일금속 등 최근의 부도 사태와 이에 따른 고용위기의 해소를 촉구하는 공동성명서를 통해 정부 차원의 중소기업에 대한 정책지원이 부실함을 지적하며 고용안정법 등의 법·제도적 대안을 세우라고 요구했다. 그러나 다양한 대책과 노력에도 남일금속은 끝내 폐업했다.

 

세일중공업 희망퇴사자 모집에 대한 투쟁

세일중공업은 19927월부터 계속 생산직 사원들에 대한 휴가를 실시해 왔다. 1992년 말부터는 현장에 대량감원설이 떠돌기 시작했고 회사는 불법으로 희망 퇴사자를 모집하기 시작했다.

이에 노조는 희망 퇴사자 모집에 대한 전 조합원 설문조사를 실시하고 간부 전체가 회사측의 강제감원 저지 철야농성을 벌였다. 노조는 강제감원 및 고용안정 쟁취 투쟁위원회를 구성해 정리해고와 노조 와해공작에 맞선 투쟁을 전개했다. 회사는 111일 정리해고 대상자 중 퇴사하지 않은 81명에 대해 정리해고를 단행했고 현장에서는 관리자들이 노조 탈퇴 공작을 벌여 조합원들의 불안 심리를 가중했으며 노조 방문자에 대한 정문 봉쇄와 시비를 일삼고 있었다. 회사는 3차례에 걸쳐 전노협 마창노련 탈퇴만이 고용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는 내용의 유인물을 배포해 책임을 노조에 전가하는 한편, 이를 통해 노노갈등을 유발하려는 탄압책동을 벌였다.

노조는 민주노조 파괴 책동에 맞서 굽힘 없이 싸워나가기로 결의하고 조직을 정비했으며 318일에는 현장 내에서 일어나고 있는 현안문제에 대해 전체 대의원 토론회를 개최했다. 이후 황선엽 직무대행을 비롯한 19명의 노조 간부들은 주주총회가 열리는 서울에서 고용문제에 무능한 경영진 퇴진과 고용안정 보장을 요구하는 상경투쟁을 전개했다.

고용문제에서 시작된 세일중공업의 투쟁은 회사가 노조의 대표권을 인정하지 않아 이 문제가 해고자 복직문제와 함께 노사 간의 최대 쟁점으로 부각됐다. 회사는 징계권을 회사에 양도하면 노조의 대표권을 인정하겠다고 압력을 가했다. 노조는 420일 사장과의 면담이 성과 없이 끝나자 21일부터 회사 본관 앞에서 황선엽 직무대행과 총무부장이 단식농성에 돌입했고 서울 본사 앞에서는 반금규 부위원장 등 4명이 천막농성을 벌였다. 해고노동자들이 투쟁을 적극 지지하면서 단식농성에 결합했다.

세일중공업의 노조 대표권 인정투쟁은 430일 회사와 노조 대표권 인정과 노동조합 및 상근자 임금공탁 해제하고 지급, 정당한 조합활동 보장 등에 합의하면서 마무리됐다. 고용문제와 관련해회사는 더 이상의 감원은 없을 것이라는 입장을 밝혔다.

 

현대정공 울산공장 퇴직 강요에 대한 투쟁

1992년 말부터 노조는 향후 C/T생산부(컨테이너) 축소가 예상됨에 따라 고용문제 발생에 대비, 공청회와 단체협약 설명회를 통해 고용문제의 심각성을 알리고 대책을 세워야 함을 교육했다. 노사협의회 본회의에서 1993년 상반기 생산 및 인원운영 계획을 보고하라고 요청했으나 회사는 이를 얼버무리면서 회의를 종결해버리고 현장에 14일부터 C/T 생산부 정취근무 계획을 통보했다. 이에 따라 노조는 15일부터 8일까지 향후 대책 마련을 위한 조합원 보고대회와 분임토의로 여론을 수렴하고 조직을 정비했다. 119일부터 출퇴근 시 정문투쟁과 중식시간에 조합원 규탄대회를 진행했으며 상임집행간부 철야농성을 전개했다.

회사는 전출 대상자를 일방적으로 선별 면담하는가 하면 일부 부서에서는 부서장들이 조합원들에게 퇴직을 강요했다. 노조가 항의하자 회사는 감원계획은 없고 남는 인원은 전출하겠다고 약속했으나 퇴직 강요는 계속됐다. 120일 임시 노사협의회에서 회사는 컨테이너 인원 104여 명을 차량, 변속기, 냉동C/T 등에 전환 배치하겠다고 통보했고 21C/T생산부 150명을 차량으로 전출시켰다.

이에 노조는 24일부터 16일까지 고용문제에 대한 조합원 교육을 하고 부서별 보고대회, 간담회 등을 개최했으며 정문투쟁, 보고대회, 규탄대회 등을 열어 사측의 퇴직 강요에 단호히 대응했다. 그럼에도 회사의 퇴직 강요는 계속됐고 조합원들이 동요하자 노조는 215일 긴급대의원대회를 열어 쟁의발생을 결의했다. 그러자 회사측은 노사대표자회의를 통해 감원을 하지 않겠다는 약속을 해 노조는 쟁의발생 신고를 유보했다. 이후 회사가 80여 명의 희망 퇴사자를 모집하겠다는 운영계획을 내놓자 노조는 전면적인 투쟁을 선언해 결국 회사의 항복을 받아냈다. 그러나 고용문제가 발생한 지 2개월 만에 100여 명이 넘는 조합원이 회사를 떠났다.

현대정공의 투쟁은 회사측의 퇴직 강요에 대해 노동조합 중심으로 뭉쳐 강력한 투쟁을 전개하는 것만이 고용문제 해결의 유일한 대책이라는 것을 다시 한번 확인시켜주었다.

 

고용보장투쟁 사업장에 대한 전노협의 지원

고용특위는 고용문제가 발생한 동양, 남일, 세일, 풍산, 현대정공노조와 간담회를 열어 연대투쟁 방안을 모색했다. 25일 전국고용특위 및 5개 사업장간의 1차 간담회, 220일 전국고용특위 및 5개 사업장 간 2차 간담회가 열렸다. 전노협의 지원으로 연대성명서를 제작해 해당 사업장이 가두에서 홍보했고, 4사가 중심이 되어 연대투쟁을 전개하며 정부에 탄원서 제출, 기자회견, 청와대, 국회 항의방문을 대중적으로 전개했다. 인천지역에서는 남일금속 고용문제에 대한 설명회를 열었고, 마창과 울산지역에서는 고용사업장 간 체육대회를 개최하는 등 활발한 연대지원 활동을 벌였다.

고용사업장 간담회와 228일 전노협 중앙위원회에서 청와대 탄원투쟁을 보다 대중적으로 추진할 것을 결의했다. 세일중공업, 풍산금속, 동양에레베이터, 남일금속, 현대정공 등 고용문제가 발생한 노동조합들과 고용특위가 당면 고용문제에 대해 적극적인 공동대응에 나서기로 하고 우선 청와대 탄원투쟁을 추진했다. 이 투쟁에는 서울, 경기, 부천, 인천, 울산, 포항, 마창지역 등 7개 지역에서 세일중공업, 울산현대정공, 풍산금속, 동양에레베이터, 나우정밀, 현대중공업, 서울지역인쇄노조, 중원전자, 싸니전기 등 15개 노조 간부 80여 명이 참가했으며, 청와대 면담 과정에서는 고용보험제 실시와 정리해고 규제를 촉구했다. 동양, 세일, 풍산 등의 집단감원 문제에 대한 적극적 해결을 촉구하는 탄원서도 제출했다. 이후 318일 과천 종합청사 내 노동부 사무실에서 진행한 고용특위와 노동부 고용 관련 부서 간 간담회에서 세일, 풍산, 동양 문제와 불법용역 문제에 대한 시정을 촉구했다.

 

1993년 고용안정 쟁취투쟁의 성과

1993년 한 해 동안 전국적인 차원에서 일방적인 고용 관련 법·제도 도입 저지와 사회보장 차원의 고용보장제도 쟁취가 핵심적인 과제로 제기됐다. 동시에 단위노조 차원에서는 집단감원, 합병, 분할, 라인축소, 공장이전, 용역, 임시직, 소사장제, 시간제 등 탄력적 고용형태의 도입, 중소기업의 부도사태 등 기업측의 일방적인 경영합리화에 따른 광범위한 고용불안 문제를 해소해 나가야만 했다. 그럼에도 주체적인 준비는 매우 취약한 상황이었다.

상반기의 서명운동은 목표에 크게 미달했으나 제도개선 투쟁을 본격적으로 전개할 수 있는 토대를 마련했다는 의미에서 상당한 성과가 있었으며 고용문제에 대한 주체적 대응을 활성화함과 동시에 하반기 근로자파견법 저지투쟁을 전개하는 실질적인 토대가 되었다. 이 과정에서 현대정공, 동양에레베이터노조 등이 모범적인 고용투쟁의 선례를 남겼으며, 특히 동양에레베이터노조의 고용안정 쟁취투쟁은 전국적인 연대투쟁과 제도개선 투쟁으로 발전했고 1993년 임금인상투쟁 분위기를 선도했다. 제도개선 투쟁의 모범적인 선례를 남긴 원진레이온의 직업병 문제 및 폐업대책 마련 투쟁은 재취업대책 마련에서도 승리하는 투쟁을 전개했으며 직업병 문제에 대한 제도개선 투쟁을 중심으로 각계각층의 공동대응이 활성화됐다.

그러나 연초부터 경영합리화와 집단감원, 부도, 폐업, 라인축소, 소사장제 등과 관련하여 많은 문제가 발생했고 노조별로 첨예한 투쟁을 전개했지만 대부분 개별단위의 고립된 투쟁에 머물렀다. 특히 전국적인 대중투쟁 전선의 형성을 위해서는 임단협 체결 과정에서부터 공동요구를 중심으로 공동투쟁을 모색해 나갈 필요가 있었으나 준비조차 이루어지지 못했다. 결국 제도개선 투쟁도 전국적인 대중투쟁 전선을 형성하는 방향보다는 상층간부 중심의 정책적 대응 위주로 전개됐다. 이러한 한계에도 1993년에 전개한 정책적 대응 투쟁은 일상적인 정책적 대응의 중요성과 가능성을 확인시켜주기도 했다.

노동법개정이 유보된 이후부터는 근로자파견법 문제가 핵심과제로 부각함에 따라 전노대 차원의 집중투쟁이 전개돼 지역별 동시다발 집회, 노조별 중식집회 등과 같은 현장투쟁으로 확산한 것은 중요한 발전이었다. 대국회 활동과 파견법 저지를 위한 사업의 성과로 법 제정이 1994년으로 연기된 것 역시 중요한 성과였다.

정부 정책과 관련해서는 근로자파견법 도입을 저지하는 데 역량을 집중하기로 하고 나머지 법·제도에 대해서는 고용보험법 및 해고규제법에 대한 청원 외에는 별다른 대응을 하지 못하였다. 본격적으로 구조적인 대량실업 및 고용불안정에 직면하는 상황에서 이에 대한 대응체계가 지역·업종단위별로 획기적으로 정비·개선돼야 했다. 그러나 고용특위의 활동이 안정적으로 정착되지 못했으며, 체계적이고 일관성 있는 사업보다는 당면 현안 대응 위주로 운영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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