식민지 시대 제주 3대 항일운동의 하나 - 무오 중문지역 항일운동
송시우(노동자역사 한내 제주위원회 운영위원)
「제주서 불무황제라 하고 부하 7백명을 거느리고 소요한 김련일(51)은 목포지청에서 결석 재판을 받고 징역 10년 뒤로 종적이 없었던 바 3월 중에 제주도로 돌아간 것을 체포하였다는데 이번에 목포분감에서 복죄하였더라.」(광주) (매일신보 1920년 4. 12. 3면)
제주도 중면 사계리 강창규라는 자는 자칭 불무황제 2백 대장 겸 치안황제 김연일이라는 자와 공모하고 선위선봉대장이라고 한 후 대정 8년 3월 6일 밤에 좌면 도순리에 있는 승려 수명과 부근의 주민 수십 명과 단결한 후 각리 구장에게 현지로 이번 옥황상제 성덕주인이 출세하여 조선 백성을 구할 터인 즉 동월 3일 오전 4시에 리 구민을 인솔하여 좌면 하원리에 집합하고 그러한 후 우리들은 먼저 관청으로 가서 관리를 체포한 후 독립을 계획할 터인데 만일 이 명령에 쫒지 아니하는 때에는 군법에 처하겠다는 격문을 보낸 후 그들의 일단은 총과 몽둥이를 휴대하고 각 곳으로 돌아다니며 장정군을 뽑아 4백 명의 대폭동단을 조직하여 내지인의 집과 동리 주재소에 침입하여 기구를 파괴하고 공문서와 건축물을 살라버리었는데 범임 김연일은 즉시 체포되었으나 강창규는 어디로 도망하였는바 4년 만에 작년 12월 28일 제주도 상효리 화전동에 잠복한 것을 동리 주재소 횡산무장과 김순사의 탐지한바 되어 이 즉시 체로되었다더라. (매일신보 1923. 2. 18.)」<근대제주불교사자료집. 제주불교사연구회. 2002>
「1910년 일제에 의해 나라는 망하고 당시 식자층이던 유림(儒林)들은 울분에 가득차서분놀르 느낄 뿐 어떠한 행동적인 저항은 없었다. 1918년 10월 5일 김연일(金蓮日:경북 연일)이 산남 도순리(道順里) 법정사(法井寺) 스님으로 있으면서 불교도, 선도교(仙道敎) 교도, 유생(儒生) 등 33명을 소집하여 일제에 저항할 것을 역설하였다.
특히 일본 관리와 일본 상인을 내쫓고 앞으로 불무황제(佛務皇帝)가 나타나 이상국가가 건설된다고 설교, 목적달성을 위해 의거 조직을 도대장(都大將) 이하 군직(軍職)으로 대오(隊伍)를 편성하였다. 각 마을 주민 4백여 명으로 중문경찰관 주재소를 점거, 경찰관과 일본인을 포박하고 주재소 건물을 박살내었다. 또 서귀포경찰관 주재소를 점거하기 위해 동진하던 의거인들은 서호리에 이르자 증파된 경찰관들에 의해 체포당하고 말았다.
이에 앞서 동년 9월 19일(음8. 15) 우란분재(盂蘭盆栽)에 즈음하여 김연일은 교도들에게 항시 항일사상을 고취, 조선을 병합하여 동포를 학대하고 있음을 역설하였다. 이제 국권은 회복될 것이며 그러기 위해 일본 관리를 죽이고 일본 상인들을 몰아내어야 한다고 보았다. 동년 10월 5일과 6일에 중문, 도순, 하원, 서호리 일대를 점거하여 인근 이장(里長)에게 격문을 배포, 군(軍)에 종사하도록 하고 전선을 전달하고 중문주재소를 공격하여 방화하고 경찰관과 상인들을 포박하기에 이르렀다. 이 일로 일경(日警)에 의해 김연일 등 66명이 검찰에 송치되었다.
그 중 48명이 기소되고 1919년 2월 4일 실형 31명, 재판 중 옥사 2명, 벌금형 15명, 불기소 18명으로 재판을 확정지었다. 이를 무오(戊午) 법정사 항일운동이라고 하는데 나라가 말하고 8년만에 제주인의 기개를 보여준 저항운동이었다. 일제는 이 저항을 외부로 번지는 것을 차단하기 위해 사교(邪敎) 집단이 주민을 현혹시켜 일으킨 사건으로 폄하시켜 알린 관계로 오래 묻혀 있다가 독립운동 사료 발굴에 노력하던 향토사가에 의해 1980년대에 그 운동의 정단한 평가를 받게 되었다.」<제주도지 제2권 제주도 2006>

<무오 항일운동 발상지>
「봉기의 지도부는 종이 깃발을 들고 봉기군을 지휘하여 제주도지청 서귀포지소로 진격하였다. 이들의 대부분은 호미, 낫, 괭이를 들고 있었지만 봉기군 중의 이춘삼(당시 63세)은 엽총을 소지하고 있기도 하였다. 이 사건에 접한 일본 경찰을 급히 출동하였다. 봉기군은 하원리에 이르렀을 때, 개신교의 윤식명 목사 일행을 발견하고 ‘이들을 돌로 매장하자’는 고함소리를 지르면서 윤식명 목사 일행을 무수히 구타하였다. 이 사건의 전말에 대하여 기독교 측에서는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다.
??1918년 음력 9월 2일(양 10월 6일) 윤식명 목사는 원용혁? 김진성? 김씨나홍? 천씨아나 등과 함께 전도하러 법환리에 가던 중이었다. 중문면 하원리 앞에 이르렀을 때 많은 군중들이 종이 깃발을 날리며 모여 있는 것을 보았다. 윤목사 일행은 처음에 그것이 누군가의 장례를 위한 모임일 것이라고 백여 보로 가까워졌을 때 저편 군중 속에서 방포(放砲)소리가 나더니 군중들은 돌로 매장하자는 고함소리를 지르면서 각기 몽둥이를 휘들며 일행을 무수히 구타하였다. 그 군중은 장례 모임이 아닌 태을교도들이었다.
태을교는 1914년 본도에 들어왔는데, 1918년 9월 3일(1일의 오기) 김연일이 중문면 법정사에 교도들을 집결시키고 당국의 보천교 탄압에 항거하고 일본인과 개화인을 배척하고, 장차 임할 보천교의 이상국가시대를 위한 시위를 모의한 후 폭동을 일으켰던 것인데 마침 윤식명 목사 일행을 만나자 이와 같은 난동을 벌인 것이다. 이 때 김진성 전도인은 간신히 도망하여 중문 천제연 물 속에 들어가 돌을 머리에 이어서 숨어 살아났고 김씨나홍 찬씨아나는 몽둥이로 때린 후 늙은 여인들을 죽일 가치가 없다하여 틈을 주었으므로 피신하여 살아났으나 윤식명 목사와 원용혁 전도인은 무수히 난타를 당하여 사경에 이르렀다. <제주선교 70년사. 1978>??
이 사건으로 윤식명 목사와 원용혁 전도사가 크게 부상을 입어 서귀포 소천의원으로 이송되기도 하였다. 이는 봉기군의 공격 대상이 단순히 일본인에게만 있었던 것이 아니라, 전통적인 신앙체계를 배격하고 있던 기독교나 천주교 혹은 서양인에게까지 미치고 있었음을 의미한다.
마침내 서귀포 서호리에서 봉기군과 경찰이 대치하였다. 이에 김연일은 박주석으로 하여금 상황을 맡기고, 그 자신은 봉기군 일부를 지휘하고 제주경찰서 중문주재소를 습격하였다. 봉기군들은 주재소장 요시하라(吉原)를 비롯한 일본 경찰 3명을 포박하는 한편, 주재소에 구금되어 있던 13명을 석방시키고 주재소를 파괴하였다. 이에 경찰은 급히 목포에 경찰의 증원을 요구하기에 이르렀다.
서호리에서 경찰과 대치하고 있던 박주석 부대는 점차 힘에 밀려 산과 바다로 퇴각하였다. 그러던 도중에 박주석 등 12명의 주동자가 체포되었으며, 김연일은 천제연(天帝淵) 서쪽으로 달아나다 체포됨으로써 운동은 종식되었다.」<제주항일독립운동사. 제주도. 1996>

<최근 정비 사업을 마친 모습>
「현재 이곳 법정사는 80여 년 전 그 격력했던 항쟁을 기억하기 어려울 만큼 소박하고 고요하다. 규모도 아담한데다 한라산 깊숙이 있어 그저 좋은 느낌만을 전할 뿐이다. 불교 사찰이 아니라 토속종교의 성소 같은 느낌도 든다. 실제 뒤쪽 건물에는 오토제신(五土諸神)과 북두칠성 등 토속신앙의 신위도 모셔져 있다. 이런 모습을 보다보면 자연스레 법정사 항쟁의 주도세력을 다시금 생각하게 된다. 많은 사람의 주장처럼 외피만 불교일 뿐 반일적 토속신앙인 보천교가 실제 주도세력이었을 것만 같다.
그런데 혹자는 이 항쟁에서 불교나 보천교 등 종교를 필요 이상으로 강조하는 것은 잘못이라고 말한다. 무엇보다 400여 명의 주민 참여를 중시해야 한다는 주장이다. 그야말로 종교는 진짜 외피일 뿐, 실제 항쟁의 동인은 일제 침탈에 대한 주민들의 분노라는 논리이다. 그래서 그들은 이름도 ‘법정사 항쟁’이 아니라 ‘무오 중문지역 항일운동’이라고 붙인다. ‘무오’는 1918년을 말한다.」<제주역사기행. 이영권. 20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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