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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달의 역사
..... 1972년 '10월 유신'의 헌법과 1987년 '호헌철폐 투쟁'의 헌법_김영수(113호)
첨부파일 -- 작성일 2018-10-19 조회 1012
 

‘노동자와 민중의 권리를 실현하는 법률기구, 예를 들면, 노동자와 민중들의 권리장치들이 헌법기관으로 존재하게 하면 어떨까. 아니면, 그리스처럼 ‘법률에 근거하는 독립기관의 설립 및 운영을 보장’하는 방식으로 헌법기관과 관련된 조항을 없애버리는 것도 하나의 방법일 것이다. 그리스의 사례를 권리의 눈으로 다시 들여다보면, 헌법을 권리조항만으로 구성하고, 권력구조에 해당하는 대통령, 행정부, 입법, 사법 등의 권력을 일반 법률로 제정하면 어떨까.’

 


1972년 ‘10월 유신’의 헌법과 1987년 ‘호헌철폐 투쟁’의 헌법

김영수(노동자역사 한내 연구위원)

쉽게 그려지는 1987년의 모습과는 다르게 1987년 헌법의 허상은 무엇일까? 소위 권력의 맛에 중독되어 있는 ‘386(586)꼰대’들만이 1980년대 반독재 민주화운동의 대표인양, 민주주의의 눈으로 볼 때 1987년 개정헌법이 아무런 문제가 없는 것처럼 여겨버리는 역사의 ‘자기오류’ 속에 정답이 있지 않을까 생각하는데, 이 글을 읽는 당신은 어떨지 궁금하다.

모든 역사적 사건들이 그러하듯, 1987년 ‘호헌철폐, 독재타도’ 투쟁도 ‘필연의 힘’들이 모이고 모여서 그 실체를 드러낸 ‘우연의 산물’이다. 그런데 너와 나는 ‘우연의 선물’에 환호작약하기 쉽지 역사적인 ‘필연의 디딤돌’에 쉽게 눈과 마음을 주지 않는다. 1987년의 ‘호헌철폐, 독재타도’ 투쟁은 1980년 광주항쟁의 슬픔과 분노를 반독재 민주화운동으로 승화시키면서, 광주학살의 주모자들이 장악하고 있는 권력체제를 ‘노동자와 민중’의 돌과 화염병으로 무너뜨리고, ‘노동자와 민중’ 스스로가 자신의 권리를 싸움으로 쟁취함과 동시에 노동자의 권리로 헌법을 개정하여 대통령을 직접 선출했던 환희를 만들었다.

물론 1987년을 다르게 기억하는 사람들도 많다. 군부독재체제의 권력자들이 권력교체를 평화적으로 이행하기 위해 ‘노동자와 민중’의 요구를 적극적으로 수용했고, 그 과정에서 비교적 합리적인 지배세력들이 한국사회의 민주화를 전략적으로 선택했다는 것이다. ‘역사적 우연’의 일부라는 것까지 부정하지 않는다. 그러나 ‘우연의 선물’이 담고 있는 큰 줄기는 1960년 4.19항쟁 이후, 노동자들이 정치의 주체이자 권력의 주인임을 부활시키는 과정이었다는 사실이다. 이 줄기는 쉽게 만들어지지 않았다. 1980년 광주항쟁에서 돌아가신 수많은 희생자들뿐만 아니라, 광주항쟁 이후 1987년 6월 항쟁 이전까지 노동현장에서 노동의 권리를 위해 싸우다가 감방에 갇히거나 희생된 수많은 사람들 덕택이다.

1980년대 초반, 서울과 수도권의 공장지역에는 희멀건 얼굴과 손으로 공장의 문을 열고 들어온 이들이 많았다. 1980년 광주항쟁 이후, 1983년 대학자율화 조치 이전까지 대학에서 제적된 학생들과 학생운동진영의 선진적 활동가들이었다. 그 수치를 정확하게 지적할 수 없지만, 대략 3,000여 명에 달했다. 이들은 소그룹운동의 방식으로 노동현장의 노동자들을 의식화·조직화하면서 노동자들의 권리를 위한 투쟁의 주역이 되었다. 그 주역들은 대부분 한국 자본주의 체제를 혁명적으로 변화시켜야 한다는 전략적 노선을 내세웠다.

그 중에서 노동자와 민중들을 혁명적으로 지도하는 활동에 주력하면서 헌법을 혁명적으로 제정하는 투쟁에 집중했던 그룹이 있었는데, 핵심 세력은 제헌의회 그룹이었다. 제헌의회그룹은 1985년 2.12총선을 전후로 ‘제헌의회 소집투쟁’을 전개하면서, 혁명적인 전위조직을 중심으로 반체제적인 노동운동을 추구했었다. 이 그룹은 1986년 10월을 전후로 시작해서 1987년 헌법개정투쟁의 시기에 ‘파쇼하의 개헌반대, 혁명으로 제헌의회 소집’이라는 전략적 슬로건을 투쟁의 전면에 내걸었고, 그러한 투쟁의 필연적 힘을 노동자·민중들의 혁명적이고 정치적인 계급의식으로 이전시키려 하였다. 이들은 제도권 야당을 철저한 보수주의 세력이자 기회주의 세력으로 단정하였으며, ‘국가 폭력기구의 변화, 독점자본의 국유화, 민족통일을 위한 남북통일민중회의의 소집, 민중의 기본권과 혁명적 저항권 보장’ 등을 내용으로 하는 민주주의 민중공화국의 강령을 준비하려 하였다. 30년이 훌쩍 지나간 지금도 ‘촛불정신에 반하고 노동자·민중을 억압하는 개혁 팔이’만으로 너와 나를 미혹에 빠뜨리고 있는데, 당신은 혁명적인 헌법을 상상해보시지 않으렵니까?

제헌의회 그룹은 또 전국적 정치신문인 「횃불」을 매개로 하여 전위당을 건설하기 위한 조직원칙과 조직계획, 조직수단을 수미일관한 체계로 제시하였다. 제헌의회그룹은 신길동시위(86.11.13), 신민당 개헌대회 시위(86.11.29) 등 40여 차례의 시위를 주도하였고, 노동자용 신문인 “노동자의 길”(86.12, 2회 발간)과 학생 활동가용 신문인 “민족민주선언” 등을 발행하며 성남・안양・인천・구로 등지에서 노동자 지구그룹을 결성하여 활동하였다. 이와 같이 이 그룹은 혁명적 요구투쟁과 동시에 제도권 야당의 보수적인 성격을 규명하는 투쟁에 주력했다. 이처럼 ‘제헌의회 소집’이라는 정치투쟁의 좌표를 무기로 노동운동의 혁명적 급진화를 도모했던 것이다.

하지만 이 그룹은 노동조합운동과 실질적이고 유기적인 구조를 확보하지 못하였다는 비판에서 자유롭지 못했다. 두 가지 지점이다. 하나는 정치적 투쟁의 과정에서 노동조합운동 및 노동자들을 혁명적 정치지도의 대상으로 삼았다는 것이었으며, 다른 하나는 노동조합운동의 선진적인 개별 활동가들을 노동조합운동의 ‘전달벨트’로 삼고자 하였다는 것이었다.

혁명적인 헌법 제정투쟁의 사례를 소개하였지만, 1987년 헌정체제의 디딤돌은 권리를 향한 ‘노동자와 민중’의 필연적 의지였다. 개인의 수준을 넘어 집단과 집단의 의지가 하나로 연결되는 권리 네트워크가 독재 권력의 아성을 무너뜨렸던 것이다. 그러나 제도 밖에서 일어난 ‘노동자와 민중’의 ‘직접정치와 권리찾기’가 1987년 헌정체제의 뇌수였건만, 당시의 권력은 노동자와 민중들의 혁명적인 개헌투쟁을 1987년 개정헌법으로 배신하였다. 대통령을 선거로 선출한다는 사실 말고는 1972년 유신헌법의 틀 속에 갇혀 있다는 사실이다. 곰삭혀 보고 또 곱씹어 보아도, 약 반세기 전 노동자·민중들에게 유혈통치의 칼을 휘둘렀던 유신체제가 헌법 속에 버젓이 살아있다니 참으로 한심하기 그지없는 노릇이다.

권력구조를 중심으로 하는 헌법의 틀 자체가 그것에 해당하지만, 구체적으로 한 가지 예만 들어보자! 일반 법률로 보장해도 될 권력기구 혹은 국가기구들이 헌법이 보장하는 권력 장치로 존재한다는 점이다. 아래의 비교에서 확인할 수 있다.


제헌헌법                    유신헌법                             87년 개정헌법

없음            통일주체국민회의(35-42조)           국가원로자문회의(제90조)
                  국가안전보장회의(67조)                국가안전보장회의(91조)
                  감사원(71-74조)                         민주평화통일자문회의(92조)
                  헌법위원회(109-111조)                국민경제자문회의(93조)
                  선거관리위원회(112-113)             감사원(97-100조)
                  경제·과학기술의 창달·진흥을           헌법재판소(111-113조)
                 위하여 필요한 자문기구(123조)       선거관리위원회(114-116조)


제헌헌법에는 특별한 헌법기관들이 없다. 그런데 유신헌법에서 헌법기관들이 등장한다. 감사원이나 선거관리위원회, 헌법위원회 등은 세계헌법에서도 보장하는 기관이라는 점을 감안할 수 있지만, 그 이외에 자문기구나 회의기구가 헌법으로 보장했다는 것은 헌법을 권력의 지배도구로 전락시켰다는 사실이다.


1987년 개정헌법도 각종의 법률적 회의기구들을 헌법기관으로 보장하였다. 국가원로자문회의(제90조), 민주평화통일자문회의(92조), 국민경제자문회의(93조)가 헌법기관이라는 사실도 헌법의 저의를 의심케 한다. 국가의 원로가 누구이며 각종 자문회의에 참여하는 사람들이 누구이기에 헌법권력까지 부여하고 있단 말인가.

굳이 1985년 제헌의회 그룹의 혁명적 슬로건을 차치하더라도, 노동자와 민중의 권리를 실현하는 법률기구, 예를 들면, 노동자와 민중들의 권리장치들이 헌법기관으로 존재하게 하면 어떨까. 아니면, 그리스처럼 ‘법률에 근거하는 독립기관의 설립 및 운영을 보장’하는 방식으로 헌법기관과 관련된 조항을 없애버리는 것도 하나의 방법일 것이다. 그리스의 사례를 권리의 눈으로 다시 들여다보면, 헌법을 권리조항만으로 구성하고, 권력구조에 해당하는 대통령, 행정부, 입법, 사법 등의 권력을 일반 법률로 제정하면 어떨까. 1985년 제헌의회 그룹들이 이러한 혁명적 헌법구조에 대해 어떻게 생각했을지 자못 궁금하지만, 권력을 권리의 부산물로 위치하게 하는 것 자체가 혁명적 헌법의 상이 아닐까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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