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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다시 읽는 현장
..... 밤새워 미싱대를 지키며_한정애 (40호)
첨부파일 -- 작성일 2012-04-10 조회 901
 

밤 새워 미싱대를 지키며

  한정애 (1984105<민주노동 6> 기고글)

 공장에 다시 들어가다

먼지를 뽀얗게 날리며 종점으로 버스가 달려가고 있다. 인천에서 가장 구석진 곳 율도, 결혼하여 보증금 20만원 사글세 3만원에 방을 얻어 선반공인 남편과 신혼생활을 시작했다. 교통이 조금 불편하지만 방값이 다른 곳보다 조금 싼 편이기에 이곳에 자리를 잡게 된 것이다. 미싱사 10년의 이력을 가진 나로서는 결혼한 후엔 조금 쉬고 싶기도 했지만 남편의 박봉으로 사글세 면할 날도 까마득할 것 같고 둘이 살아가기조차 빠듯하니 자식을 낳아 키울 수 있는 여지조차 없을 것 같아 다시 탈탈이 운전사자리를 알아보게 되었다. 남편은 가능하면 공단 안에 있는 공장으로 나가기를 권했지만, 갓 살림을 시작한 나로서는 우선 집에서 가까운 곳에 다니면서 살림을 돌봐야 할 것 같아서 얼마 멀지 않은 이라는 하청 봉제공장에 들어가게 되었다.
그날부터 하꼬방 같은 공장에서 먼지를 뒤집어쓰면서 미싱을 돌리기 시작했다. 에 입사한지 한 달이 지나 월급날이 돌아왔다. 아침부터 조금 부푼 맘으로 월급을 받아 써야 할 것들을 요모조모 생각하며 출근 하였다.다른 날보다 미싱을 밟는 모습들이 활기에 넘쳐 있는 게 모두 나와 같은 기분인 듯했다. 작업을 끝낸 후 한 자리에 모이라는 상무의 지시에 따라 60여명이 한 자리에 모였을 때 상무는 헛기침을 하며 회사 사정이 여의치 않아 며칠 후에 월급을 주겠다는 김새는 말을 한 뒤 나가버렸다. 여기저기서 웅성거리는 소리가 들렸으나 모두들 맥없이 집으로 돌아가기 시작했다. 나도 첫 월급을 기대했던 만큼이나 상심은 되었으나 며칠 후 꼭 주겠다는 상무의 말을 되씹으며 집으로 돌아왔다.

  빚 갚고 남은 돈으로 월급을 주려하니 남는 게 없어

드디어 상무가 약속한 날이 돌아왔으나 상무와 사장은 코빼기도 보이지 않고 전무만이 나와서 역시 월급을 줄 수 없다며 며칠만 더 참으면 꼭 주겠다고 하였다. 그러나 한번 약속을 어긴 뒤였기 때문에 그 말을 믿을 수 가 없었다. 벌써 월급날이 여러 날 지나 있었기 때문에 이미 돈이 떨어져 있던 사람들은 쌀이 없어 회사에서 점심 먹는 것으로 하루끼니를 때우고 있었고, 기숙사에 있는 사람들은 돈을 꾸려 나가려 해도 버스표가 없어 외출조차 못하고 있는 실정이었다.
다음날 아침 회사에 출근은 하였으나 작업을 하지 않았다. 전무 혼자서 왔다갔다 부산을 떨면서 작업할 것을 재촉하였지만 누구 한사람 움직이지 않았다. 오후가 되자 전무는 우리 모두를 한자리에 모이게 한 뒤 회사 사정에 대해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회사의 자금주는 상무인데 그가 공장에서 손을 떼었다는 것이다. 그러니 새로운 동업자가 올 때까지 참아달라는 것이었다. 결국 며칠 후 월급을 꼭 주겠다는 각서를 받아 현장에 붙여놓은 후 다시 작업을 시작했다. 이미 월급날로부터 10여일이 지나 있었다. 대부분의 하청업체가 그렇듯이 도 자본 구조가 매우 취약하였는데, 그 내막이 어떤가 하면 사장은 빚을 얻어 건물을 임대하고 미싱은 외상으로 들여놓아 매달 그 이자와 원금을 갚아 나가야 하는 실정이었다. 본사에서 어음 결제를 받으면 으레 자기들 빚부터 갚고 남는 것으로 월급을 주려고 하니 모자랄 경우 월급을 미루는 일이 다반사였다. 월급 떼어먹는 것을 손바닥 뒤집는 것보다 쉽게 생각하면서 양심의 거리낌을 전혀 느끼지 않는 도둑의 심보와 같다고나 할까. 이 때문에 자금주인 동업자 상무도 자기에게 돌아오는 이익이 적기 때문에 회사에서 손을 뗀 것이다.

  미싱과 제품을 지키며 월급 받아내

며칠 후 각서에다 약속한 날짜가 돌아왔으나 사장과 전무는 공장을 폐쇄하고 도망쳐 버렸다. 어떻게 알았는지 미싱가게에서는 외상값 대신 미싱을 실어가려고 인부와 트럭을 몰고 왔다. 아차 실수하면 우린 빈손 털고 나와야 될 판이었다. 사태가 긴박해짐을 느낀 나는 공장 문 앞에 모여 웅성거리는 동료들과 현장 문을 뜯고 들어가 대책을 세우기 시작했다. 모두가 밀린 월급을 포기하기에는 각자의 생활이 너무도 궁핍해 있었고 또 갈 곳조차 없어 우린 똘똘 뭉칠 수가 있었다.
우선 대표를 선출했다. 나와 다른 두 사람이 뽑혔다. 그리고 각자 미싱 앞에 앉아 미싱가게에서 미싱을 못 실어 가도록 하였다. 그러던 차에 본사에서 이미 선불로 지급된 제품을 찾으러 왔다.
완성된 제품이 쌓여 있었으나 우리는 안에서 현장문을 걸어 잠그고 그 제품을 내주지 않았다. 순식간에 현장 바깥에는 미싱가게와 본사에서 나온 인부 사오십명이 기세등등하게 몰려와 있었고 트럭이 요란하게 경적 소리를 내고 있었다. 이런 공포 분위기 속에서 우리들은 침착하게 출입구 쪽에 바리케이드를 치고 한자리에 모여 앉아 노래도 부르고 서로의 사정 이야기도 나누면서 현장을 지켰다. 굶주리는 처참한 생활 속에서 악만 남았고 기다리라는 사장의 속임수에 더 이상 속지 않겠다는 마음의 결의가 우리 모두의 눈빛 속에서 빛나고 있었다.
주위가 어둑해지도록 미싱과 제품을 지키고 있던 중 도망갔던 사장이 대표단에게 협상을 요구해 왔다. 제품을 찾아가야만 했던 본사에서 사장에게 월급을 지불할 수 있을 만큼 돈을 빌려주었던 것이다. 그 자리에서 모두 월급을 받고 본사에 제품을 내주었다. 월급날로부터 보름이 지나 있었다.

사장은 밥 먹고, 우리는 빵 씹고

다음날부터 정상 작업을 시작하였으나 원체 돈이 없던 사장은 식당에 쌀도 제대로 대주지 못해 기숙사생은 굶기가 일쑤였고 거의 매일 하다시피 하는 야간작업 때는 아예 저녁조차 주지 않았다. 배고파 눈물을 흘리며 일하는 어린 시다들을 보다 못해 우리 대표단이 사장집을 찾아갔다.
그때 마침 사장은 진수성찬으로 차린 밥상을 받고 있었다. 그 광경을 본 나는 너무 울화가 치밀어 그 자리에서 뒹굴며 울고불고 하였다. 현장에서는 저녁조차 못 먹고 고픈 배를 움켜 쥐며 일하고 있는데 정말 이럴 수 있느냐고 따졌더니. 그때서야 빵이라도 사먹으라며 돈을 내밀었다. 아니 자기들은 밥 먹으면서 우리들은 빵조각이나 씹으라고, 정말 기가 막혔지만 그 돈을 들고 와 빵을 사먹고 작업을 계속하였다.
또 월급날이 돌아왔다. 그러나 사장은 돈이 없다며 며칠만 또 참아달라고 하였다 이미 속을 대로 속은 우리들은 작업거부에 들어갔다. 사장은 오히려 호통을 치면서 작업할 것을 종용했으나 거기에 동요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우리 대표단이 사장에게 제품 값을 우리에게 직접 준다는 각서를 써주면 작업하겠다고 했으나 사장은 오히려 화를 내며 펄펄 뛸 뿐이었다. 사장은 미싱가게 외상값과 이자를 갚은 다음에 월급을 주겠다는 속셈이었던 것이다. 작업 거부가 계속되자 본사에서 사람이 나왔다. 대표단이 본사 사람과 직접 교섭을 하였다. 제품 값을 직접 대표단에게 건네준다는 약속 하에 그날 작업을 마무리 지었다.
작업이 끝난 뒤 제품 값을 받아 나누어 가지고 집으로 돌아갔다. 그러나 한달치 봉급에 비하면 어림없는 푼돈이었다.

근로감독관은 허수아비, 미싱 팔아 월급 받다.

그 다음날부터 작업은 하지 않고 교대로 회사에 나와 미싱을 지키기로 하였다. 잠시라도 자리를 비우면 미싱가게에서 미싱을 실어갈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미싱가게에도 아직 외상값이 남아있었다.
그러던 중 누가 신고했는지 인천시 근로감독관이 회사에 찾아왔다. 소문에는 먼저 회사를 그만 둔 상무가 고발했다고 하였다. 근로감독관은 미싱을 지키고 있는 우리에게 곧 회사가 망하게 될테니 빨리 다른 회사를 알아보라면서 몇 달 후에 밀린 월급을 받게 해주겠다고 했다. 근로자 편에 서서 억울한 사정을 들어주고 공장마다 근로기준법이 잘 지켜지고 있는지를 감시해야 할 근로감독관이 이런 식으로 밖에 이야기할 수 없는 걸까. 몇 달 후 회사가 망한 뒤 누가 밀린 월급을 챙겨주는 건가. 이 말을 믿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또 하루는 북부지역 담당 형사가 찾아와 나에 대한 온갖 중상을 하면서 한정애는 노동조합 활동하던 사람인데 빨갱이보다 더 나쁜 사람이니 모두 조심해야 한다.”며 동류들과 나를 이간시키려 했으나 오히려 내 동료가 그 형사에게 빨갱이보다 나쁜 사람이 대한민국에 있냐, 있으면 대봐라.”하고 대들었더니 아무 소리도 못하고 사라졌다. 나에 대한 동료들의 믿음이 너무 고마워 눈물이 확 나왔다. 함께 딩굴고 소리치는 가운데 튼튼한 믿음의 뿌리가 우리를 묶어줬던 것이다.
교대로 미싱을 지키며 며칠이 흘러갔다. 미싱가게 주인이 협상을 하자고 했다. 미싱을 경매에 붙여 그 돈으로 자기들 외상값도 받고 밀린 월급도 해결하자는 것이었다. 대표단은 동료들과 상의한 뒤 찬성하였다. 다음날 미싱을 경매한 뒤 미싱가게 주인은 밀린 외상값을 받고 공장에서 손을 떼었고 우리들은 남은 돈을 공평하게 나눠 밀린 월급을 받은 뒤 공장을 뒤로하고 동료들과 섭섭함을 달래며 각기 다른 공장을 찾아 떠나갔다.

법으로도 노동자 생존권 보장 못해

물론 밀린 월급을 완전하게 받지는 못했으나 그나마 받을 수 있었던 것은 남의 손에 넘어가기 전에 우리 손으로 미싱과 제품을 지키면서 협상을 할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현행 법률상으로는 기업이 파산하면 임금채권을 우선적으로 보장받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빚쟁이들이 기계와 제품을 빼돌리기 전에 우리들 스스로가 공장에 남아 있는 재산을 지켜 밀린 임금을 꼭 받아내야 한다. 나중에 아무리 노동부에 가서 진정해보았자 우리에게 찾아왔던 근로감독관처럼 몇 달 기다려보라는 무책임한 소리밖에 들을 수 없다. 그동안 우리는 굶고 살란 말인가. 법으로 보장받을 수 없는 우리의 생존권은 우리가 스스로 지켜 나가야할 것이다.

*임금채권보장법은 1998년에 제정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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