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월 10일을 한국전기통신공사(한국통신) 비정규직 노동자들이 ‘인간해방운동으로서 노동해방운동과 계약하고 온 나라에 통신’을 개시한 날인 전국적인 한국통신계약직노동조합을 창립한 역사적인 날로 기억하자.
2000년 6월 10일,
한국통신 비정규직 노동자들
‘노동해방운동과 계약하고 온 나라에 통신’하다!!!
안태정(노동자역사 한내 연구위원)
우리 모두 ‘6.10’하면 금방 생각나는 역사적 사건이 있다. 반식민지 민족해방운동으로서 ‘1926년 6.10만세운동’, 반독재 민주화운동으로서 ‘1987년 6.10항쟁’ 등이 그렇다. 그러나 이제 그것만으로 충분하지 않다. 더 기억해야 할 것이 있다. 즉, 한국전기통신공사(한국통신) 비정규직 노동자들이 ‘인간해방운동으로서 노동해방운동과 계약하고 온 나라에 통신’을 개시한 날인 전국적인 한국통신계약직노동조합을 창립한 ‘2000년 6월 10일’을 말이다.

지리산 천왕봉에 휘날린 한국통신계약직노동조합 깃발
한국통신 비정규직 노동자들은 2000년 12월 13일부터 2002년 5월 13일까지 ‘장장 517일’ 동안 인간해방을 위한 투쟁을 전개했다. 그동안 그들이 “경찰서 신세를 지고, 몰매를 맞아 다치고, 죽음을 무릅쓰고 얼음 속에서 잠을 자고, 거의 매일 집회하고 가정과 생계를 뒤로 하고 파업대오를 지킬 수 있었던 힘”은 어디에서 나왔던 것일까?
가장 커다란 힘은 전국적인 ‘한국통신계약직노동조합’이라는 조직 자체에서 나왔다. 즉, 한국통신계약직노조가 “자기동력과 튼튼한 조직력으로 뒷받침”하여 “비정규직 철폐투쟁과 구조조정 저지투쟁의 자기 위상을 주도적으로 결의”하고, “스스로의 투쟁을 단위사업장의 문제로 국한시키지 않고 연대투쟁의 모범을 창출”하고, “선도적인 대중투쟁 감행” 등으로 비정규직 노동자들의 투쟁의지가 뚜렷하게 나타나도록 했던 것이다.
2000년 당시 한국통신에는 비정규직 노동자 1만여 명이 일하고 있었다(정규직 노동자 3만 8천여 명). 한국통신 비정규직 노동자들은 선로유지, 일반가설, 일반 고장수리, 시험실업무, 114번호 안내업무, 100번 민원상담 및 신규접수업무, 110번 고장접수업무, 115전보, ADSL 설치 및 A/S업무 등을 정규직과 동일 장소에서 동일하게 노동했다. 그러면 무엇이 한국통신 비정규직 노동자들에게 2000년 6월 10일 전국적인 한국통신계약직노동조합을 결성하도록 했을까?
한국통신 비정규직 노동자들의 상태를 대강보자. 당시 그들은 1개월~1년 단위의 일방적인 계약으로 인한 고용불안과 정규직의 2분의 1 또는 3분의 1 수준의 임금으로 정상적인 생활을 하기가 힘들었다. 근속년수 19년 된 계약직이 IMF 이전 월 140여 만 원 받던 임금을 90만 원대로 일방적인 삭감을 당했고 다시 월 85만 9천 원으로 삭감 당했다. 비정규직 노동자들은 토요일도 오후 6시까지 강압적으로 근무하는 등 근로기준법에 위배되는 대우를 받아 왔다. 국경일, 설, 추석, 노동자의 날 등만 제외하고 모두 근무해야 하는 상황이었으며 4대 보험의 적용도 제대로 되지 않다가 2000년 5월 계약직 관리지침을 변경하여 적용시키고 있지만, 3개월 단위로 계약을 갱신해야 하는 불편함으로 직장의료보험보다 지역의료보험을 택하는 경우도 있었다. 특히 오토바이 사고나 작업 중 안전사고가 발생했을 때 산재처리도 되지 않았다. 그들은 또한 연차, 월차, 시간외수당, 성과급 등도 제대로 지급받지 못한 부분도 많았고 월급명세서도 받지 못해서 정확한 임금내역도 확인할 길이 없었다. 114번호안내국의 경우 계약서와 상관없이 관리자 마음대로 전일제근무에서 파트타임으로 바꾸기도 했다. 한국통신 비정규직 노동자들이 이에 대하여 항의하면 관리자들이 욕설과 폭언을 하는 등 인격적으로도 무시했다. 이밖에도 수많은 차별이 비정규직 노동자들에겐 응어리로 존재했다. 한편, 한국통신 비정규직 노동자들의 정규직이 되겠다는 희망과 한국통신측의 정규직화 약속까지도, 당시 ‘정규직채용계획’ 없다는 소문 등이 확산되면서, 위기의식과 배신감으로 바뀌면서 현장의 분노가 증폭되어 갔다.
2000년 6월 10일 한국통신계약직노동조합 창립총회
2000년에 들어서서, 이러한 상태 속에 있던 한국통신 비정규직 노동자들 가운데 몇몇 동지들이 모여 임금 및 노동조건 등에 대하여 불만을 토로했다. 그러다가 2월 1일 동대문, 행당, 전농, 혜화, 성북, 월곡 6개국의 동지들이 협의회 설립 추진 1차 모임을 가졌다. 2월 11일 2차 모임에는 성수 전화국 동지들도 결합했다. 이어 22일, 28일 모임을 더 가졌다.
그들은 2000년 2월 29일 ‘한국통신계약직노동자협의회’를 만들어 활동했다. 이 ‘협의회’는 이미 존재하고 있던 ‘한국통신노동조합’에 가입하기 위하여 노력했다. 당시 한국통신노조의 규약 제2장 제7조는 “한국전기통신공사의 상법상의 자회사에 근무하는 자와 한국전기통신공사의 일용직도 가입하고자 하면 조합원이 될 수 있다”라고 규정하고 있었다. 그러나 비정규직 노동자들은 한국통신노조에 가입할 수가 없었다. 이렇게 한국통신 비정규직 노동자들은 한국통신 측으로부터도 차별을 당했지만, 한국통신노조로부터도 사실상 차별을 당했다.
그리하여 2000년 3월 31일 한국통신 비정규직 노동자들은 독자노조인 ‘한국통신서울지역계약직노동조합’을 결성했다. 이 노조는 4월 29일 ‘힘내라 봇대야’라는 노동절 특별호를 발행하여 ‘5대 슬로건’, 즉 “계약직 노동자 단결하여 민주노조 쟁취하자, 반복되는 계약갱신 계속근로 인정하라, 삭감인금 보상하고 생활임금 쟁취하자. 근로기준법 주44시간 노동시간 단축하자, 정규직 다 쉬는 법정공휴일 유급휴급일로 쟁취하자” 등을 내걸고 활동했다. 그러자 한국통신측이 5월 16일 새로 ‘계약직관리지침’을 만들어 비정규직 노동자들에게 전에 없던 혜택을 일정하게 내놓았다. 이 ‘계약직관리지침’은 비정규직 노동자들이 그동안 활동한 성과물이었다.

2000년 6월 22일 한국통신계약직노동자들은 본사앞 첫집회를 열었다.
이러한 활동성과의 바탕 위에서, 2000년 6월 3일 서울, 충남, 구미 등의 한국통신 비정규직 노동자들이 서울 종묘공원에서 열린 전국 비정규직 노동자집회에 참여했다. 그들은 집회 후 그동안 서울지역을 중심으로 구성되었던 노조를 전국조직으로 만들기로 결정했다.
드디어 2000년 6월 10일, 대전의 구 시청 2층 민주노총 대전충남본부에 서울과 대전을 중심으로 충북, 대구 등의 한국통신 비정규직 노동자 약 250여 명이 모여 전국조직인 ‘한국통신계약직노동조합’을 창립했다. 창립총회에서 전국조직 위원장으로는 구강회가, 조직단장으로는 홍준표가 선임되었다. 충남본부 대표로는 이춘하가, 대구본부 대표로는 우성기가 선임되었고, 충북지역 대표로 홍도표가 내정되었다. 총회 직후 대표들끼리 따로 모여 법률업무에 정용택, 투쟁본부장 강태봉, 사무장 고철윤 등을 선임했다.
한국통신계약직노조의 목적은 “한국통신에 종사하는 계약직 노동자가 주체가 되어 자주적이고 민주적인 단결을 통해 근로조건의 유지 및 개선, 근로자의 정치, 경제, 사회, 문화적 지위향상을 도모함”이었다. 이러한 목적을 달성하기 위하여 한국통신계약직노조는 “노동3권보장” “실질임금의 향상과 공정한 성과배분” “노동시간 단축, 복지향상 등 노동조건 개선” “산업안전보건향상 및 산업공해퇴치” “건전한 노동문화의 발전” “사회개혁” “조직의 확대강화와 산업별?지역별 및 전 노동자의 연대활동” “노동자의 정치적, 경제적, 사회적 지위향상” 등에 관한 사업을 벌이기로 했다.
전국적인 한국통신계약직노조를 결성한 뒤, 2000년 6월 22일 처음으로 분당 한국통신 본사 앞에서 200여 명의 노동자들이 한국통신 측의 탄압을 뚫고 독자적인 집회를 열었다. 민주노총, 학생, 그리고 한국통신 본사 앞에서 농성 중이던 정규직 해고자들이 함께 했다. 노동자들은 “3개월마다 반복되는 계약갱신을 중단하고 고용안정 보장, 계약직 노동자의 단체협약 적용 및 단체협약 미적용분 3년치 보상, 계약직 노동자에 대한 정규직화 프로그램과 일정 제시” 등을 요구했다. 그들은 한국통신측에 면담을 요청했다. 그러나 한국통신측은 받아들이지 않았다. 노동자들은 한국통신 본사로 진입을 시도했다. 밀고 당기는 몸싸움이 벌어졌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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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앞에 저만치, 2000년 12월 13일부터 시작되는 한국통신 비정규직 노동자들의 “517일간 외침”이 보이고 있었다.
* 이상은 『517일간의 외침』(엮은이 이운재 정경원, 한국통신계약직노동조합 백서발간위원회, 도서출판 다짐, 2002)에 따름.
그런데, 나는 요즈음, 마르크스가 『자본론 Ⅰ』제28장에서 쓴 다음과 같은 말이 자꾸 눈에 걸린다.
“자본주의적 생산이 진보하면, 교육, 전통, 관습에 의해 자본주의적 생산양식이 필요하다는 것을 자명한 자연법칙으로 여기게 되는 노동자계급이 자라난다. 일단 그러한 자본주의 생산양식의 조직화가 완전히 자리잡으면 모든 저항은 무너져 버릴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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