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오랫동안 제주 역사, 4.3항쟁의 역사를 연구한 학자이자 역사 복원을 위해 활동한 박찬식 회원의 글이다. 2012 한내 4.3항쟁 기행 특별 강의를 해주셨다. 항쟁의 개요, 역사를 회복하려는 제주 민중들의 노력, 남겨진 과제를 알 수 있기에 강사의 동의를 얻어 뉴스레터에 싣는다.
4·3의 진실
박찬식 (제주4·3추가진상조사단장)
4·3이 남긴 것, 그 이름의 궤적
1948년 4월 3일 재산 무장대의 습격에 대한 미군정 당국의 공식적 반응은 “폭도들의 총선거 반대 폭동”으로서 즉각 소탕한다는 것이었다. 4월 중순 이후 무장대와 미군정이 심하게 대립하는 과정에서 언론매체의 인식도 상반되게 나타났다. 우익계 신문들은 ‘폭동’의 인식 기조를 유지한 반면, 중도좌익계 신문들은 ‘소요사건’, ‘무장봉기’, ‘제주도의 항쟁’, ‘제주도 인민봉기’ 등으로 보도하였다.
1948년 6~7월에 긴박했던 제주도 상황이 느슨해지자, 신문과 잡지 지면에는 4·3을 중립적인 입장에서 보려는 기사들이 늘어났다. 당시 제주 현지를 다녀간 기자들은 미군정 당국, 경찰의 입장과는 매우 다르게 4·3을 인식하고 있었다. 이제 언론을 통해 ‘4·3사건’이란 용어가 일반적인 사건명으로 인식되어 갔다. 또한 이 시기 4·3 관련 재판을 치렀던 법조인들은 4·3을 ‘불행한 사건’으로 인식하고, 해결책을 제시하기도 했다.
그러나 1948년 8월 15일 대한민국 정부 수립 후 4·3은 ‘해결해야 할 사건’이 아니라, ‘진압해야 할 반란’으로 인식되었다. 1948년 11월부터 1949년 2월까지 제주도 일원을 초토화시킨 대한민국 군과 관련된 신문 기사는 반도 및 폭도와의 전투에서 승전했다는 공적사항으로만 채워졌다. 수많은 주민들의 죽음은 대한민국의 공적인 인식 대상에서 감추어졌다.
전쟁과 이승만 집권을 거치는 과정에서 ‘폭동·반란’으로 억압되었던 4·3 인식은 1960년 4·19 혁명을 거치며 다시 ‘사건’으로 환원되었다. 일부 ‘항쟁’의 인식을 공적으로 제기하는 노력도 있었지만, 5·16 쿠데타로 좌절되었다. 이후 반세기 동안 4·3은 국가 권력의 공적 인식만이 통용되는 시간이었고, 4·3의 논의 자체가 금기시되었다.
4·3에 대한 재인식은 1987년 6월 민주항쟁으로 비롯되었다. ‘항쟁’ 인식이 학생층과 시민사회에서 제기되었고, 활발한 진상규명운동이 전개되었다. 그러나 4·3을 아직도 ‘폭동’으로 보는 정부의 인식과 여러 지점에서 대립하였다. 4·3의 공적 인식이 제 자리를 잡게 된 것은 2000년 4·3특별법의 제정과 2003년 4·3진상조사보고서의 확정, 대통령의 공식 사과 등 일련의 제도적 해결 과정의 결과였다.
도내 유일의 정당, 인민위원회 - 해방 직후 사회상
1945년 8·15 해방 직후 자주독립적인 국가를 세우기 위한 건국준비위원회(‘건준’)가 전국적으로 조직되자, 제주에서도 대정면 건준을 시작으로 9월 10일에는 제주도 건준이 결성되었다. 이어 건준은 인민위원회로 개편되었고, 제주도 인민위원회는 9월 22일 제주농업학교에서 각 읍·면 대표들이 참석한 가운데 결성되었다. 인민위원회 조직을 계기로 1945년 말에 이르기까지 청년동맹·부녀동맹·농민위원회·소비조합 등 각종 대중단체가 속속 조직되었다.
제주도 인민위원회는 치안활동에 가장 주력하였다. 치안 업무는 주로 일본군 패잔병의 횡포를 막는 것과 토지·산업체 등 적산(敵産)이나 군수물자를 멋대로 처리하는 것을 감시하는 것이었다. 인민위원회는 각 면별로 국민학교·중학원 등을 설립하여 자치교육을 실시하기도 하였다. 인민위원회는 실질적으로 도내 각 면과 마을 행정을 주도하였다. 미군정에 의해 행정이 실시되었지만 여러 마을에서 인민위원장이 이장이 되었고, 인민위원회 사무실은 어김없이 마을 향사를 사용하였다. 미군정 당국에서도 제주도 인민위원회는 “도내의 유일한 정당으로서, 모든 면에서 정부나 다를 바 없는 유일한 조직체”라고 평가하였다.
이러한 자율적인 움직임과 함께 제주도에도 미군정이 실시되었다. 미군이 제주도에 진주한 것은 1945년 9월 28일이며, 실질적인 군정 업무를 담당할 제59군정중대가 도착한 것은 11월 10일이었다. 59군정중대는 인력 부족과 정보 부재로 원만한 통치 업무를 수행하지 못했다. 따라서 영향력이 강했던 인민위원회에 협조적일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미군정이 인민위원회를 공식적인 행정기관이나 통치기구로 인정한 것은 결코 아니었다. 미군정은 도청과 경찰의 요직에 일제 때의 관리를 그대로 앉혔으며, 서서히 우익인사들을 조직화시켜 인민위원회에 대항할 세력을 키워갔다. 1946년 8월 1일 제주도(島)의 도(道) 승격은 우익의 입지를 강화시키는 결정적 계기가 되었다. 도 승격을 줄곧 주장하여 왔던 우익세력의 손을 미군정이 들어주었을 뿐만 아니라, 이후 도 수준에 맞게 경찰병력이 증강되고 조선경비대 9연대가 창설되는 등 물리력이 강화되었다. 이에 맞추어 1946년 말부터 인민위원회에 대한 미군정의 직접 탄압이 가해졌다.
4.3의 그림자 드리운 관덕정 총성 - 3·1사건
1947년 3월 1일은 해방 후 두 번째 맞이하는 3·1절로서 제주도 좌익진영은 이 날 기념식을 전도민적인 행사로 치르기로 준비하였다. 2월 17일 관공서를 비롯한 사회단체·교육계·유교계·학교단체 등 각계각층을 망라하여 ‘3?1투쟁기념준비위원회’가 결성되었다. 이어서 2월 23일 제주도 민전이 결성되자 3·1기념행사 준비는 민전이 주도하게 되었다.
3·1절 기념대회는 각 읍·면별로 치러졌고, 제주 북국민학교에는 제주읍·애월면·조천면 주민 3만여 명이 모였다. 제주읍에서는 북국민학교 행사가 오후 2시에 끝나자 곧바로 가두시위가 벌어졌다. 관덕정을 거쳐서 서문통으로 시위대가 빠져나간 뒤 관덕정 부근에 있던 기마경찰의 말굽에 어린아이가 다치는 사태가 일어났다. 흥분한 관람 군중들이 돌을 던지며 항의하자 곧바로 관덕정 부근에 포진하던 무장경찰이 총격을 가했다. 눈 깜짝할 사이에 구경나온 민간인 6명이 사망했다. 이들 가운데는 15세 국민학생과 젖먹이 아이를 가슴에 안은 채 피살된 여인도 있었다.
이 발포사건으로 제주도내 민심은 극도로 악화되었다. 그러나 미군정과 경찰은 사태 수습보다는 시위 주동자를 검거하는 일에 주력하였다. 3·1절 준비위원회 간부들을 검속하는가 하면 학생들을 마구 잡아들였다. 이에 좌익진영은 대책위원회를 조직하고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