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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5년 대우자동차 임금인상 파업투쟁
⦁ 시기 : 1985년 4월 16일 ~ 4월 25일
⦁ 요약 : 1985년 4월 16일부터 10일간 계속된 대우자동차 노동자들의 임금인상 파업농성.
당시 대우자동차 노동자들의 노동조건
1985년 대우자동차 노동자들의 투쟁은 그 시기 기업들이 가지고 있던 노무관리의 병폐에 직접적인 원인이 있었다. 자본가들은 저임금 장시간 노동, 노동자들에 대한 비인간적 대우는 물론 노동조합이 있어도 이를 완전히 어용화시켜 노동자들의 불만을 원천 봉쇄했다. 게다가 착취한 이윤으로 말단 경찰에서 대통령에 이르기까지 매수함으로써 국가권력을 사병화함으로써 노동자들에 대한 탄압에 이용했다. 대우자동차는 굴지의 대기업임에도 그 어떤 기업보다 이같은 노동 통제가 극심했다.
첫째, 임금 자체가 낮았다. 대우자동차에 갓 입사한 노동자의 초임은 하루 평균 4,270원, 월평균 13만 원, 군대에 다녀와 복직한 노동자 역시 4~5년을 근무한 호봉임에도 초임 수준을 벗어나지 못했다. 게다가 1980~1982년 불황을 이유로 매년 상여금을 100%가량 체불해 노동자들의 불만이 누적됐다. 또 임금구조를 조작해 연장 노동에 대한 수당을 착취하고 있었다. 근로기준법에 명시된 연장근로, 야간근로, 휴일근로 수당을 통상임금이 아닌 기본급 기준으로 지급하고, 주 44시간 노동제를 시행하면서도 44시간 이후 48시간 사이의 노동에 대해 연장 노동을 적용하지 않음으로써 50% 가산 지급금을 회사가 가로챘다. 나아가 직종별 임금체계도 왜곡시켜 임금을 가로챘는데, 예를 들어 동일직종 지게차 운전기사들을 일급제와 월급제로 나누고 월급제 운전기사에게만 운전수당 25,000원을 지급함으로써 일급제 운전기사들의 임금을 착취했다. 심지어 회사의 직무교육을 근무 이외의 시간이나 토요일, 일요일, 광복절과 같은 휴무일에 실시하고도 임금을 전혀 지급하지 않았다.
둘째, 노무관리 자체가 매우 억압적이었고, 생산직 노동자들에 대해 특히 차별이 심했다. 한 예로 서울에서 부평공장까지 운행하는 통근버스에 생산직 노동자는 탑승하지 못하게 했고, 사전에 월차휴가를 신청해도 부서방침이라는 명목 아래 생산직만 내주지 않았다. 게다가 생산직 노동자 간 상대평가제를 도입해 상호 경쟁, 감시, 분열을 조장했다.
셋째, 노동조합이 조합을 비공개로 운영하고 조합원이 조합 활동에 참여할 기회를 박탈해 집행부의 독재에 대한 불만이 누적됐다. 대표적인 경우가 1980~1982년 상여금을 체불할 때는 집행부가 회사와 “체불이 아니다”라고 비밀리에 합의해 조합원들의 피땀을 회사에 팔아넘긴 것이다. 또 노조 위원장과 대의원을 선출할 때 선거구와 선거 일정을 어용집행부의 집권 연장 수단으로 악용했다. 노동조합 운영의 파행성은 대의원대회나 운영위원회가 거의 소집되지 않았다는 데서도 드러난다. 노조 집행부는 일체의 조합 활동을 방기해 노조에서 조합원들을 배제함으로써 회사에 기행하고 있었다.
1985년까지 대우자동차노동조합 지도체제의 주요 변동과정을 보면 회사가 결탁해 민주노조가 뿌리내리지 못하도록 막아온 정황이 고스란히 드러난다.
∎ 1963년 7월 신진자동차(부산)에 ‘전국운수노조 자동차지부 신진자동차분회’ 결성, 부평공장은 1967~1969년 두 차례 노조결성 시도가 회사탄압으로 무산
∎1971년 5월 18일 8명이 부평공장분회(분회장 김창수) 설립
∎1971년 6월 17일 사측이 김창수 분회장을 공금유용 혐의로 해고, 다음날 지부 승격 총회 열어 지부장에 회사측에서 내세운 채영기를 당선시킴
∎1971년 6월 23~24일 대의원선거에서 민주파가 대거 당선돼 채영기 사퇴시킴
∎1971년 8월 6일 이원우 지부장, 이성균 수석지부장, 사무장에 이진엽 선출
∎1971년 8월 16~17일 사측이 노조 결성 참여자 208명에 대한 집단감원 시도하자 이성균, 이진엽이 주도해 회사측 인물인 지부장을 여관에 감금해 놓고 이틀간 총파업 돌입. 회사 2층 옥상에 800명 집결, “악질 신진재벌이 피를 원한다면 피로써 대결한다”는 등의 현수막을 걸고 농성, 300% 해고수당 받아냄
∎1971년 12월 6일 김창수 초대분회장이 중앙노동위원회 판정받고 복직
∎1972년 1월 22일 이원우 지부장 불신하고 이진엽이 지부장, 이성균이 사무장에 당선
∎1973년 12월 15일 회사·기관·금속노조의 압력을 뿌리치고 끈질긴 단체교섭 전개해 주 44시간 노동제 명문화하는 단체협약 체결
∎1975년 2월 금속노조 중앙위원회에서 ‘이진엽 제명, 이성균 정권’을 결의해 당사자 퇴진. 김창수 초대분회장이 지부장으로 당선됐으나 “금속노조와 결탁해 이진엽, 이성균을 몰아냈다”는 비난에 직면, 1976년 2월 2일 사퇴
∎1976년 10월 5일 정권 해제된 이성균이 지부장에, 김영만이 사무장에 당선, 1983년까지 역임 △1983년 6월 이성균 지부장 상여금 문제로 사퇴, 김영만 사무장이 후임에 선출
1985년 이전 대우자동차노동자들의 투쟁
대우자동차 자본의 노무관리 방식이 노동자들에게 미친 직접적 결과는 전반적인 생활의 악화와 의식의 위축이었다. 그러나 대우자동차 노동자들은 1971년 노동조합이 처음 결성될 당시부터 회사의 부당한 처우에 대해 집단으로 단결해 자신의 주장을 관철하는 강력한 집단행동의 전통을 가지고 있었다. 1971년 8월 노조결성에 주도적으로 참여한 조합원 208명이 집단 해고됐을 때 800여 명이 항의하며 즉각 파업농성에 돌입, 이틀 만에 300%의 해고수당과 부분복직을 쟁취했다. 옥상에서 농성하던 조합원들에게 가족들이 주먹밥을 만들어 와 던져줬던 일은 대우자동차의 전통과도 같은 것이다.
1980년 들어 군필 복직자들을 중심으로 불만이 표출되기 시작했다. 전희식과 20여 명의 군필 복직자들은 회사에 복직, 정기승급, 상여금, 연월차 휴가에서 정당한 대우를 요구했다. 이에 사측은 개별적으로 회유하는 한편 전희식을 인천공장으로 전격 인사 발령, 조합원 자격을 박탈시켜 버렸다. 1983년 프레스부 안진호가 같은 문제를 제기하자 노동조합이 노동부에 질의해 6월 말 회시를 받기에 이른다. 회시문의 내용은 “군복무 기간이 근속기간에 포함되지는 않지만 정기승급, 연월차 휴가 및 퇴직금 산정 시에는 군복무 기간이 포함되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노조는 이 회시문을 공개하지 않았는데 1984년 8월 송경평을 중심으로 한 군필 복직자들이 문제를 제기하는 과정에서 적나라하게 밝혀지게 됐다.
한편 송경평은 대학 출신으로 1984년 상반기 예비군 기본교육 훈련을 회사가 유급으로 인정하지 않는 데 항의하는 투쟁을 전개해 유급으로 인정받았고, 이 과정에서 학력이 밝혀지게 됐다. 회사는 송경평이 대학 출신이라는 이유만으로 부서이동을 강행하려 했으나, 송경평은 이를 받아들이지 않고 자신이 대학 출신이라서가 아니라 군필 복직자들에 대한 차별대우에서 시작된 문제임을 밝혀내고 오히려 적극적으로 그 부당성을 알리면서 현장투쟁을 계속해 나갔다. 이에 군필 복무자들이 투쟁에 동참하자 이에 힘을 얻은 송경평은 회사의 최후통첩과 탄압이 계속됨에도 회사의 부당처우 문제를 노동부에 진정하고 노동위원회에 부당노동행위 구제신청을 했다. 이 진정서는 당시 대우자동차 노동자들이 갖고 있던 불만을 구체적으로 담고 있어서 무관심하던 군필 복직자들까지 이 투쟁에 동참하게 만드는 실질적 계기가 됐다.
이 진정서 배포를 계기로 군필 복직자들을 중심으로 노조 집행부에 항의하는 면담투쟁이 11월 초순부터 네 차례에 걸쳐 진행됐다. 회사가 면담투쟁에 적극적으로 가담했던 이용선을 양평동 정비사업소로 부서 이동시키자 이용선 발령이 발표된 다음 날 조합원 600여 명이 식당에서 공개집회를 하고 집행부의 무기력과 직무 태만 및 반조합적인 성격을 폭로·공격했다. 이를 계기로 노동자들의 투쟁 분위기가 폭발적으로 고양됐으며, 이후 3~4일에 걸쳐 중식 시간과 일과 후 집회 및 시위를 계속했다. 11월 11일, 조합원 600여 명은 재차 집회를 열어 “우리의 정당한 권리를 위하여 끝까지 싸우자”라는 성명을 발표했는데 △군필 복직자 부당처우 즉각 시정 △상여금 지급기준 원상회복 △수당을 통상임금에 포함 지급 △휴무 토요일 근무에 대해서 통상임금의 l50% 즉각 지급 △조합집행부는 반조합적 태도를 반성하고 전 조합원 앞에 공개사과 △선거 일정과 선거구를 공평하게 결정하고 즉각 발표 △회사측은 조합 활동 탄압에 대해 공개사과 및 즉각 중지 △조합 활동을 이유로 강제 부서 이동시킨 송경평·이용선 원직 복직 등 8가지 조건을 내걸고 투쟁을 전개했다.
이어 노조 민주화 추진 세력은 현장의 압도적인 지지 열기를 바탕으로 현직 대의원 중 집행부에 비판적인 세력과 연대해 집행부 불신임 결의안을 제출했다. 부평 본조 22명의 대의원 중 18명과 인천지부 대의원 1명 등 총 19명은 서명한 결의문을 배포하고, 요구사항이 관철되지 않으면 총사퇴할 것을 다짐한 채 대의원대회에 참석했다. 그러나 12월 20일과 21일에 걸쳐 진행된 대의원대회는 날림으로 진행됐고, 심지어 사업보고서에 대해서조차 토의하지 않고 날치기로 통과시키자 본조 대의원들이 단상을 점거하고 의사봉을 빼앗았다. 위원장은 본래의 의도가 저지당하자 대회장을 빠져나가 회사 간부와 경찰의 호위 아래 회사 밖으로 사라졌고, 대의원대회는 무기한 정회에 들어가게 되었다. 당연히 노동조합도 정상적인 활동이 정지됐다.
1984년 12월 24일, ‘노동조합 정상화 추진위원회(노조정상화추진위)’가 발족해 비조직적인 활동의 취약성을 극복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불신임 과정에 적극적이었던 대의원들과 소극적이었던 대의원들 사이의 갈등이 쉽게 봉합되지 않은 상태에서 12월 27일 이용선, 28일 송경평이 해고됐다. 한편 노조정상화추진위에서는 <근로자의 함성>이라는 소식지를 제작·배포함으로써 현장 조합원의 신뢰를 획득해가기 시작했다.
1985년 1월 25일, 무기 연기되었던 대의원대회 소집공고가 났으나 부평 본사 22명, 부산지부 7명, 동래지부 7명, 정비지부 4명, 인천지부 1명 등 총 41명의 대의원 중 노조정상화추진위 쪽 대의원은 17명에 지나지 않았다. 결국, 불신임 찬성 17표, 반대 24표로 불신임은 결국 부결되고 말았다. 불신임안이 부결되자 노조정상화추진위는 한동안의 침체를 벗고 1985년 임금인상 투쟁 준비에 총력 매진하기 시작했다.
1985년 임금교섭 준비과정과 회사 대응
노조정상화추진위는 <근로자의 함성> 7호를 통해 △최저생계비 부족분 연차적 보상 △실질임금 수준 유지 위해 생계비 상승분 전부 임금인상에 반영 △전 종업원의 피땀 어린 노력의 대가인 생산성 향상분에 대해서는 공정한 분배가 이루어질 수 있도록 임금인상에 반영 △임금 격차 확대 막기 위해 정액 인상 등 1985년 임금교섭의 기본원칙을 제시하고, 이에 근거한 임금인상률(24.9%)과 요구액을 밝혔다.
회사가 내세우는 경총의 5.2% 가이드라인이나 노조의 18.7% 인상안과 비교해볼 때 이러한 현장 조합원들의 요구는 집행부로서도 여간 부담스러운 것이 아닐 수 없었다. 노조는 임금인상 요구안 작성팀에 반집행부 대의원의 참여를 요청해, 조합측 3명(이완재 부위원장, 이강남 기획연구실장, 이택주 기획차장)과 열성조합원측 대의원 3명(장경열 공무부 대의원, 전길수 차체2과 대의원, 홍영표 차체3과 대의원)으로 임금인상 요구안 작성팀이 구성됐다. 2월 23일부터 27일까지 요구안 작성작업에 들어갔지만, 차이를 좁히지 못해 반집행부 쪽은 결국 불참하게 됐다.
1985년 3월 18일 반집행부측이 간부 합동회의 소집 요구서를 제출했으나 미온적이던 노조 집행부는 반집행부측이 3월 20일 저녁 9시까지 철야농성을 전개하자 “3월 22일 간부 합동회의를 개최하겠다”고 밝혔다. 그러나 집행부가 회의를 하루 앞둔 3월 21일, 노보를 통해 요구율을 18.7%로 발표하는 바람에 조정안 도출에 실패하고 말았다. 회의가 결렬되자 위원장은 직권으로 임금인상 요구안을 18.7%로 결정했고, 교섭권과 체결권이 없었던 반집행부측으로서는 이 요구안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으므로 제 수당의 신설·인상으로 대체한다는 약속을 받고 3월 23일 요구안을 회사에 발송했다.
1985년 들어 조합원들의 투쟁 열기는 계속 상승하고 있었다. 2월 28일 <근로자의 함성> 6호를 배포하던 조합원들과 이를 저지하던 회사 간부 사이에 물리적 충돌이 발생했고, 3월 5일에는 <근로자의 함성> 7호에 실린 조합원 폭행 사건에 대해 조직부장 박화준이 엔진부 유선희 대의원과 언쟁 중 “사실이 아니다”라며 폭행해 전치 10일의 부상을 입혔다. 이러한 폭행 사건에 엔진부는 3월 8일 전체 공청회를 열어 전원이 박화준 제명, 위원장 공개사과 등을 요청키로 결의했다. 3월 15일 200여 명의 조합원이 중식 집회를 했으며, 3월 18일에는 ‘엔진부 대의원 폭행 사건 경위’를 배포하고, 3월 19일에는 170여 명의 조합원이 조합사무실에 몰려가 집행부를 규탄하자 3월 21일 위원장이 공식으로 사과하기에 이른다. 이러한 일련의 사건들이 조합원들의 단결력을 더 높인 것은 두말할 나위도 없다.
한편 회사는 3월 2일 정기호봉승급 4.3% 인상안만 발표하고 임금교섭에 대하여 아무런 반응도 보이지 않다가 3월 23일 노조의 임금인상 요구안이 도착하자 4월 6일과 4월 11일로 예정된 1차 임금교섭 연기를 요청했다. 회사는 또 4월 8일, 사장 명의의 공문으로 노조측의 임금인상 요구안에 이의를 제기하고 “동종업체의 임금인상 수준 등을 공동으로 조사한 이후에 단체교섭을 시작하자”면서 4월 11일로 예정된 1차 단체교섭을 또 일방적으로 연기했다. 이에 조합원들은 “회사는 성실하게 임금교섭에 임하라”는 유인물을 제작·배포하고 4월 8일 점심시간을 이용해 700여 명이 참여한 가운데 1차 조합원 비상총회를 열어 △대의원들이 선정한 홍영표 대의원을 단체교섭 위원에 포함 △18.7%와 제 수당 관철을 위한 공동결의문 채택 △단체교섭 일자를 11일로 할 것 등 세 가지 요구사항을 밝히고 요구사항이 9일 오전까지 관철되지 않으면 실력행사에 돌입할 것을 결의했다.
4월 9일에도 전날의 요구사항에 대해 응답이 없자 점심시간에 2차 조합원 비상총회를 열고 500여 명이 조합사무실로 달려가 위원장 면담을 요청했으나 거부당했다. 곧바로 150여 명이 현장을 돌며 시위 가담을 선동, 1,500여 명이 광장을 20분간 행진한 뒤 위원장을 나오게 해 조합원들의 요구사항을 전면 수락하게 했다. 4월 11일 간부 합동회의가 소집돼 위원장의 약속을 재확인한 후 회사와 교섭을 벌이기 시작했다.
그러나 회사가 준비 부족을 이유로 4월 11일에 이어 15일 교섭조차 정식으로 시작하지 않자 같은 날 조합원 1,000여 명이 노동조합 사무실 앞에서 연좌 농성에 돌입해 “파업 결의를 밝히라”고 촉구했다. 김영만 위원장에게 파업 결의와 집행부 사퇴 중 양자택일하라고 하자 김 위원장은 회의를 요청해 오후 8시 40분부터 20분간 긴급 간부합동회의를 개최했다. 이 회의에서 김 위원장은 집행부의 무능과 지도력 상실 등을 담담한 어조로 밝히고, “집행부 퇴진에 찬성하는 상임집행위 간부들은 거수하라”고 말했으나 단 한 사람도 손을 들지 않았다. 이어 “파업 결의에 찬성하는 사람은 손을 들라”고 하자 대의원 4명(홍영표, 유선희, 이용규, 한비석)만 손을 들었다. 퇴진과 파업에 대해 재차 의사를 물었으나 같은 결과가 나오자 위원장은 상임집행위 간부들을 향해 “나쁜 놈의 새끼들, 그렇게도 용기가 없는 것들이 무슨 간부들이냐”며 욕설을 퍼붓고 조합원들이 농성하고 있는 밖으로 나가 “4월 16일 오전 8시를 기해 총파업에 들어갈 것을 선언합니다”라고 발표하면서 파업에 돌입하게 된다.
파업농성의 전개와 합의서 작성
1985년 대우자동차 봄철 임금인상 투쟁과 파업농성은 4월 16일 오전 8시에 시작되어 4월 25일 새벽 3시 김우중 회장과 농성투쟁 대표자 홍영표 대의원 간의 합의 서명이 이루어질 때까지 10일간 계속됐다.
∎ 4월 16일(화) 오전 8시 2,200여 전 조합원이 출고 사무소에 모여 총파업 돌입. 오전 10시 인천공장에서도 파업 돌입. 오후 2시로 예정된 3차 교섭에 회사가 3시간 만에 나왔으나 결렬.
∎ 4월 17일(수) 이틀째 비가 내려 2,200여 전 조합원 식당에서 농성. 오후 1시 사장 명의의 ‘노사협의회에 즈음하여’라는 성명서를 조합원들이 불태움.
∎ 4월 18일(목) 오후 간부 합동회의에서 회사가 먼저 단체교섭 요청할 때까지 교섭 중지 결의. 오후 김우중 회장이 조합 전 간부들과 간담회를 하며 “좀 봐달라”며 눈물로 호소. 파업에 호응하는 사무직 직원들의 성명서 나옴.
∎ 4월 19일(금) 오후 5시 회사가 조합원들에게 “내일부터 출근하지 말라”는 지시를 내림. 조합원들은 실질적인 휴업 조치로 받아들이고 350여 명이 기술센터 3층 점거하고 철야농성 돌입. 예비군 비상훈련 등으로 농성 조합원 상당수 줄어듦.
∎ 4월 20일(토) 오전 11시 회사가 100볼트를 220볼트로 승압시켜 대외방송 앰프를 고장냈지만 조합원들이 2시간에 걸쳐 복구해냄. 경찰의 강제해산 움직임에 조합원들이 각목, 쇠파이프, 신나, 석유 등으로 무장. 35세 이상 조합원들은 가족이 해온 주먹밥을, 나머지는 빵과 우유로 식사.
∎ 4월 21일(일) 새벽 3시 김우중 회장과 농성 대표가 교섭했으나, 종래 주장을 되풀이해 무산. 오후 8시 김우중 회장과 6차 교섭 했으나 5.7% 안 철회하고 기본급 8% 제시로 결렬. 가족들이 가져온 식사를 경찰이 제지하자 조합원들이 식사 거부 결의.
∎ 4월 22일(월) 오전 9시 홍영표 대의원과 김우중 회장 단독교섭, 8% 안으로 결렬. 회사는 ‘부친사망’ 등 전보를 통해 분열 획책. 회사가 사과할 때까지 교섭 중단 결의. 회사 직원들 어용 집회 열어 회사를 구하자는 흑색 유인물을 살포.
∎ 4월 23일(화) 오전 11시 홍영표 대의원이 김우중 회장 단독협상, 최대한 양보할 테니 타결하자고 했으나 결렬. 다음날 새벽 비상 교섭 재개키로 함.
∎ 4월 24일(수) 새벽 4시 농성자측 ‘기본급 10%, 수당 8.1%, 생산장려금 50%, 후생복지 제도 구체화’와 사측 ‘기본급 10%, 수당 4.1%, 생산장려금 50%, 후생복지 제도’ 등을 놓고 최종교섭 진행돼 이날 오후 2시 30분경 절충안에 합의. 오후 8시 회사가 불러온 노조가 협상 무효를 주장해 합의가 지연되자 조합원들 100여 명이 항의.
∎ 4월 25일(목) 새벽 3시경 김우중 회장, 최명걸 사장 등 임원들이 농성장에 와서 홍영표 농성자 대표와 합의서에 서명하고 신분보장 각서 전달. 적극 주동자 15명은 신변보장 확인될 때까지 피신키로 하고, 조합원들 현장 청소 후 경찰에 연행돼 5시간 만에 각서 쓰고 나옴.
4월 19일 이후 농성에 참여한 노동자의 수는 비록 300여 명으로 줄어들었지만, 그 투쟁 열기는 수천 명 이상이었다. 그러나 농성이 장기화하면서 조합원들이 조금씩 지치기 시작했고, 회사의 회유와 협박에 동요하기도 했다. 따라서 요구사항의 100%는 아니었지만, 임금인상 부분에서 △호봉승급(4.3%), 기본급인상(8.0%), 수당신설(4.1%) 등 총 16.4% 인상 △비공식적으로는 장려금을 최고 4.1% 인상하되 임금조정을 위한 단체교섭에서 결정 △기본급 인상률은 6개월 이내에 수당 중 2%를 변경 조정해 10%로 △TQC와 근속수당 2개 수당은 2%가 기본급으로 변경되더라도 계속 유지키로 합의했다. 또 복지후생에서는 △6개월 이내에 직원주택 건설에 착수해 본인 20%, 은행 30%, 회사장기융자 50% 제공 △타사 근로조건에 대한 조사를 노사공동으로 실시해 6개월 이내에 유해수당, 위험수당, 고열작업수당 등 신설 △식사는 정상조업과 동시에 즉각 개선하고, 해고된 송경평 이용선 박재석 및 다른 해고자에 대한 복직요구는 포기한다는 것으로 합의가 완료됐다. 이로써 10일간의 파업투쟁은, 회사의 신분보장 약속에도 8명이 구속되고, 1명이 해고된 채 마무리됐다.
1985년 대우자동차 임금인상 투쟁의 의의
대우자동차 투쟁은 1980년 신군부 세력의 집권 후 노동계 정화조치로 노동조합 활동이 완전히 위축된 상황에서 수도권에 있는 대형 사업장이 열흘간에 걸친 대투쟁을 전개함으로써 노동조합운동을 전면적으로 부활시켰다. 여타 사업장에 강력한 파급효과를 미쳐 이후 구로지역 연대투쟁이 잇따라 전개됨으로써 노동운동이 침체를 벗어나게 하는 결정적인 투쟁이었다.
대우자동차 노동자들 투쟁의 의미는 첫째, 재벌기업 산하의 대규모 중공업 사업장에서 일어난 쟁의였다는 점이다. 이는 과거 중소규모 노동집약적 산업에서 대기업 사업장의 거대한 흐름 생산체계에 기초하는 노동운동으로 조직기반의 변화를 보여줬다. 둘째, 남성 중심의 쟁의였다는 점이다. 특히 1970년대의 노동운동이 섬유를 중심으로 한 여성사업장에서 전개됐던 반면 대우자동차 노동자들의 파업투쟁은 남성 중심 사업장에서 시작돼 그 파괴력과 영향력이 위협적으로 등장하기 시작했다는 점을 들 수 있다. 셋째, 과거의 투쟁이 대부분 사전준비 없이 탄압에 대한 수세적 방어 차원에서 발생했지만, 대우자동차의 파업은 철저한 준비를 바탕으로 자본에 적극적인 공세를 펼쳤다는 점이다. 넷째, 현장노동자와 대학출신 노동자 간의 배타성과 불신을 걷어내고 긴밀한 유대를 발전시킨 점이다. 다섯째, 노동쟁의조정법 따위의 악법들이 부정됨으로써 노동관계법의 개정이 없다면 이후의 투쟁도 법적 테두리 밖에서 강행될 것임을 예고했다. 여섯째, 투쟁방식에서 철저하게 조합원 대중의 참여를 고조시키면서 진행된 대중운동 방식이 관철됐고, 현장 내 언론매체를 개발함으로써 노조 운동의 민주주의를 실현해 낼 수 있었다. 마지막으로는 일반 조합원들의 경제적인 요구와 노조 민주화 투쟁을 상호 결합하는 차원에서 노조 운동의 질적 발전을 꾀하였다는 점 등을 의미로 꼽을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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